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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소라 시 모음 열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4.03.01. 22:33:32   조회: 1823   추천: 208
    여명문학:

    허소라 시 모음 열편

    ☆★☆★☆★☆★☆★☆☆★☆★☆★☆★☆★
    10월의 노래

    허소라

    가늘고 긴 여름 노래 끝나고
    이제 세상은 거대한 지휘봉,
    사랑의 비밀구좌인 당신 앞에서
    옷을 벗기 시작 하였습니다
    은박지에 새겨진 악보
    한 음계씩 창을 닦으며 오를 때
    어디선가 쿵 울리는 당신의 기침
    모든 그을음은 투명으로 빛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곁으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창고로
    나뉘고 있었습니다.
    비로소 끝이 보이는 시간
    어차피 날지 못하는 닭들은
    그들의 자유를 알고 밀어내고
    옷을 벗은 우리는
    제 몸의 가장 단단한 곳에
    피리구멍을 내고
    가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지은 죄 벗으려고
    칼날 되어 불렀습니다.
    ☆★☆★☆★☆★☆★☆☆★☆★☆★☆★☆★
    과원에서

    허소라

    가장 깊숙한 육체의 모서리
    쪼개진 빛들이
    지난 계절을 거두며
    불타고 있다.

    한 꼭지에서
    넉넉한 여행이 준비되고
    누군가가 낭랑히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그 마을은 내 가장 깊숙한 뿌리로부터
    잠을 청한다.

    저마다 어깨가 떨어지고
    그 떨어진 어깨 사이로
    별이 내려오면

    오 가난한 내 영혼 위에도
    달랑달랑 불이 켜진다.
    ☆★☆★☆★☆★☆★☆☆★☆★☆★☆★☆★
    둥지

    허소라

    산새 둥지처럼
    문패도 울타리도 없지만
    들어서면 아늑한 보금자리
    비좁고 허술해도
    몸을 비벼댈 수 있는
    우리만의 안식처인걸
    세월의 가지가지 들치는 비바람
    등으로 막아내는 사랑의 둥지

    하늘 한 켠 그 허공에
    우리의 소망 띄워놓았지
    물소리와 햇살이 드는 뜰에
    심은 상치잎이 푸릇푸릇
    이만하면 부러울 게 없다.
    ☆★☆★☆★☆★☆★☆☆★☆★☆★☆★☆★
    仙선隱은里리를 다녀와서

    허소라

    夕석汀정
    스승이 촛불을 켜던
    부안읍 선은리 한 모퉁이
    처음엔 구두가 다르고
    옷 모양이 다르던 우리 다섯이
    이곳에 와서 기둥을 보며
    하나가 되었다.
    팔월의 불볕더위속 들녘은 탱탱 익어가는데
    지나간 세월과 우리가 마주한 세월의 포개임 속엔
    다만 크낙한 그림자 하나
    상소산 쪽으로 뻗혀 있었다.
    계화도를 지나던 바람들이
    노래를 잇기 위해 이곳에 오면
    마당구석 홀로 남은 시누대,
    말대신 살점으로 흔들리고……
    그래그래 가신 것은 오신 것이야
    흔들림은 무게야
    그럼에도 겁많은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되짊어지고 왔겠거니.
    ☆★☆★☆★☆★☆★☆☆★☆★☆★☆★☆★
    왜 머뭇거리나

    허소라

    옛생각의 길섶마다
    너의 해안을 떠돌던
    빛바랜 세월의 잎새들이 날린다

    모든 것들이 허공에 뜬다
    억새꽃 산등성이 빈 하늘엔
    그리움의 밑그림뿐

    사랑할 때 떠나라 했다
    내 그림자 하나
    강물에 떨어뜨리고
    구름이듯
    산을 넘으면
    그만인 걸
    아!
    나 여기
    왜 머뭇거리나.
    ☆★☆★☆★☆★☆★☆☆★☆★☆★☆★☆★
    우리와 백합 사이

