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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향 시 모음 61 ∼ 131까지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4.03.01. 22:32:34   조회: 1865   추천: 154
    여명문학:

    김지향 시 모음 61 ∼ 131까지

    ☆★☆★☆★☆★☆★☆☆★☆★☆★☆★☆★
    봄 어지럼증

    김지향

    축대 밑으로
    꽁지 다 빠진
    찬바람의 머리칼이
    빠져나갔다

    햇볕에 성긴 머리털 몇 개
    흔들며 연분홍의 풋병아리들이
    짧은 종아리를 내놓았다

    골목에서
    재기치기로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아이들이 골목을 찢어놓는 소리
    뒤로

    창문만 열고 내다본 나는
    가슴에 오래 꽂아두고 싶은
    일기장처럼
    유년의 한 때에
    눈이 꽂힌다

    깜짝깜짝 놀라 뛰는 관자놀이로
    저기압에 눌리는 머릿속
    어지럼증이 다시 도진다

    어느새 나도
    아이들의 발치께로 떠밀린
    원경이 되었구나

    축대 밑으로 빠져나간
    찬바람의
    꽁지 빠진 머리채처럼
    ☆★☆★☆★☆★☆★☆☆★☆★☆★☆★☆★
    봄 편지

    김지향

    들 끝에서
    조그만 나비 한 마리가
    날아왔다
    내 눈이 주워 먹었다
    내 눈엔 뾰족뾰족
    샛노란 개나리가 돋아났다
    개나리는 시간마다
    2. 4. 6 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작년에 져버린
    들 밖의 봄이
    세상 속에 가득 깔렸다

    나비는 봄의 배달부였다
    ☆★☆★☆★☆★☆★☆☆★☆★☆★☆★☆★
    봄 혹은 안개꽃

    김지향

    봄눈이 초록 물을 떨구며 나르고
    알싸한 바람이 초록 물에 젖으며
    투정을 부리고
    안개꽃이 머리를 흔들며
    자꾸 구겨져 내리는 망사 손수건을
    털어내기 바쁘고
    창밖과 창안은 서로 다른 안개꽃들이
    안개를 피우며 머리만 빼들고
    물방울처럼 흘러 다니고

    (창 밖 세상은 안개꽃 부딪침 또는
    뒤엉킴일 뿐)

    열아홉 사춘기 때
    맨 처음 감춰두었던 안개꽃 사랑을
    더듬더듬 찾아낼 수 있을지
    바람의 그 낡고 거친 손이
    붙잡으면 이내 사그라지는
    안개 같은 처음 사랑,
    왜 하필 헝클어진 머리칼로
    봄눈 속에 목을 빼고 있는지

    봄눈이 초록 눈물로 내리는 창밖
    몸 풀린 바람이 큰 손바닥을 펴고
    새하얀 볼에 깜박이는 안개꽃 푸른 눈망울을
    (그때 잃은 처음 사랑인줄 알고)
    싸악 쓸어 가버리네)
    ☆★☆★☆★☆★☆★☆☆★☆★☆★☆★☆★
    봄꿈 1호

    김지향

    하늘에 쌓인 비,
    올이 풀렸다
    터진 실밥이 날리다가
    와르르 치마폭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려

    집 전체를 차지하고도 배가 고픈
    비가
    사방으로 갈기를 뻗어
    떠내려 오는 비명을 걷어 삼키고도 배가 고픈
    비가
    등줄기를 치켜들고 바람이 되어 달린다
    비켜, 비켜, 소리 지르며 넘어지는
    집 기둥을 잡고 버티던 나는
    기둥과 함께 나둥그러져
    머리에 대못으로 박히는 비의 부리를
    두 주먹으로 짓 으깼지만
    머리칼 하나 남기지 않고
    벌초나 하듯 싸악, 쓸어 쥐며
    비가 땅 끝으로 가는 중이다

    삶의 필름이 말끔히 씻겨
    백지가 된 나는
    땅 끝의 풍경을 백지에 주워 담아
    새 필름으로 땅 끝에서
    하늘가는 삶을 새로 시작하려다가

    깨고 보니 애석함뿐인
    황홀한 봄꿈이었다.
    ☆★☆★☆★☆★☆★☆☆★☆★☆★☆★☆★
    봄밤을 태우는 초롱꽃

    김지향

    키를 꼬부려 한껏 품고 있던 불씨를 드디어 내놓은 나무들
    나무들이 오지랖읕 열 때마다 뭉텅 뭉텅 불무더기가 나온다
    곁에 섰던 바람이 체머리를 흔들며 뛰어간다

    바람이 뛰어가며 체머리를 흔들 때마다
    불씨도 사방으로 퉁겨간다
    겨우내 곤히 자던 강이 입을 크게 열고 물줄기를 쏘아 올린다
    바람이 펴놓은 하늘로 치솟은 물줄기 초롱꽃으로 내려온다

    바람이 강둑으로 몸을 누인다
    따라가던 길도 옆으로 초롱꽃을 끼어 차고 드러눕는다
    바람도 진화하는지 길 없는 길을 메어치며 쏙쏙 초롱 혀를 날름거리지만
    사람들은 초롱불에 데이지도 않고 와~와~ 소리만 지르며 바람 속으로 사라진다

    봄밤도 불길처럼 마음을 태우던 아픔도 불꽃에 타다 잠든다
    타지도 않은 나는 봄 문턱을 빠져나와 초롱불 곁에 멍청히 서서
    불꽃을 휘날리는 뜨거운 바람만 자꾸 호주머니에 집어넣는다
    ☆★☆★☆★☆★☆★☆☆★☆★☆★☆★☆★
    봄비 그리고 새싹

    김지향

    공간 밖 공간에서 자물쇠 망가진 분수가
    허름한 지상의 버티칼을 열어 제치고
    자꾸 몸을 헐어내고 있다

    미안한 듯 고개를 수그리며
    어머니 몸을 뚫고 제멋대로 솟아나와
    환한 세상구경을 하고 있는
    앙증스런 손가락들이
    땅의 얼굴을 곰보로 구겨놓고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흔들어대며
    자꾸 물을 부어주는 아버지를 향해
    공간 밖 공간에다 대고 고개를 꾸벅거린다

    하룻밤 사이 수만 장의 파란
    그림엽서를 땅 끝까지 펼쳐놓은 아이들
    ☆★☆★☆★☆★☆★☆☆★☆★☆★☆★☆★
    봄비 속에서

    김지향

    돌담 위에서
    나무등걸에서
    방울방울 푸른 물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물방울엔 갈고리가 있어
    풀들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길게 목이 뽑혀져 나온 풀꽃들이
    부끄러워 바위틈에 얼굴을 파묻는다
    풀꽃들의 얼굴은 숨을수록 더욱 불거져 나오고
    벌써 이마가 반짝이는 쑥잎이
    나무 등걸에 쑥물을 들이고 있다
    회양나무 쭈그렸던 허리도 벌떡 일어나
    머리를 씻고 종아리를 씻고
    부리가 새파란 새끼 제비를 태우고 있다
    빗물 쫑, 쫑, 떨어진 자리마다
    깨끗한 얼굴, 깨끗한 세상
    꽃분홍 꽃밭에선
    꽃분홍 꽃망울들 불꽃놀이 하고
    불티 송이송이
    산과 들에
    멀리 멀리 뛰어간다
    아, 불꽃 뛰어가는 송이 속에
    나는 또 왜 섞여 있나
    화끈 화끈 가슴이 달아
    나이도 줄줄 흘려 버리면서
    새로 피는 꽃이
    처음 있는 꽃이 되려고
    뛰어가니
    어쩌나
    ☆★☆★☆★☆★☆★☆☆★☆★☆★☆★☆★
    봄을 낳는 나무들

    김지향

    후미진 골짜기
    흰 보선 신은 채
    볼록볼록 배를 안고
    기도하는 나무들

    남녘땅 익은 바람이 건너와
    톡, 톡, 건드릴 때 마다
    꽃송이 하나씩 낳는다

    아프고도 괴로운 겨울을
    만석의 몸으로 버티더니
    아직도 머리엔 흰 비녀 꽂은 채
    줄줄이 꽃송이 낳기 바쁜 나무들

    (산기슭마다 나무들의 아픔이
    빨갛게 피었네)

    저 터진 꽃송이에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을 꺼내보며
    가슴에 햇덩이 하나씩 품어
    꽃송이의 삶에게 열기를 보낸다

    후미진 골짜기
    산꿩이 홰를 치며
    목청을 뽑는 긴 봄날
    창 열고 내다보면
    아직은 맵싸한 산이마
    절반은 안개에 싸여있네
    ☆★☆★☆★☆★☆★☆☆★☆★☆★☆★☆★
    봄이 나를 읽는다

    김지향

    누군가 세상 버티칼을 열어제친다

    봄이 아장 아장 걸어온다 나무도 없는 빌딩 꼭지에
    만지면 사그라질 황금빛이 쿡, 주저앉는다 황금빛 속에
    가라앉은 빌딩이 얼뜨기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평퍼줌하게 눕혀 놓은 평지에 발을 넣고 있는 나무들이
    돌돌 말린 들판을 쫘악 펴 놓고 호주머니에서 꺼낸 노랑물감을
    군데군데 뿌리는 중이다

    버스에서 뛰어내린 바람 한 소절이 방금 나온 개나리 목을 뽑아내
    온 들판에 노란 바다를 깔아놓는다 촐랑촐랑 노랑물의 항아리들이
    내 눈을 읽는다

    누군가 불을 낸 하늘 기슭 불긋불긋 몸 태운 조개구름이
    천천히 걸어가다 잠깐 멈추어 입 다문 채 할 말이 많은
    내 눈을 멍청히 읽는

    개나리 목이 창안을 기웃거리다 푹 빠진
    모니터 폴더 속에 숨었다 나왔다 하며 언 몸을 풀어내는
    키보드 커서가 내 눈에 담긴 개나리 말을 읽는다

    누군가 이끌고 가는 병정놀이 행진처럼 발소리 맞추어 가다 서다
    하는 자판기가 말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내 눈을 읽는다
    이제 내 눈은 기계음도 바람소리도 아닌 합성음의 추상어로
    아지랑이 같은 감탄사를 마구 뿜어내고 있다
    ☆★☆★☆★☆★☆★☆☆★☆★☆★☆★☆★
    불 길 끝에서 일어나는

    김지향

    땅을 덮고 있는
    한 장의 죽음을 걷어내고 나면
    땅껍질을 떠밀고 나오는 새파란 불
    도깨비 불처럼 사방팔방
    옮겨붙기 바쁘다