    허소라


    저 한 송이 백합이
    어떻게 피어났는지
    우리는 묻지 않고 있다
    우리 손에는 못자국이 없으므로.
    저 파아란 강물이
    우리 모두의 이름을 등에 업은 채
    매운 계절을 어떻게 흘러왔는지
    우리는 물을 수가 없다
    광야를 달려본 일이 없으므로.
    그러나 모두들 일어나야 한다
    무덤은 사흘로 족하다
    부활하신 주의 음성에 귀기울일 때마다
    우리와 백합 사이는 가까워지고
    긴 강물이 흐르는 그 중심으로
    우리의 노래도 합류되리라
    한 줄기 햇살도
    주의 은총을 떠나서
    눈뜰 수 없음을 그대가 고백할 때
    세상에서 여위어진 손으로
    한줌 두줌 주의 사랑을 움켜쥐려 할 때
    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원정이 될지니.
    ☆★☆★☆★☆★☆★☆☆★☆★☆★☆★☆★
    키에 대해서

    허소라

    우리는 모두 키 큰 자가 되려 한다.
    이 봉우리 저 봉우리
    우뚝우뚝 서서
    지은 죄 덮어버리고
    기린처럼 멀리 빛을 던지며
    활자를 뿌리며
    활동사진 서로 보려고 뒤꿈치 올리며
    골리앗이 되려고
    키 큰 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더러는 키 작은 자가 되려 한다.
    바지를 줄이고
    나이를 줄이고
    명함을 줄이고
    여러 사람 뒤에서
    다만 한 뼘의 빛 사모하여
    작은 뽕나무 위에 오를 때
    아, 보인다 보인다
    저 넓은 바다
    오늘 밤 너의 집에서 쉬리라는
    그 말씀의 바다
    삭게오야, 삭게오야, 세리 삭게오야
    뽕나무 위에 있는
    너의 키는 결코 작지 않도다.
    ☆★☆★☆★☆★☆★☆☆★☆★☆★☆★☆★
    관촌에서

    허소라

    관촌에 오니 가을은 눈뜨고
    나보다 먼저 와 있는 키 큰 쑥대
    밀린 방학숙제로 두근거리던
    내 어린 날이
    투망에 걸린 채 파닥이고 있었다.
    불타는 욕망은 수천의 구름집에 빨려가고
    물 속에서 폈다쥐는 아이들의 주먹 속에
    내 일상이 유예될 때
    낯익은 바람떼 들
    하얀 갈밭 사이에서
    역장의 통과 신호를 흉내내고 있었다
    이제 옥수수는 옥수수끼리, 잡힌 은어는 은어끼리
    어느 것이나 당당하여 유언도 없더라
    저문 관촌 들녘에서
    산이 산을 부르고 물이 물을 부를 때
    나는 끝내 아이들을 부르며
    훠이훠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먼길

    허소라

    내 어제의 얼굴을 가지고 가신 당신
    구천에서 퍼올리는 아픔으로
    작은 불빛을 사루고
    꿈도 가다가 끊어지는 먼 길
    이제 빈 칼집에
    우리의 남은 사랑 채우러
    나는 갑니다.
    어둠보다 먼저 가려고
    어둠 뒤에 숨은 채
    이 세상 언약 벗어 던지고
    짐승 같은 울음도 벗어 던지고
    눈빛만을 앞세울 때
    비로소 전신으로 돋아나는 당신.
    오늘에야 적들은 또아리를 풀고
    나는 빈 마을에
    적들의 이름들로 꽃씨를 뿌리며
    달빛보다 먼저 가려고
    남은 눈 하나로도
    구만 리 먼 길을 절룩이며 갑니다
    ☆★☆★☆★☆★☆★☆☆★☆★☆★☆★☆★
    이 풍진 세상

    허소라

    우리가 굳이 떠밀지 않아도
    겨울이 떠나고
    우리가 굳이 손짓하지 않아도
    봄은 이렇게 절룩이며 오는데
    개나리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는데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구경꾼은 없더라
    팔짱 낀 구경꾼은 없더라
    지난 폭설이나 산불에도
    온전히 죽지 못하고 썩지 못한 것들
    마침표 없이 출렁이는 저 파도 속에
    비로소 그 큰 눈을 감는데
    아무도 구경꾼은 없더라
    그때 우는 모두는
    아우성이었으므로,
    그 속의
    골리앗이었으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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