    밧줄에 묶여 얼음이된 목선도
    갯버들 언 손에 잡혀 먼지가 된 꿈도
    지워진 둑길에 떨어져 돌이된 별무리도
    봄 불에 모오두우 몸 풀려
    달리는 말 갈기가 되었다

    세상 곳곳에서 꼼지락거리며 일어나는
    빛 한 모금
    오랜 기다림으로 목마른 사람들의
    폐혈관을 열고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 몸에 빛살이 뛰어가는 봄
    새파랗게 잎이 돋은 사람들의 눈에서
    줄줄이 꽃이 태어난다
    속살을 열고 어지럽게 터져나온 꽃불이
    웅크리고 자는 거리를 깨운다
    오늘은 꽃의 꽁무니에
    무단가출 꼬리표가 붙지 않았다

    땅은 온통 빛도가니
    하늘 마저 내려와 불을 질렀다
    눈싸움을 벌였던
    어제의 적의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
    불면증

    김지향

    밤새 길이 혼자 길을 걷는다
    길을 신고 가던 발을 내려놓은 밤엔
    불빛만 태우고 길이 혼자 걷는다
    한참 걷다보면 옆구리에서 자꾸 찢겨나가는
    길이 또 길을 신고 혼자 걷는다

    길이 길을 이고 걷는다
    길 위의 길로 또 길이 혼자 걷는다
    깊은 밤엔 어둠만 태우고
    하늘을 신고 길이 걷는다

    머리 위엔 어둠을 걷어내는 빛이
    꽃 덤불을 이룬 봉화들이
    길이 되고 있는
    하늘 밖의 길 밖의 길로
    길이 혼자 끝도 없이 걷는다
    ☆★☆★☆★☆★☆★☆☆★☆★☆★☆★☆★
    비 온 뒤 풀밭

    김지향

    시간들이 나를 팽개치고 앞질러 가더니
    뜰 앞 풀뿌리를 키웠나 봐
    비 온 뒤 창문을 열고 보니
    뜰 앞이 새파래졌다
    시간이 풀의 세포 속에 스며들면
    풀잎의 키도 시간처럼 빨리 자라나 봐

    비 온 뒤 봄 아침
    풀밭이 잘 닦은 거울이 되었다
    거울이 되어 사람의 가슴도 비춘다
    그러므로 풀밭에서는
    사람의 속도 투명해진다

    아직 아무 발자국도(시간의 발자국말고는)
    지나가지 않은 풀의 가슴에
    사람 가슴의 흙탕물이 튕겨갈까봐
    바라보기가 미안하다

    비가 이제 그만 짓밟았으면 싶다
    풀의 눈물이 될까 봐 마음 아리므로.
    ☆★☆★☆★☆★☆★☆☆★☆★☆★☆★☆★
    비 사이로 찾아가는

    김지향

    어제와 내일 사이엔
    얼어붙은 비가 빡빡하게 들어서 있다
    공간을 붙들고 서 있는 비 사이로
    바스러진 시간들을 홈질해 본다
    듬성듬성 기워진 시간들이
    흘러가는 스크린을 올라탄다
    스크린 앞머리에 칩을 꽂아본다

    타박머리 아이들이 냇가에서 물장구를 친다
    윗마을 운동장에선 덜 핀 해바라기들이 재기차기를 한다
    풍금소리가 들고 있는 아랫마을 예배당에선
    날개옷 속에서 장다리꽃들이 손을 모으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들녘에선 출렁이는 풍선꼬리를 따라
    빳빳한 다리의 개나리들이 달리기를 한다

    비를 걷어내면 환히 떠오르는 눈 시린 풍경들
    너머 풀려있는 스크린 끝 짬에 칩을 꽂아본다
    수직으로 얼어붙은 비를 부수고 힘차게 치솟는
    비행접시 한 채씩 연이어 열리고 있는 내일 안에
    까까머리들을 태우고 짙푸른 우주 속으로 잠적해간다

    어제와 내일은 멀고 먼 끝과 끝이지만
    실 티 같은 시간의 칩이 촘촘히 이어준다
    ☆★☆★☆★☆★☆★☆☆★☆★☆★☆★☆★
    비 오는 날의 삽화

    김지향

    창문은 눈이다
    눈밖엔 다 쓰고 버린 폐지 같은 시간들이
    떠다닌다

    철길 너머 찻길엔 갈잎소리를 내다 붓는
    비속을 동 동 발을 굴리며 엎어진 차량들
    옆으로 젖은 뻘에 눌려 불쑥불쑥 입이 나온
    풀들이 축 쳐진 머리칼로
    진종일 지분거리는 산성비를 패대기치고 있다

    찻길을 멀리 비켜선 고층 아파트
    창문들도 헤쳐 놓은 오지랖을 오므리며
    뛰어와 머리 부딪는 비를 내쫓고 있다

    건너 마을의 보석 밭을 가려버린 빗줄기 아래
    온 몸을 열고 있는 강기슭엔
    다 헤진 추억을 꺼내 쓰는 유람선 한 채
    온 힘으로 불을 밝히며 기진한 팔다리로
    한 장의 편지를 물 위에 띄우고 있다

    창문에 붙어 선 사람들은
    새 소식을 찾는 듯 두근거리는 눈으로
    멀리 가물거리는 불투명 속
    물살이 보듬고 있는 말없는
    편지를 헤쳐보는 중이다.
    ☆★☆★☆★☆★☆★☆☆★☆★☆★☆★☆★
    비속의 도시

    김지향

    땅에 닿으면 몸이 바스러지는
    수만 개의 거미줄에
    빌딩 숲이 젖는다

    끝도 없이 내리는 거미줄 속에서
    불쑥불쑥 키를 일으키는 빌딩들
    머리꼭지를 허공에 박으려다
    주루룩 퍼져 앉는다

    도시는 비속에 자란다?

    목이 마를 때 아무데서나 퍼마시던
    달빛도 걷히고 없는 오늘의 도시
    검은 늪에 뿌리를 박고 서 있는
    도시의
    거미줄 속에서
    한 묶음 연골의 바람처럼
    사람들은 삭아간다

    이제 도시는
    여행가방 입을 잠그듯
    검은 늪의 품을 채우고
    활활 타는 불가마의 블랙홀로
    싸악 빨려들어가
    무한 방목의 검은 빗줄기 속에서
    다 젖은 휴지가 될
    차례만 남았을까.
    ☆★☆★☆★☆★☆★☆☆★☆★☆★☆★☆★
    빠른 걸음으로

    김지향

    창 너머 또 창만 있다
    창 밖엔 햇빛을 신고
    몇 장의 삶을 깔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환히 내다보인다

    멀리 지붕 너머 허공을 안고 있는 밤나무 숲,
    밤나무 숲에서 자꾸 솟구쳐 뛰어가는 은방울 소리
    우리집 창문에도 걸려 방울소리를 흘린다
    소리의 날개 한자락을 베어내 가슴에 담는다

    햇빛이 곱슬머리처럼 창틀에 와서 꼬부라지면
    혼자서도 가슴에서 은방울 소리 자아 올리는
    나는 햇볕에 타다만 추억의 두루마리 끝자락을 펴며
    어딘가에 남아있을
    성냥개비를 찾아 본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
    창 너머 빠른 걸음으로 날아가는
    시간의 발자국이 추억의 두루마리를
    마저 쓸어가 버린다
    멍청한 나는 창안에 갇힌다.
    ☆★☆★☆★☆★☆★☆☆★☆★☆★☆★☆★
    사랑 그 낡지 않은 이름에게

    김지향

    그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만
    빛나는 이름
    사람의 무리가
    그대 살을
    할키고 꼬집고 짓누르고
    팔매질을 해도
    사람의 손만 낡아질 뿐
    그대 이름자 하나 낡지 않음
    하고 우리들은 감탄한다
    그대가 지나간 자리엔
    반드시 자국이 남고
    그대가 멈추었던 자리엔
    반드시 바람이 불어
    기쁘다가 슬프게 패이고
    슬프다가 아픔이 여울지는
    이름
    그 이름이
    가슴에서 살 땐
    솜사탕으로 녹아내리지만
    가슴을 떠날 땐
    예리한 칼날이 된다
    그렇지, 그대는
    자유주의자 아니 자존주의자이므로
    틀 속에 묶이면 자존심이 상하는 자
    틀 밖에 놓아두면
    보다 더 묶임을 원하는 자,
    그대를 집어들면
    혀가 마르거나
    기가 질려 마음이 타버리거나
    한다고 우리는 때때로 탄복한다
    그렇지, 사랑의 이름이
    사랑이기 때문
    실은 사랑이 슬픔 속에 자라지만
    기쁨 속에 자란다고 진술한다
    실은 사랑이 아픔 속에 끝나지만
    새 기쁨을 싹 틔운다고 자술한다
    사랑의 끝남은 미움이지만
    실은 끝남이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사랑은 사랑은 끝없이 자백한다
    ☆★☆★☆★☆★☆★☆☆★☆★☆★☆★☆★
    사랑 법

    김지향

    바람이 풀잎을 사랑하듯
    풀잎처럼 밟히는 자를 높이신
    그 분을 나는 사랑한다

    태초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랑 법을 드러내 보인 자를 사랑한다
    천민의 천한 발을 씻긴
    그 사랑을 내가 사랑한다

    없음을 있음으로 증명하기 위해
    오신 이를 사랑할 줄 아는 자를
    나는 끝내 사랑한다
    ☆★☆★☆★☆★☆★☆☆★☆★☆★☆★☆★
    사랑의 돌팔매

    김지향

    그 날 창문을 뚫고
    창문 뒤편으로 빠져나간
    그대 돌팔매
    방심한 방안의 우리 심장도 못 맞추고
    우리 머리칼 하나 못 맞추고
    한 알 티도 없는
    하늘나라 보좌에 곤두 박혔으므로
    넘치는 힘을 휘날리며 곤두 박혔으므로
    어김없이 되돌아올 시간을 기다리며
    우리는 눈을 떴었지
    우리가 눈을 뜰 때
    눈 속 모닥불도 환히 눈을 뜨고
    멀지않아 우리 심장을 다시 겨눌
    그 돌팔매를 찾아보았지
    그 때 였어
    하늘 보좌에 곤두 박힌 돌팔매가
    커다란 사랑의 불새로 오고 있잖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 태어난
    불새 한 마리
    파란 하늘에서 불꽃놀이 하다가
    나직이 나직이 돌아오고 있잖아
    그래, 그것이었어
    사랑의 불새로 돌아옴, 바로 그것,
    그것은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창문을 열고
    크게 팔을 벌려 끌어 안아야할
    우리의 희망이다
    하늘 문도 연 하나님의 용서다
    ☆★☆★☆★☆★☆★☆☆★☆★☆★☆★☆★
    산딸기나무

    김지향

    내 유년의 언덕
    저절로 왔다 저절로 가버린
    산딸기 넝쿨이 지금도 내 기억의 모퉁이
    다 몽그라진 사진 한 컷으로 걸려있다

    산딸기나무는 사람이 찾아올 때만
    웅크린 독수리처럼 온몸이 갈고리가 된다
    구부린 등줄기에 내민 안테나를 깜박이며
    누군가를 찾아내려는 듯 새빨간 불을 켠 채

    (기억의 저 편에서 자꾸 벨소리를 떨구는
    빨간 신호등을 켠 산딸기나무
    때때로 위급한 신호음을 보내온다)

    나는 그때마다 생각이 뚫어논 틈새로 들어가 본다
    내가 사랑했던 그 아이도 가끔 그 아이가 뚫어논
    틈새로 내려와서 유년의 언덕에서
    손톱에 봉선화 꽃물을 들이며 놀다 가고
    뜨내기 등산객들도 와서 발에 박힌 못을
    빼놓고 가는

    이제는 푸석한 얼굴의 산딸기나무
    등산길 옆으로 안테나를 벗어 눕혀놓고
    촘촘히 박힌 눈 같은 열매를 온 힘을 다해
    반짝이는 산딸기나무

    이제 곧 찾아올
    고속도로 시멘트 밑으로 생목숨이 엎질러지기 전
    그 알싸한 고통을 열매로 뽑아낸 그의 삶을 배우러
    나는 때때로 생각의 틈새로 들어가
    긴 잠을 잘 때가 있다.
    ☆★☆★☆★☆★☆★☆☆★☆★☆★☆★☆★
    산에서

    김지향

    산이 안개를 버린다
    버려진 안개 너머로
    시간은 또 다시 떠내려가고
    떠내려가는 시간 위로
    해는 얼굴을 붉히며 떠내려오고
    푸른 바람을 안은
    산 잎사귀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는다

    빨갛게 볶인 해의 머리칼도
    여기서는 잎사귀 밑으로 쏟아져 구겨지고
    땅에 숨은 어둠은 쫓겨나
    멀리 뽑혀져 나간 하늘 밖에서
    머뭇거린다
    풀어 놓은 새들은 머리끝에서 도. 레. 미를 부르고
    머릿속의 해묵은 멍울도 풀바람을 타고 삭아간다

    안개를 버린 산의 투명 속에선
    누구나 한점 허물도 감추지 못한다
    일점흑一點黑도 감추지 못하는
    산 잎사귀가 되려고
    잎사귀의 누이라도 되려고
    나는 몸 속 속속들이 햇빛을 켜달고
    산으로 간다
    ☆★☆★☆★☆★☆★☆☆★☆★☆★☆★☆★
    살아난 새

    김지향

    오랜만에 광화문 모퉁이에서
    그 때 죽은 새를 만났습니다
    하얀 대낮의 햇빛으로 지워져
    없어져버린 비둘기
    붉은 부리는 붉은 비를 물었고
    날갯죽지도 반쯤 빛에 찔려 있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차량의 발에 짓밟혔다고
    곁에 있던 참새 한 마리가 일러 주었습니다
    그 때 나는 저 문명의 발에 잘린 날갯죽지를
    문명 밖의 흙으로 싸매주었습니다
    오늘 문득 발을 멈춘 비각 앞 모퉁이
    졸며 걷는 내 머리 위에서
    구구구 구구구 구구구
    그 때 죽은 비둘기가 한 장의 바람을 씌워줍니다
    새파란 하늘에 하얗게 떠서
    다 구겨져 가고 있는 나를 잡아 펴 줍니다
    이제 내가 어둑한 지하도를
    팔랑팔랑 웃음을 날리며 꼿꼿이 서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
    새벽

    김지향

    길끝,
    산은 그림자를 배속에 거둬들이고
    지퍼로 잠그는 중이다

    머리 푼 바람 갈기도 치렁거리는
    머리채를 바싹 잘라내면
    고슴도치로 웅크린 바람의 실눈
    끝으로 환히 돋아 오르는 새벽

    빈 가슴 하나 들여놓을
    문이
    마악 열리는 땅의 머리맡에

    부챗살로 편
    하늘의 손이 노르스름한
    빛을 부려놓는 중이다
    ☆★☆★☆★☆★☆★☆☆★☆★☆★☆★☆★
    세상과 시

    김지향

    세상은 시다

    발코니 창문을 내다보면
    반듯반듯한 찻길이 직사각형의 몸매를 끌고 반듯하게
    가다가 허리 구부린 하늘 다리쯤에서 세상 밖으로 지
    워진다 찻길에는 서로 다른 장방형의 차량들이 제각기
    제 모양의 성질 있는 눈을 달고 또 다시 하늘 다리 밑
    에서 지워 진다 내 눈 옆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콤퍼스
    다리를 돌리면 원추형의 몸통 위에 뾰족 십자가 안테
    나를 얹어놓고 사방에 빛을 뿌리고 있는 교회가 거대한
    몸통의 아파트와 눈싸움을 하고 있다 그 옆과 옆으로
    서로 팔걸이로 몸을 기대고 있는 북구풍 빌라와 오피스
    텔 멀리 뒤편 모과나무 울타리 속에 몸을 숨긴 앉은뱅이
    주택들이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소곤소곤 도시의 다성악
    을 이야기 하고 있다 모양이 각기 다른 명찰을 달고 앉아
    있는 건물들 지퍼를 열어보면 차곡차곡 세월에 절인 핏빛
    삶을 담은 생수 같은 시가 불쑥 솟아나온다 나는 날마다
    삶의 시를 구경하며 살아서 솟구치는 생것의 시를 만져보
    며 떠나가는 시간의 손에 한 잎씩 쥐어 보낸다 얼마나 많
    은 시를 얼마나 많은 시간 속으로 보냈는지 아직 계산은 안
    했지만 새로운 날들은 또 다시 새로운 시를 보여줄 것이다

    세상은 시를 품고 있는 시의 창고이다
    ☆★☆★☆★☆★☆★☆☆★☆★☆★☆★☆★
    소나기와 빗금

    김지향

    하늘에 불빛이 빗금을 긋고 지나간다
    뒤따라 빗줄기가 빗금을 지우며 달려간다

    지상엔 우산들이 뱅글뱅글 바람과 숨바꼭질한다
    이윽고 우산 밑으로 숨은 바람을 사람의 종아리가
    힘껏 감고 간다

    지상으로 내려온 빗줄기가 우산들을 빼앗아
    도도하게 굴러가는 시냇물에 태워 보낸다

    홀랑, 비에게 넘겨준 우산을 멀리 보내며
    후들후들 젖은 사람들의 종아리가 한나절 내
    지상의 빗금으로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사람의 몸은 처음부터 지상의 빗금이었나 ?
    ☆★☆★☆★☆★☆★☆☆★☆★☆★☆★☆★
    소나무 아래서

    김지향

    잎을 건드리기도 전에 푸른 물살
    출렁이는 소나무
    눈 맞춤 한 번에도 눈 뿌리가 새파래진다

    요령소리 풀어 놓은 솔방울 속엔
    깜박이는 솔 씨가 까맣게 익어있다

    산새 한 마리
    솔 씨를 쪼아 물고 까불까불한 꽁지로
    하늘 가슴에 길게 수직선 한 줄 남기고
    잠적해 간다

    솔잎이 치켜세운 바늘손톱으로
    공기를 부욱. 찢어낸 하늘 전신에서
    깨진 물 항아리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늘의 물을 키대로 들이켠 소나무

    오늘 보니
    풀잎보다 생생한 푸르고 또 푸른
    물뿌리개가 되었네
    ☆★☆★☆★☆★☆★☆☆★☆★☆★☆★☆★
    술렁임

    김지향


    뜰 밖에 잠 깬 한 그루 실버들
    군살을 깨물고 새 손이
    새 눈을 열어
    소금에 절여진 세상 바다를
    살펴보고 있다
    기척을 기다리는 외딴 폐강에서도
    그 겨울 횡포에 풀 죽은 팔을
    맥 짚어보면서
    송어새끼들이 바깥나들이를
    서두르는 중이다
    하늘엔 한 줄 눈 붉은 실구름이
    앞산 이마를 가르고
    들새 몇 쌍이 새 씨를 물고
    물 뿌린 햇빛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무단가출한 복슬강아지
    등에 실려 두돌 지난 개구장이
    소금끼 먹어 술렁이는
    세상 소식을 듣고 있다
    톱질소리가 일어서는 아침뜰 밖엔
    조용한 침잠은 없다
    ☆★☆★☆★☆★☆★☆☆★☆★☆★☆★☆★
    시간들이 쌓이면

    김지향

    가을에게 닿지 않으려고
    질끈 눈감고 뛰었던 그 단내 나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미 가을에 닿았네
    삶은 쌓이고 쌓이면 가을이 되네
    다릿목에 앉아 시장 간 엄마를 기다리던 그 날부터
    내가 모운 기다림도 사랑도 눈물도
    이미 가을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네
    빛과 어둠 사이를 오르내림이 쌓이고 쌓여
    지름길과 에움길이 쌓이고 쌓여
    돌밭과 가시밭 길이 쌓이고 쌓여 계곡이 되듯
    계곡 같은 가을에 왔네

    이제 계곡에서 내려가면 어디로 가지?
    나를 따라오던 재생불능의 시간들은
    살이 다 긁힌 채 어느 개찰구에서 잠이 들지?
    ☆★☆★☆★☆★☆★☆☆★☆★☆★☆★☆★
    시간은 바쁘다

    김지향

    시간은 하루분의 파일을 열어놓고
    하늘 한 필 얹어놓는다 하늘 배꼽에서
    바람처럼 엎질러진 생 공기가
    사방으로 몸을 찢어 뿌린다
    공기가 몸을 찢을 때마다 풀씨 같은
    산, 들, 강이 머리를 드러낸다

    산에는 숲들이 들에는 풀꽃들이 강에는 물고기들이
    눈썹을 흔들며 수만 개의 기호로 일어난다

    기호는 서로 몸을 부딪치며 굴곡 심한
    보도블록 바닥을 갈아엎는다
    떨어져 나뒹구는 낙오 기호 몇 개비
    모지라진 발통 채 앰뷸런스에 실려 나간다
    입주자 오지 않는 빈 문서엔
    재빨리 시간의 손이 공기를 불러온다
    새로 불려온 공기는 팽팽한 배불뚝이 임부다

    새로 태어난 새파란 새 우주로
    빈자리를 채워 넣기 바쁜 시간은
    좀처럼 죽을 시간도 없다
    ☆★☆★☆★☆★☆★☆☆★☆★☆★☆★☆★
    쓰다버린 길 하나

    김지향

    풀 섶에 목덜미 묻힌 길 홀로
    옆구리 터진 휴지통처럼 엎어져 있다

    머리숱 다 지도록 바람소리 같은 소리꾸러미 굴러다니더니
    오늘 보니 자국만 흘려두고 소리는 가고 없다

    언저리 칡넝쿨이 멋쩍은 사랑가처럼
    거드름 피우며 얽혀주고 있을 뿐

    (세상은 밀려나간 시간 저편 꿈들은, 살아있어도
    퍼다 버리는 거름지게인가.)
    ☆★☆★☆★☆★☆★☆☆★☆★☆★☆★☆★
    아직도 풍부하다

    김지향

    대한민국 하늘은 아직도 풍부하다

    끝도 폭도 안 보이는 햇빛에 들려서
    금빛 불꽃이 때도 없이 타고 있는 하늘
    불꽃 사이로 구름이 지나가고
    올이 가늘고 굵은 빗줄기가 지나가고
    비를 먹은 별똥별이 지나가고
    몇 말의 바람도 지나간다

    대한민국 하늘에 눈을 꽂아두고
    마음 태우는 세계의 천문학자들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별을 지키는 또 한 개의 별 처럼
    시간이 하얗게 마를 때까지
    씨앗이 풍부한 대한민국 하늘로만
    치켜뜬 눈씨를 보내고 있다

    가슴이 풍만한 하늘은 황금빛 말고도
    아직 개봉되지 않은 살아있는
    자동판매기들이 줄줄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천문학자들은 아직도 차렷 자세로 버티고 서서
    하늘 배꼽에서 뜨고 지는 별똥만 응시하다니!

    따가운 응시를 피하고 싶은 대한민국 하늘은
    오늘도 공기열차, 비행접시, 우주왕복선 칩을 품어 안고
    끝도 없이 황금빛을 줄줄이 쏟아 붓고 있다

    우리는 세계에 으뜸가는 대한민국 하늘을 사랑한다
    ☆★☆★☆★☆★☆★☆☆★☆★☆★☆★☆★
    아침햇빛

    김지향

    비늘을 털고 살아나는 말들이
    문빗장을 풀고 들어와 앉는다
    창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간밤에 싸움을 걸던 검은 오뇌의 줄기,
    쇠 방울로 등솔기를 때리고 재빨리
    머릿속에 뿌리내린 그 어둔 줄기를
    뜯어내 버리고
    나는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엔 선잠 깨어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있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세상 깊이를 재고 있는 그대들의
    쳐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져 아침 햇빛 속에
    나부끼고 있다
    ☆★☆★☆★☆★☆★☆☆★☆★☆★☆★☆★
    안개

    김지향

    네가 날아간 빈 공간은 복통이 났다
    하늘이 뒤흔들려 눈물 같은 살비늘이
    주루룩 내렸다
    비늘을 받아먹은 땅
    입이 벌어진 틈으로 올라오는 안개,
    모락모락 안개는 올라와
    내 눈을 가렸으면 좋겠다
    몽롱한 안개처럼 너를 잊었으면
    좋겠다
    ☆★☆★☆★☆★☆★☆☆★☆★☆★☆★☆★
    애니메이션 2
    움직이는 TV

    김지향

    벽에서 티뷔가 걸어 나온다
    액자에 담긴 유기질의 파도소리가
    액자를 박차고 허공에 쏟아 부어진다

    허공에서 물고기 헤엄치는 소리가
    지상으로 길을 낸다 허공을 메운 소리들이
    땅에서 하늘로 조롱박 같은 티뷔를 만든다

    가장 높이 뜬 티뷔 집에서 소리 한 소쿠리씩
    깍깍 짖어대며 머리를 부딪치며 뛰어가고 뛰어온다
    소리는 동동 공기로 줄타기하며 온 하늘에 티뷔를 걸어놓는다
    머리를 부딪칠 때 마다 몸 한 채씩 만들어지는 소리 집
    까치 떼를 키운다

    아이들은 크게 연 입으로 까치 떼가 부려놓은 소리에
    입을 댄다 입 속으로 국수처럼 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소리를 마신 아이들이 티뷔가 되어 쑥쑥 자란다
    티뷔 전체에 말이 헤엄친다 기어간다 달리기한다

    말이 내 머리 속에서 사람들을 만들며
    자꾸 스물거린다 한 두름의 사람들이
    불쑥불쑥 밖으로 튀어 나간다 온몸이 소리인 티뷔
    깔깔깔 웃음을 쏟아 붓는 소리를 익혀 사방에
    나무들이 울긋불긋 열매들을 내놓는다
    ☆★☆★☆★☆★☆★☆☆★☆★☆★☆★☆★
    어느 날의 경주

    김지향

    바람이
    다 몽그라진 갈퀴를 세우고
    빼 마른 다리로 허공에서 뛰어 내린다
    사람들은 소름을 쓸며 도망간다
    번쩍번쩍 금빛을 뿌리는 뇌성이 길을 열어준다
    한 꼭지의 구경꾼도 없는 길엔
    허리 구부린 가로수 잎만 까르르 무너진다
    뇌성보다 앞선
    시퍼런 칼날을 휘날리며 번개가
    머리 위에서 바람과 칼싸움을 한다
    경주가 끝날 때쯤 덩그렁 아랫도리만 남은
    바람이 가로수 뒤로 아랫도리를 감춘다

    힘껏 달아나며 온 땅에 얼룩처럼 눈발을 늘어놓은
    바람 아래 떨어진 나뭇잎 밑에서
    내 발만 희끗희끗 배를 깐 겨울을 신고 달린다.
    ☆★☆★☆★☆★☆★☆☆★☆★☆★☆★☆★
    어둠 건너 하얀 마을

    김지향

    저어새가 물을 쪼다 솟아오른다
    팽팽한 공기가 퐁,뚫린다
    놀라 깬 하늘이
    노끈처럼 뚝, 끊겨 올라간다 아득히

    미쳐 하늘에 발을 넣지 못한 바람은
    서로 부딪쳐 깨진다
    바람조각들이 땅에 떨어진다 가득히

    하얀 길, 하얀 사람, 하얀 연못,

    채집해 놓은 하얀빛을
    바늘을 쥔 햇살이 박음질한다 촘촘히

    [연못가 꽃밭 속 예배당 아래
    말씀으로 씻긴 하얀 마을 하나]

    저 꽃을 밟지 않고도
    이 어둠을 건너서 갈 수 있을까.
    ☆★☆★☆★☆★☆★☆☆★☆★☆★☆★☆★
    어제와 내일 사이

    김지향

    어제는 지붕 서까래 아래 참새가 곤한 잠을 눕혔다
    밤새 후끈거리는 바람이 서까래를 들락거리며
    참새의 잠을 헝클어놓았다 참새는 새끼들을 거느리고
    허공에 까맣게 점을 찍으며 허공 밖으로 날아가고
    까맣게 타버린 어제는 도마뱀 꼬리처럼
    잘린 꼬리를 두고 사라졌다

    꼬리 잘려 넘어온 갈 곳 없는 어제의 꼬리위에
    시간은 또 다시 둥지를 튼다
    다시 햇볕을 쏟아 부어 날을 빚는다
    달랑달랑 미루나무 잎이 종을 치는 서까래 너머
    대밭 너머 키 낮은 뒷산 사철 푸른 솔숲에
    멈추어있는 햇볕이 바람에 쓸려 옆으로 길게
    퍼졌다 오므렸다 온몸운동 한다

    (북적대던 삶의 건수들은
    가닥가닥 채 썰고 버무려
    실타래처럼 뒤얽힌다
    날것 채로 지붕 밑에 들어가 묻혀버린다
    지붕 위로는 심심한 시간이 후끈거리는 바람에
    몸 전체가 익어간다)

    까맣게 타버린 시간을 물고 참새가 날아간 하늘 서쪽은 마침내
    온몸 운동하던 해가 마지막으로 가서 닿는 그늘 깊은 산기슭
    댕기머리 속으로 오늘이 쏙 내려가면 동강난 꼬리를 잡고
    내일은 또 다시 돋아 오른다
    시간은 연속극처럼 날을 만들어낸다

    (요즘 어제와 내일 사이는 후끈한 바람뿐이지만.)
    ☆★☆★☆★☆★☆★☆☆★☆★☆★☆★☆★
    얼어붙은 기차

    김지향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플랫폼엔 장승같은 사람들이
    떨리는 어깨를 감싸고 붙어 앉아 있다 잿빛 공간을 받친
    얼어붙은 지렛대나무 뻐석 마른 가지에 앉은 바람이 갈기를
    뻗어 잿빛을 흔들다 말다 한다 외투 깃에 목을 파묻고 멀리
    물러앉은 들판에 눈을 던져본다 둑 밑 논밭은 아직 오지 않는
    봄을 묻어놓은 파삭한 흙살이 숨을 죽이고 있다
    나는 얼어붙은 기차를 기다린다 아직 봄은 오지 않는다
    얼어붙은 논바닥을 흔들어본다 여름에 거기 있었던 풀들을 읽는다
    메뚜기의 애벌레도 펄떡 뛰어 오른다 논바닥 갈라진 틈새로 미꾸라지도
    퍼덕거린다 퍼덕거리고 펄떡여도 내 손엔 잡히지 않는다 머리로만 읽는다
    나는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린다 공기를 자르고 얼음처럼 산뜻한
    뒷맛을 깔아놓은 바람에 휘몰린다 기차 같은 바람에 얹혀간다
    세상은 여러 갈래의 길로 가지만 바람은 한길로만 간다
    한 길이 내 속에 길을 내고 달린다
    나는 한눈도 팔지 않고 한 길로만 달린다
    여러 갈래로 풀리지 않은 한 길에 옥죄인 오늘까지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
    얼음 꽃

    김지향

    소금인줄 알고 소쿠리를 받친다
    소금 빛 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나뭇가지가 내려놓은 겨울새 두세 마리
    모지라진 부리로
    어정어정 목을 축이고 간다

    산자락마다 망사 커튼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겨울은 느긋하게 앉아 세상을 구경한다

    코발트빛 하늘도 간 데 없고
    하늘에서 밤늦도록 눈을 껌벅이던 수은등도
    간 데 없고 마중 나와 어깨를 들썩이던
    젊은 날의 추억도 간 데 없고

    어디서 뛰쳐나온 산발한 바람 떼가 저희끼리
    혈기를 부리며 싸움판을 벌이는 이 겨울밤
    뒷산의 얼음 꽃만 하얗게 까무러치며
    하르르 무너지고 있다
    ☆★☆★☆★☆★☆★☆☆★☆★☆★☆★☆★
    얼음 꽃

    김지향

    소금인줄 알고 소쿠리를 받친다
    소금 빛 물이 주르르 쏟아진다
    나뭇가지가 내려놓은 겨울새 두세 마리
    모지라진 부리로
    어정어정 목을 축이고 간다

    산자락마다 망사 커튼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겨울은 느긋하게 앉아 세상을 구경한다

    코발트빛 하늘도 간 데 없고
    하늘에서 밤늦도록 눈을 껌벅이던 수은등도
    간 데 없고 마중 나와 어깨를 들썩이던
    젊은 날의 추억도 간 데 없고

    어디서 뛰쳐나온 산발한 바람 떼가 저희끼리
    혈기를 부리며 싸움판을 벌이는 이 겨울밤
    뒷산의 얼음 꽃만 하얗게 까무러치며
    하르르 무너지고 있다
    ☆★☆★☆★☆★☆★☆☆★☆★☆★☆★☆★
    여름밤의 꿈

    김지향

    그 곳으로 가는 비행선을 기다린다
    일찍 나온 별들이 한 롤씩 몸을 풀어
    하늘 위의 하늘로 다리를 놓는다

    바람이 자나간다 별떨기 다리 위로
    낯선 미이라의 얼굴들을 태우고
    여름밤이 달음박질 하는 꿈이 펼쳐진다

    빗줄기가 다리 위에 몸을 누인다
    별떨기 다리 위에 얹어놓은 무지개꿈이 지워진다
    하늘이 까맣게 저문다

    문득 지워진 꿈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복잡한 도시 아파트 창문 안에 몸을 가둔
    나의 빈 가슴으로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이 돌아온다
    ☆★☆★☆★☆★☆★☆☆★☆★☆★☆★☆★
    여름밤의 꿈

    김지향

    그 곳으로 가는 비행선을 기다린다
    일찍 나온 별들이 한 롤씩 몸을 풀어
    하늘 위의 하늘로 다리를 놓는다

    바람이 자나간다 별떨기 다리 위로
    낯선 미이라의 얼굴들을 태우고
    여름밤이 달음박질 하는 꿈이 펼쳐진다

    빗줄기가 다리 위에 몸을 누인다
    별떨기 다리 위에 얹어놓은 무지개꿈이 지워진다
    하늘이 까맣게 저문다

    문득 지워진 꿈이 나에게로 돌아온다
    복잡한 도시 아파트 창문 안에 몸을 가둔
    나의 빈 가슴으로 잃어버린 여름밤의 꿈이 돌아온다
    ☆★☆★☆★☆★☆★☆☆★☆★☆★☆★☆★
    여름이 살아난다

    김지향

    매미가 운다 나무 속에서 나무 밖으로 운다
    돌멩이처럼 굴러다니는 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한 개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 잎사귀들이 반짝거린다
    온 몸이 흔들린다 바람이 슬그머니 기지개를 켠다
    하늘과 땅 경계가 흔들린다 경계에서 나온 새떼가 날아간다
    하늘 끝으로 지워진다 구름이 치마폭을 펄럭인다 문득
    껑충껑충 뛰어가는 바람이 등에 구름을 업고 날개를 친다
    한 두 개비 떨어지던 비가 하늘과 땅을 허리띠로 동여맨다
    경계가 지워진다 비속으로 열린 서랍 같은 전철이 검은 빗금을 남기며
    수평으로 흘러간다 전철 속에서 매미가 운다 가다가 멈춘 전철에서
    수세미처럼 비어져 나온 사람들의 발끝에서 매미가 운다
    빨간 신호등을 짓뭉갠 차량이 매미소리를 매달고 달아난다
    차량의 거친 발통을 붙잡고 흔들리는 파도를 타고 가는
    교통순경의 입에서 매미가 운다 매미는 나무 밖에서 운다
    작년에 죽은 여름이 왁자지껄, 살아난다
    ☆★☆★☆★☆★☆★☆☆★☆★☆★☆★☆★
    오늘도 지상의 미물

    김지향

    눈길의 한계를 벗어난 하늘꼭지에서
    얼룩진 하늘 가슴을 뚫고
    새나는 새파란 빛을
    나는 감은 눈 속으로 본다

    하늘꼭지 위에 살고 있는 그 분이
    날마다 빛을 새로 만드는지
    세상 어둠 속에서 허우적일 때마다
    살아있는 날쌘 빛 한 꼬챙이가
    획, 연줄처럼 내 머리끝을 감는다

    흔들리는 하늘의 셀로판지가 찢어지고
    하늘 기슭에서 숨을 몰아쉬며
    생 바람이 달려온다

    머리 위까지 내려온 연줄을 붙잡으려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지만
    눈을 뜨고 나면
    팽팽한 바람의 배를 가르고
    한 치도 떠오르지 못한
    나는 오늘도 지상의 미물
    ☆★☆★☆★☆★☆★☆☆★☆★☆★☆★☆★
    와! 나는 어디로 가지

    김지향

    만지면 금방 손이 데이는
    불의 혀를 내민 네펜세스 꽃술

    사방천지 늘여논 향기의 그물 속으로
    일렬종대로 밀려든 곤충떼가
    초고속으로 사라져 들어간다

    밀물처럼 밀려들어간 곤충들이
    살에 찰싹 달라붙는 꽃잎의
    무진장 사랑에 주눅들었는지

    한 꼭지도 되돌아오지 않는
    비밀처럼 숨겨놓은 동굴 속에서
    유리병 깨지는 비명소리

    깊은 밤 깊은 밀실에서 소름을 씌우며
    치밀어 솟네

    와! 나는 어디로 가지?

    우주의 옆구리 송곳처럼 불쑥 솟은
    네펜세스 꽃잎 한 접시
    독기의 그물이 온 우주를 감싸쥐고 있으니!

    *네펜세스 : 보르네오 섬에서 자라며 꽃잎의 지독한 향기로
    곤충을 잡아먹는 독초의 일종
    ☆★☆★☆★☆★☆★☆☆★☆★☆★☆★☆★
    용곡동 아리랑 1

    김지향

    널따란 논밭엔 무엇이 살까
    살짝살짝 접힌 논두렁을 펴 본다
    풀섶이 달빛 속에 들앉아 새근새근 자고 있다
    논두렁은 아직도 쓰지 않은 풀섶들을 안고
    내 발에게 오지랖을 열어주며 아리랑이나 부르잔다
    앞뒤로 둘러리선 엔리치타워 놀이터에선
    아이들 팔 다리가 왁자 지껄 줄넘기를 하고
    드물게 아이들 틈에 낀 어른들은 먼 하늘 끝으로
    높낮이도 안 맞는 아리랑을 하모니카에 담아 띄우며
    말아 올린 바짓가랑이로 막춤을 춘다
    일 막이 끝나고 하모니카소리가 밀어 올린
    달을 등뒤에 둔 나는 방으로 돌아왔다
    금방 하늘로 간 하모니카 소리가 톡,톡, 창문을 두드린다
    하늘치마를 펄럭이던 그 줄넘기가 내 눈에 자꾸 커턴을 친다
    이 막이 마악 저물어 꿈으로 간 나는 용곡동 널따란 논두렁에
    빳빳이 서 있는 바람이 된다
    ☆★☆★☆★☆★☆★☆☆★☆★☆★☆★☆★
    웃음으로 채운 여백

    김지향

    오늘의 여백에 웃음 하고 썼다
    여백이 웃음으로 꽉 차버린다

    여백의
    풀밭에선 까르르
    나무꼭지에선 와라와라
    푸른 노래를 만들고 나서
    하얗게 바랜 집안 공간을 채운다

    공간이 빈틈없이 파랗게 살아나
    여백이 빈틈없이 웃음으로 채워져
    깨어나는 새 삶의 입구가 웃음이 된다

    나는 본다
    내 몸 안에서 발신되는
    미세한 총천연색의 전파가
    어둠을 죽이고 나온 빛에 들려
    활짝 열린 웃음으로 바뀌고 있음을.
    ☆★☆★☆★☆★☆★☆☆★☆★☆★☆★☆★
    위험한 외출

    김지향

    나는 오늘도 육체의 집을 떠나 잠시
    자유로운 외출을 한다

    욕망의 누더기를 모두 쏟아버리고
    (공간의 문을 여는 열쇠만 가지고)
    육체의 문을 나서면
    흰빛으로 갈아입은 나무들이
    하얀 길이 되어 깔린다

    한 벌의 세상 끝자락 옷섶을 열면
    바람도 수직으로만 일어나고
    수직으로 열린 백지의 공간으로
    화살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의 발이 보인다

    시간의 등을 타고 달리는
    내 머리 위 낮게 뜬 해가
    내 머리에 탁, 탁 못질을 하고
    내 머리에 숭, 숭 구멍을 내고
    내 머리에 쏴∼쏴∼ 빛을 쏟아넣는다

    잎사귀 하나도 정물이 되지 않는
    모두가 빛에 들려서 날아다니는 공간
    나도 한 송이 물 마른 잎사귀로 날으다가
    완전자유의 무차원 속으로
    완전자유로워 지려는 순간
    나는 또 팽팽한
    나의 육체에게 멱살을 잡혀
    (아직도 내 심장 일부는 빛에 꿰뚫려)
    지상으로 추락한다

    나의 육체는 나에게 속삭인다
    "위험한 외출은 한 번으로 끝내야 해."
    ☆★☆★☆★☆★☆★☆☆★☆★☆★☆★☆★
    유비쿼터스

    김지향

    하늘에 지우개가 지나간다
    먼지가 닦인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하늘에
    거울이 절벽처럼 걸린다 거울 속엔
    끈 달린 새빨간 홍시가 토닥토닥 불꽃놀이 한다
    지우개가 지나간다 불꽃 속에
    자전거를 탄 아이 하나 손가락만한 핸드폰으로
    반짝 스치는 총알처럼 불꽃을 쏜다
    하늘 가득 마띠스의 물감통이 엎질러진다

    아이의 휴대폰엔 지우개만 찍혀 있다
    ☆★☆★☆★☆★☆★☆☆★☆★☆★☆★☆★
    의자 한 채

    김지향

    그림자를 늘어뜨린 의자가
    빈 집이 되어 빈 집 속에 서 있다
    잘 살펴보면 가시나무에 걸린 한 쪽 어깨가
    땅으로 축, 처져있다
    빈 집 속을 기웃거리는 내 눈을
    머리칼을 풀어헤친 어둠이 갈퀴를 내밀어
    굵은 노끈의 그물처럼 나꿔챈다
    나는 그 때 어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뒤로 나자빠진다
    혼자 서 있던 의자도 쿵, 나둥그러진다
    자던 먼지들이 벌떡 일어나 바들 바들 손을 떨며
    나에게 덤벼든다

    들판의 중간쯤에서 옆으로 새나간 길로
    새참 먹을 시간만큼만 가면 의자 혼자 사는 마을이 있다
    무성한 탱자나무 가시에 늘 어깨가 걸려있는
    그 집의 마당엔 문어발을 뻗어 잡히는 사물마다
    덥석덥석 감아넣는 웅덩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앉아 있다
    군데군데 군사를 거느린 웅덩이는 사람의 발을 움켜 머리칼까지
    몽땅 말아삼키는 50년대식 낡은 시간들이 종아리에 감긴다
    주인을 기다리다 지친 야생초들도 눈에 불을 켜고 서 있다
    눈에서 튀어나온 실핏줄이 50년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을까

    날마다 어디서 보내오는 신호음을 온몸으로 받아적기만 하는
    손을 치켜든 빈 의자 한 채, 언제 웅덩이가 삼켜버릴지 모르는
    ☆★☆★☆★☆★☆★☆☆★☆★☆★☆★☆★
    일란성 잎사귀들

    김지향

    해가 긴 혓바닥으로 천천히
    땅의 몸 전체를 핥아간다
    땅의 입에 박힌 대못이 빠진다
    헐거워진 땅에
    누워서 잠만 자던 바람이 벌떡 일어나
    발을 넣는다

    멍청히 서서 하늘만 쳐다보던
    나뭇가지 신경이 꼿꼿이 일어선다

    가지에 붙어 귀를 쫑긋거리던
    잎이 푸른 물을 뚝, 뚝, 흘린다

    (새파란 세상, 일제히 움직임을 시작한)
    사람의 몸에 열꽃이 돋는다
    몸 일부에서
    햇덩이 같은 욕망의 잎들이 피어난다
    욕망의 잎사귀는 해가
    제 혀를 거둬들여도
    일란성 새끼들을 연거푸 복제해 낸다.
    ☆★☆★☆★☆★☆★☆☆★☆★☆★☆★☆★
    잊어버린 길

    김지향

    오늘은 길이 멀어져 간다
    마음 안을 한 바퀴 도는데
    수십년이 걸리더니
    수십년이 초시간의 흔적만 남겨놓고
    길은 이제 떠나간다

    내 안에서 구불텅거릴땐
    생나무 타는 냄새를 풍기더니
    타는 생나무 냄새가 몸 밖으로 퍼져나오더니
    가깝고도 불편한 관계로 마음 베어내더니
    이제 떠나가는 네 뒷모습을 본다

    (수십개의 길이 일시에 빠져나가는,
    복면을 한 한 꼬챙이의 길은 자꾸 뒤돌어보는,
    내 요소를 너무 많이 끌고 가는지
    삶 전체가 무너져내리듯 아찔하는)

    길이 가서 닿는 모퉁이에선
    하늘이 열리고 스르륵, 별이 미끄러진다
    별도 삶이 있는가
    별도 궤도이탈을 희망하는가

    나도 이제 그만 내 궤도에서 이탈하고 싶어
    궤도 하나씩 잊어버리기로 했다
    살점이 내린 뼈를 잊어버리고
    심장이 녹은 가슴을 잊어버리고
    동공이 빠진 눈을 잊어버리고

    휴지처럼 낡아서 가버리면
    아니오는 길도 잊어버린다
    치열하게 잊어버린다.
    ☆★☆★☆★☆★☆★☆☆★☆★☆★☆★☆★
    전자파의 탐지

    김지향

    내 눈은 끝도 없이 치근대는
    전자파를 감추고 있다
    전자파는 먼데서도 그의 내부 구석구석을
    손이 닿지 않는 몸의 세포 속까지 탐지해낸다

    그의 심장 밑바닥에 잠자던 추억이
    목에 푸른 힘줄을 세워 쳐들고 나옴을
    그 추억 한 잎씩 베어져 나감을
    베어져 나간 자리에 새 추억의 싹이
    나고 있음을 탐지해낸다

    어느 날 문득
    몸 전체를 열고 나가
    우주 안 밖을 유영하며
    하늘 위의 하늘에서 전송되는 말씀을
    전 생애를 부어 지상에 뿌리는
    순결한 우슬초의 그 영혼도 탐지해낸다

    그러나 전자파는
    맘대로 육체를 뚫고나가 하늘 한 바퀴 돌며
    그의 영혼을 우주 밖으로 분산시켜놓고
    귀환하는 나의 입자들이 당돌한 육체 조립 술로
    그와 나를 바꿔치기하는 이 위험한 장난기를
    왜 탐지해내지 않는지?
    ☆★☆★☆★☆★☆★☆☆★☆★☆★☆★☆★
    종이학

    김지향

    발코니 쪽문을 열고
    내가 빚은 종이학 몇 마리 내보냈다
    조여맨 벨트를 풀고 핵가족이 된
    학들은 먹어도 먹어도 다시 돋아나는
    공기로 배를 채우며 하늘 높이 흩어졌다

    하늘 바다를 받치고 있는
    햇살의 수정그물을 끊고
    잔등이 한번 반짝 빛을 내더니
    모두는 일시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느 첫 새벽
    서리 위에 지친 다리를 얹어놓고
    아직 덜 깬 잠에 기대앉은 먼지만 시커먼
    열등 새 한 마리는
    불이 붙은 첫차의 눈에 붙잡혔다
    새는 차량이 뿜어내는 기세등등한
    기계음에 놀라 날개를 몇 번 삐걱거렸다
    나는 다친 날개를 실로 싸매주었다
    새는 푸른 물감통인 하늘 가슴을 향해
    연기 같은 빗금 한 줄 남겨놓고
    푸드득 푸드득 종적을 감추었다

    발코니 쪽문을 떠난 종이학 몇 마리
    떨어진 열등 새 까지도
    어서어서 제 발로 날아서
    문 닫히기 전 하늘의 비밀궁전에 들어가
    생명을 주는 전능자의 품에
    안겼으면 좋겠다
    ☆★☆★☆★☆★☆★☆☆★☆★☆★☆★☆★
    죽음은 살아서 돌아온다

    김지향

    너는 언제부터 나의 두려움이 되었니

    발 앞에서 절벽이 무너진다
    눈 옆에서 고목뿌리가 뽑힌다
    이마 위에서 공기 알갱이가 쏟아진다
    무너지고 뽑히고 쏟아지는 그림이
    심장 절반을 깔고 앉는다

    긴 목 긴 다리 긴 팔뚝으로
    너는 나를 무너뜨리고 뽑아내고 쏟아내는 폭력으로
    지나온 길을 슬쩍 지워버린다
    나의 디카 폰에도 안 잡히는 정체불명의 너에게
    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만 한번도 답전이 없는
    너는 멀쩡하게 살아서 내 손을 잡는다

    너는 언제부터 나의 그림자가 되었니

    오늘은 얼어붙은 하늘 난간에서 미끄러지는 요술쟁이가 된다
    어디든 닿는 곳은 많아도 자신에겐 닿지 않는 변신술의 귀재
    긴 팔 긴 다리의 경주자 1초에 우주 끝을 돌아오는 투명 로봇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하늘마루에서 땅 밑으로
    발이 닿기만 하면 죽음을 흘리는, 겨울엔 너무 자주 흘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지만 너무 가벼워 보이지 않는
    너를 나는 뒤꿈치만 스쳐도 왜 몸이 으스러지도록 두려운지

    이 겨울을 끌고 어둠의 계곡으로 가지만
    너는 침묵에만 닿을 뿐 죽음인 너에겐 닿지 않는다
    네 손아귀에 쥐어지는 살아있는 사물 모두는
    죽음에게 넘겨주고 너는 혼자 살아서 유유히
    돌아온다 나의 그림자로
    ☆★☆★☆★☆★☆★☆☆★☆★☆★☆★☆★
    지리산 바람소리

    김지향

    지리산 중턱을 오른다
    올라갈수록 깊어지는 계곡이
    살 속에서 살아있는 것들을 꺼내놓는다
    파란 손을 팔랑이며 찔레나무 가지가 불쑥 고개를 내민다
    오래된 노송나무는 거느린 새 식구들과
    팔짱을 걸고 영토 넓히기를 서두르는 중이다
    사철 얼굴 붉은 단풍나무는 부끄러운 듯
    땅으로 고개 숙이며 마중 나와 서 있다
    솔방울 같은 열매를 머리에 인 구상나무는
    활짝 팔을 펴 하늘을 안고 있다
    식구를 늘이지 못한
    굴참나무 개암나무 도장나무들 사이로 들락거리는
    휘파람새가 진종일 구슬이 뛰어가는 휘파람으로
    계곡의 정적을 깨우고 있다


    나무들의 발치께에 드문드문 밥풀처럼 흩어져있는
    산꽃들 머리 위로 이따금 서늘한 바람이 스쳐 가면
    한나절 햇볕도 들어왔다 바스러져 날아가 버리는,
    절로 따라 들어온 시간도 나뭇가지에 걸려 퍼덕거리다
    죽어버리는 뱀사골 중턱에선 심장을 두드리는 북소리 같은
    징소리 같은 물소리 같은 신음소리가 떠돌다 간다
    오랜 기억 속에 맴도는 젊은 혼령들이 아직도 저승에 가지 못해
    깊은 계곡 중턱에 앉아 그때의 울음을 울고 있는지
    한 곡조 원혼가가 무겁게 날고 있다
    억새소리도 같이 우렛소리도 같이 무거운 발걸음을 남겨두고
    이쯤에서 하산하는 지리산 바람소리.
    ☆★☆★☆★☆★☆★☆☆★☆★☆★☆★☆★
    진눈개비 한 가락 찍다

    김지향


    억새 밭엔 억새는 없고 얽힌 머리칼들이 성이나 있다
    자지도 않고 한눈도 팔지 않고 기가 펄펄 살아서
    무더기무더기 스크럼을 짜고 팔목을 잡아끌며
    아래위 옆으로 도리질을 하고 있다
    온 들판에 마른 몸을 들어낸 채 달려가는
    칼바람에 철철 살이 훑이고 있다

    (사람들의 카메라 속에선 거꾸로 서서
    살살 눈웃음을 치고 있어 한 움큼 말아 쥔
    내 손이 부드러워진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걸려 한 잠 자고 난 밤
    내 카메라 눈이 한 눈도 감기지 않은 밤
    카메라 눈에 빗금을 긋고 기다란
    진 눈개비 한가락 지나간 밤
    카메라를 접어 넣기 아까운 밤

    밤을 가로질러 진눈개비 몇 줄기 열차처럼 지나간다
    우주의 손이 진눈개비 창고를 놓쳐버렸는지!
    ☆★☆★☆★☆★☆★☆☆★☆★☆★☆★☆★
    차표 없이 온 봄

    김지향

    차표 없이도 불쏘시개 한 장으로 개찰구를
    빠져나온 봄 한 덩이
    마중 나온 뾰루지 같은
    봉오리들에게 화덕 한 통씩 안겨준다
    봉오리들은 일심으로 화덕에 불을 붙인다
    지나가는 바람 한 필 끊어와 살 살 살
    화덕 앞에서 밤 내 부침개를 뒤집는다

    해가 하늘 기슭에 얼굴을 내민 뒤에야
    뒤집힌 자기 몸을 본다
    불침번으로 지켜준 나무에게 손을 흔들며
    빵긋, 봉오리를 깨고 나온 진달래
    만산에 활짝 불을 피운 봄 아침
    녹슨 추억은 뒤로 밀리는, 햇살이 똑똑
    부러지는 빳빳한 젊음을 산새들도 아직은
    어리둥절 구경만 한다
    ☆★☆★☆★☆★☆★☆☆★☆★☆★☆★☆★
    청소하는 날

    김지향

    허공에 비를 갖다댄다
    오른뺨 왼뺨 돌려가며
    바람이 허공을 긁어낸다

    해가 반짝 눈을 뜨다가 배경으로 나앉는다
    몇 묶음의 비를 움켜쥔 바람이 우주로 올라간다

    쏴~~ 쏴~~먼지가 쏟아지는 블랙홀
    온몸이 비가 된 바람이 마주 버티고 선다

    바람이 내준 길로 먼지에 갇혀있던
    우주선이 떠난다 제비처럼 미끄러지며
    지상정거장으로 귀환한다

    허공에 안보이던 길이 햇빛을 데리고
    지상으로 온다 드디어 환한 세상
    나도 마음에 난 길을 닦는다

    마음의 잎사귀에 앉은 해묵은 딱지를 뜯어낸다
    세상을 통째 갖고 싶었던 허욕이 알갱이 채 떨어진다
    나에게 안보이던 내가 유리 속처럼 보인다

    이제 눈을 뜨고 하늘을 쳐다봐도 되겠다
    ☆★☆★☆★☆★☆★☆☆★☆★☆★☆★☆★
    청조 우주 밖에서 다시 사는

    김지향

    뒤돌아보면 달려갈 길 다 갔는지
    아픈 세월들이 잠시 발을 멈추고
    신발을 벗어 털고 있네

    보이네 얇은 망사 울타리 너머
    힘겹게 엮어논 휑한 허공에
    힘겹게 달려온 세상 선수들이
    먼저 가려고 신발도 벗어들고
    새치기로 달려가더니 어느새
    훌쩍, 뛰어넘은 울타리
    망사천 밖에서 환히 보이네

    기쁨과 슬픔이 덩어리로 찌들은
    옷가지 벗어 청정한 물에 씻어 말리며
    피범벅으로 얼킨 발가락 치료하는
    삶을 마친 선수들,
    울 밖 시간을 깡그리 잊어버린
    망각훈련에 익숙해진 선수들이
    나이를 한 올 한 올 뽑아내고
    초록잎 수액을 약방울처럼 뿌려 넣고 있네

    다시는 늙음과 그리움과 고통과 슬픔을
    겪지 않을 풀빛 청조로
    하늘 너머 우주 전체에 집 짓고
    넓게 편 날개로 헤엄쳐 다닐
    가장 깨끗한 생명으로 다시 살
    세계가 영원처럼
    그렇게 펼쳐진 들판이 보이네
    이제 점점 가까이 보이네
    보이네
    ☆★☆★☆★☆★☆★☆☆★☆★☆★☆★☆★
    초롱불 진달래

    김지향

    삭둑삭둑 키를 잘라낼 땐
    피 한 방울 안 나던 진달래
    오늘 아침 창문을 열고 보니
    꽃분홍 선혈을 뒤집어쓰고 있네

    조금씩 가지를 쳐낼 땐
    신음소리 한 마디 안 내던 진달래
    오늘 아침 물주다 보니

    빨갛게 켜든 초롱불 속에
    마디마디 아픔이 웅크린
    눈물을 감추고 있네

    초롱불 한 잎 한 잎 만지작거리다
    돌아선 나의 등뒤에서
    진달래 아픈 비명소리가
    딸,딸,딸, 신발을 끄을며 따라오네
    ☆★☆★☆★☆★☆★☆☆★☆★☆★☆★☆★
    초봄의 귀밑머리

    김지향

    방금 머리 내민 봄
    햇빛을 만져본다
    빛꼬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풀밭에 뒹군다

    햇빛의 발이 콩.콩,콩,
    자국을 찍는 풀잎마다
    연두빛 얼굴이 된다

    봄의 빛은 발이 간지럽다

    (손으로 움켜잡으면
    몸이 가루되어 먼지처럼 날리지만)
    햇빛이 빗금을 그은 곳마다
    아지랑이가 죽어버린다
    아지랑이 뒤에 머리를 숨긴
    풀이 쏘옥. 쏙 혀를 내민다

    보들한 바람에
    파란 혀를 날름대는 풀
    초봄의 귀밑머리가 내 뺨에서
    파르랗게 나팔댄다.
    ☆★☆★☆★☆★☆★☆☆★☆★☆★☆★☆★
    추억에게 안녕

    김지향


    사랑,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내 눈썹 끝
    내 가슴 귀퉁이에 일어선다
    절망의 시대 너머
    기억의 갈피에서
    이미 형체도 사그라진 사랑이
    존재함! 하고 손을 치켜든다
    호롱불보다 밝은 촛불 밑에서도
    도저히 안 보이는
    먼지가 한 줄 파르르 기억 밖으로 날아갈 뿐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한잎의 무지개가
    내 옷깃 속엔 언제 들어왔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빛나지 않은 괴로움 한 줌 만들어내며
    때론 빛바랜 학이 되어
    눈을 깜박거리며
    미래에게 주는 나의 안부를 질투하며

    나를 거쳐간 시간에게도
    안부를 보내주기 바라며
    위험한 감각과 빈틈없는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 나의 기억 안에서만
    완벽하게 빛나고자 하는
    추억에게도 안녕.
    하고 마침표를 찍으면
    절망처럼 암담했던 시대가
    불빛보다 더 밝게
    살아남을 본다 분명히.
    ☆★☆★☆★☆★☆★☆☆★☆★☆★☆★☆★
    푸른 땅을 걷는다

    김지향

    푸른 물이 든 푸른 땅을 걷는다
    나의 실눈으로 들어오는
    숲들의 잎과 잎이
    안개도 구름도 걷힌 얼굴로
    밝게 웃는다
    안개도 구름도 없는 얼굴 아래로
    아이들이 솔방울처럼 굴러간다

    고궁의 5월은
    땅도 사람도 7활이 풀빛이다
    세상의 잡음이 들어와 보지 못하고
    매연도 먼지도 따라와 앉지 못하는
    아이들의 새파란 눈 속으로
    커다란 호수를 몰고 애기 바람이 달려온다

    바람이 조그맣게 담겨있는 호수 속엔
    내 유년의 얼굴이 돋아나
    자꾸자꾸 아이들 얼굴에 겹쳐 눕는다
    아이들 입 속에서 새소리가 뛰어나와
    내 해묵은 머릿속 체증을 씻어 내린다
    아~ 하고 오랜만에 질러보는 함성
    어느새 나도 푸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
    푸른 수혈

    김지향

    한낮 공중에 목매단 봄을 딴다
    철없는 손이 놓아버린 꿈

    빨간 봄을 베어 문다 공기의 배가 펄럭인다
    꽃잎이 차르르 흐른다 피다만 봉오리까지
    온통 내 몸에 붉은 피를 수혈한다

    힘줄이 파랗게 돋으라진다
    새파란 잎이 화들짝, 몸을 열고 나온다

    여름이 세상을 덥석, 깔고 앉는다
    ☆★☆★☆★☆★☆★☆☆★☆★☆★☆★☆★
    푸른 수혈

    김지향

    한낮 공중에 목매단 봄을 딴다
    철없는 손이 놓아버린 꿈

    빨간 봄을 베어 문다 공기의 배가 펄럭인다
    꽃잎이 차르르 흐른다 피다만 봉오리까지
    온통 내 몸에 붉은 피를 수혈한다

    힘줄이 파랗게 돋으라진다
    새파란 잎이 화들짝, 몸을 열고 나온다

    여름이 세상을 덥석, 깔고 앉는다
    ☆★☆★☆★☆★☆★☆☆★☆★☆★☆★☆★
    하늘에 말 걸기

    김지향

    잠시 소나기 그치고 번쩍이는 번개만 달리고 있다
    겁 많은 사람들은 단단히 걸어 잠근 마음문의 열쇠를 찾는다
    나는 번개가 인화된 창문의 그림자 앞에 마음 문을 연다
    다급히 마음에 신발을 신긴다 갈 곳을 찾다 번개가 불꽃을 꽂는
    전깃줄에 내 눈만 꽂는다 전깃줄이 불자동차 소리를 내며 목 놓아
    울어댄다 빳빳이 신경을 세우고 있는 플라타너스 가지가 땅에 이마를
    찧는다 놀라 뛰는 플라타너스 눈은 어디다 흘렸는지 몸만 사정없이 흔든다
    나도 눈을 하늘의 불자동차에 넣어두고 이마는 창문 밑에 패대기친다
    하늘이 빨갛게 불이 났는데 다시 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는
    하늘 불을 끄지도 못한다 하늘은 눈 하나로 세상 전체를 밝히 본다
    나는 내 귀에도 들리지 않는 소리로 이제 그만! 하고 거푸 소리 질러본다
    내 소리는 말이 되지 않는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 몇 만 리를 걸어야
    하늘마음에 닿을까 ( 태초의 적요 속에서 처음 태동한 하늘마음)
    그 마음을 하늘은 끝도 없이 땅으로 보냈지만 하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다급하게 오늘에서야 하늘에 말을 걸어본다
    대답 없는 하늘에서 내려온 불자동차 소리
    하늘 말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소리가 인화된 창문에 엎어져 눈을 감싸고
    한밤 내 부들부들 떨기만 한다
    ☆★☆★☆★☆★☆★☆☆★☆★☆★☆★☆★
    하늘은 편지지

    김지향

    나는 날마다 하늘편지지에 편지를 쓴다
    내 새파란 사연을 평생토록 쪼아 먹은
    하늘 살갗이 파랗게 잉크물이 들었다
    하늘치마가 출렁출렁 나부낄 땐
    내가 쓴 푸른 고통이
    다 헤진 휴지 같은 사랑이
    푸르른 희망으로 각색된 답장 한 묶음이 되어
    종이 비행접시처럼 날아온다

    하늘은 푸른 씨를 모종하지 않아도
    편지 받는 사람의 가슴마다는 푸른 싹이 돋는다
    푸른 잎이 팔랑이는 창마다
    하늘 편지지에 한밤 내 쓰고 받은 답신
    한 장의 꿈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고 있다

    (때론 임자 없는 신발처럼 떨어져 나뒹구는
    편지도 있다)

    나는 때때로 찾아가는 옛집의
    팽나무 살갗에 오늘 열매처럼 오돌오돌 돋아난
    푸른 희망의 글귀 몇 점 먼지에 덮여
    자고만 있는 종이 비행접시 한 장 읽는다
    저 네거리에서 손가락으로 하늘에 삿대질만 하던
    그가 하늘로 수납된 지 이미 오래되었음을
    (하늘은 가끔 송신에 답신 없는 사람은)
    그 날로 벽난로 끄듯 말끔히 회수해감을 읽는다

    오랜 세월 내 귓바퀴를 돌며
    고막을 씹던 바람의 푸른 송신음
    접혀진 하늘 한 귀퉁이가 발신처임을
    이제야 이제야 읽는다.
    ☆★☆★☆★☆★☆★☆☆★☆★☆★☆★☆★
    한 됫박의 웃음소리

    김지향

    내가 사는 구로구 고층 아파트, 아직은
    칼끝을 내민 겨울바람을 붙잡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
    아파트가 떨지 않으면 앞 뒤 공기가 떨어준다
    아파트 앞 뒤 세상은 늘 꽉 차 있다 꽉 찬 세상을 향해
    날마다 한 두름의 남자와 여자가 뛰어 간다
    꽉 찬 길이 비껴주지 않을 때 세상이 스스로 걸어와 주는
    아파트 네거리는 한낮 내내 해가 앞을 가로막고
    비껴주지 않는다 아파트 네거리 왼쪽은 늘 깊은 그늘에 들어있다
    아파트 앞을 오가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똑 같이 기억하지 못한다
    맞은쪽 대각선 전방에는 오전 동안만 남자와 여자가 등을 맞대고
    건강 체조만 한다 건강을 다지는 사람들로 구로구 노인정에는
    나이 많은 젊은이들로 공간을 채운다

    이런 때 나는 어린이 놀이터에서
    *창준의 미끄럼틀에 매달려 삶을 채운다
    나는 숲이 무성하지 않지만 늦게 얻은
    열매 한 알, 열매 한 알의 무게가
    열매 한 알의 웃음소리가 내 세계를 채운다
    멋있다며 장난감 기차를 들고 기차 칸이 지나갈 때마다
    손뼉을 치며 구구단을 외우는, 갸웃갸웃 고개로 장단을 맞추며
    영어노래도 부르는 골고루 익은 열매 한 알 보듬고
    삶 전체를 바친 엄마. 아빠가 오늘은 마주 손뼉을 치며
    집안 전체를 흔들어놓는 한 됫박의 웃음소리에
    함께 자지러진다

    내민 겨울바람의 칼끝도 스스로 무안해 하는
    이 겨울 한복판의 따뜻한 우리 집

    ★창준~두 돌 지난 나의 첫손자

    ☆★☆★☆★☆★☆★☆☆★☆★☆★☆★☆★
    한 쪽 다리의 생기

    김지향

    세상 위에 떠서
    지붕에 발을 숨기고 있는 바람
    한 쪽 다리에만 발통을 달고 있네

    날마다 나뭇가지에 빌딩꼭지에 들판에
    마구잡이 그물을 쳐놓고 낡은 찌꺼기 걸러내던
    그가 이제 보니 한 쪽 다리가 굳어버렸네
    세상이 쏘아 올린 독침에 명중되었는지?

    이제 외쪽 다리로 외쪽 하늘을 씻어낸다
    외쪽 하늘에 붙은 구름이 하늘 옆구리에서
    새파란 생수로 쏟아져 한쪽 세상에만 내리네
    하늘 옆구리에서 반쪽뿐인 해가
    반쪽 세상만 살려내네

    우와! 온 하늘에 매달아 놓은 나의 디카폰엔
    없어진 반쪽 세상이 찍혀있네
    ☆★☆★☆★☆★☆★☆☆★☆★☆★☆★☆★
    호숫가에서

    김지향

    집앞의 호수에 담긴
    가을의 옆얼굴을 들여다 본다
    흠집 하나 없는 거울이다
    거울 속엔
    털이 다 벗어진
    숭어 몇이서
    흩어져 있는 풍금소리를 모으고 있다
    여름을 떠메고 돌아서는 시간의 손이
    붉은 물감을 뿌려놓고 간 뒤로
    한쪽 뺨이 붉은 사과알이 내려와
    데굴 데굴 덜 찬 속살을 내비치고
    한쪽 가슴이 붉은 나뭇잎은
    가슴의 붉은 물을 씻어 놓고 있다
    붉은 물감으로 생기를 얻은
    집앞의 거울은
    나의 머릿속까지 뚫고 들어가
    때가 좀 끼인 머리 구석 구석을 비추어
    어디서 혼자 우는 비를 피한
    죄를 드러내고
    항상 해가 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다 풀린 내 눈꺼풀을 뜯어 내면서
    굵다란 회초리로
    내 시든 종아리를 때리고 있다

    나는 다시 물이 오른 종아리로
    가슴을 떨면서
    해묵은 헌 죄를 다 털어내고 털어내고
    마침내 그 호수 속 생기로 돌아간다.
    ☆★☆★☆★☆★☆★☆☆★☆★☆★☆★☆★
    휴일아침 봄비

    김지향

    봄이 입을 열고 꽃잎을 마구 토해낸다
    꽃잎 먹은 봄비가 동 동 동 꽃잎을 져 나르다가
    이 아침엔 빳빳이 서서 손뼉만 친다
    하늘에 땅에 열꽃을 띄우는 진달래 옆구리
    살이 튼 돌 틈엔 아직도 늦잠 든
    노르께한 토끼풀이 꼬부라져 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한 주먹씩 꽃물을 먹여주며
    흔들고 있는 진달래 치맛귀를 스치는 자전거 요령소리

    휴일 아침,
    근린공원 일대엔 무단 가출한 로봇 자전거 가족들이
    동글동글 줄을 지어 돌며 한 두름씩 꽃잎을 싣고 오래된
    내 유년의 꿈 밭을 달리는 중이다 하늘 한 귀퉁이
    희미하게 몸을 드러낸 무지개도 드러누울 공간이 없는지
    아침 내내 허리 구부리고 서서 로봇 자전거 달리기에
    일심으로 손뼉을 쳐준다

    지금은 환히 열린 봄
    다시 입 다물 날이 멀지 않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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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 곽재규 시 모음 34편 김용호2014.10.23.1183190
    89 이병주 시 모음 50편 김용호2014.10.07.1065130
    88 오세철 시 모음 87편 김용호2014.10.07.1156270
    87 김동원 시 모음 79편 김용호2014.10.07.824103
    86 구연배 시 모음 36편 김용호2014.10.07.988242
    85 김영화 시 모음 30편 김용호2014.10.07.959183
    84 선미숙 시 모음 40편 김용호2014.10.07.845157
    83 이병율 시 모음 43편 김용호2014.10.07.1221208
    82 박현숙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4.10.07.854168
    81 이승하 시 모음 16편 김용호2014.10.07.811152
    80 김옥자 시 모음 열편 김용호2014.10.07.976151
    79 최봄샘 시 모음 9편 김용호2014.10.07.870133
    78 김명우 시 모음 열 다섯편 김용호2014.10.07.1024244
    77 한선미 시 모음 열 한편 김용호2014.10.07.859208
    76 김예성 시 모음 55편 김용호2014.10.07.847203
    75 전병윤 시 모음 81편 김용호2014.10.07.917356
    74 김성우 시 모음 열 두 편 김용호2014.10.07.885247
    73 김옥준 시 모음 75편 김용호2014.10.07.966124
    72 마종기 시 모음 38편 김용호2014.10.07.1179312
    71 심성보 시 모음 20편 김용호2014.10.07.989186
    70 박재삼 시 모음 27편 김용호2014.10.07.1208160
    69 반칠환 시 모음 20편 김용호2014.10.07.1193311
    68 황지우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4.10.07.1291178
    67 조지훈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4.10.07.2178315
    66 임 보 시 모음 김용호2014.07.05.1652327
    65 이생진 시 모음 37편 김용호2014.07.05.2018227
    64 이양우 시 모음 48편 김용호2014.07.05.2862202
    63 허소라 시 모음 열편 김용호2014.03.01.1834208
    62 이운룡 시 모음 34편 [1]김용호2014.03.01.1978334
    61 허호석 시 모음 23편 김용호2014.03.01.1677169
    60 김지향 시 모음 61 ∼ 131까지 김용호2014.03.01.1865154
    59 김지향 시 모음 1 ∼ 60편 김용호2014.03.01.1761294
    58 강은교 시 모음 40편 김용호2006.08.09.6479723
    57 천상병 시 모음 20편 김용호2006.08.09.573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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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5 박두진 시 모음 37편 김용호2006.08.09.574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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