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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소란시모음 20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0.10.20. 01:34:44   조회: 231   추천: 7
    여명문학:

    박소란시모음 20편
    ☆★☆★☆★☆★☆★☆★☆★☆★☆★☆★☆★☆★
    《1》
    감상

    박소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
    《2》
    고장 난 저녁

    박소란

    주전자에 물을 끓인다
    끓지 않는다
    고장이다
    이것 좀 먹어봐요
    옆집에서 삶은 감자를 한 바구니 내민다
    지나치게 감사한다 여러 번 머리를 조아린다
    어디가 고장인 건지
    가스레인지도 보일러도 켜지지 않는 저녁
    멀거니 앉아 감자를 먹는다
    설익어 설컹거리는 감자를
    맛있게 먹는다
    먹고 밤새 잔병이나 앓을 것
    빈 바구니에 사과 몇 알을 가져다 담는다
    군데군데 멍이 든 사과를
    아무도 먹지 않겠지
    다행이다, 빈 바구니를 생각하면
    이상하게 목이 메어
    캑캑거리며 물을 마신다 끓지 않는 물을
    ☆★☆★☆★☆★☆★☆★☆★☆★☆★☆★☆★☆★
    《3》
    김밥천국

    박소란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 자리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 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둔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
    《4》
    노래는 아무것도

    박소란

    폐품 리어카 위 바랜 통기타 한 채 실려간다

    한 시절 누군가의 노래
    심장 가장 가까운 곳을 맴돌던 말

    아랑곳없이 바퀴는 구른다
    길이 덜컹일 때마다 악보에 없는 엇박의 탄식이 새어나온다

    노래는 구원이 아니어라
    영원이 아니어라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어라

    다만 흉터였으니
    어설픈 흉터를 후벼대는 무딘 칼이었으니

    칼이 실려간다 버려진 것들의 리어카 위에
    나를 실어보낸 당신이 오래오래 아프면 좋겠다

    기어이 비집고 나와 찬바람에 속절없이 날아오르는 오리 털처럼,
    가끔 저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다.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문득문득 되돌아오는 것이고,
    우리는 덜컹거리는 시간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악보 같은
    전철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제법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차산역을 지날 때,
    나는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노래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칼에 찔린 채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처럼,
    마음의 흉터에서 피가 번지는 저녁이었다.
    모든 몸은 버려진 악기였다.
    ☆★☆★☆★☆★☆★☆★☆★☆★☆★☆★☆★☆★
    《5》
    다음에

    박소란

    그러니까 나는
    다음이라는 말과 연애하였지
    다음에, 라고 당신이 말할 때 바로 그 다음이
    나를 먹이고 달랬지 택시를 타고 가다 잠시 만난 세상의 저녁
    길가 백반집에서 청국장 끓는 냄새가 감노랗게 번져 나와 찬 목구멍을 적시고
    다음에는 우리 저 집에 들어 함께 밥을 먹자고
    함께 밥을 먹고 엉금엉금 푸성귀 돋아나는 들길을 걸어보자고 다음에는 꼭
    당신이 말할 때 갓 지은 밥에 청국장 듬쑥한 한술 무연히 다가와
    낮고 낮은 밥상을 차렸지 문 앞에 엉거주춤히 선 나를 끌어다 앉혔지
    당신은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멀어지는데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앉아 밥을 뜨고 국을 푸느라
    길을 헤매곤 하였지 그럴 때마다 늘 다음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지 당신 보다 먼저 다음이
    기약을 모르는 우리의 다음이
    자꾸만 당신에게로 나를 데리고 갔지
    ☆★☆★☆★☆★☆★☆★☆★☆★☆★☆★☆★☆★
    《6》
    독감

    박소란


    죽은 엄마를 생각했어요
    또다시 저는 울었어요 죄송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어디야? 꿈속에서
    응, 집이야, 수화기 저편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데
    내가 모르는 거기 어딘가 엄마의 집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엄마의 집은 아프지 않겠구나

    병원에는 가지 않았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식후 삼십분 같은 말을 생각했어요 약을 먹기 위해
    밥을 먹는 사람을

    마스크를 쓰기 위해 얼굴이 돋아난 사람을

    오, 이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일어나주지 않았어요

    고작 감기일 뿐인데 죄송해요
    울먹이면서
    멀쩡히 잘 살아갑니다, 실없는 꿈속에서

    어디야? 전화를 받지 않는 엄마
    거기 먼 집
    닫지 못한 문이 있고 여태
    늦된 겨울을 건너다보고 있을 엄마, 감기 조심해
    ☆★☆★☆★☆★☆★☆★☆★☆★☆★☆★☆★☆★
    《7》
    벽제화원

    박소란

    죽어 가는 꽃 곁에
    살아요

    긴긴낮
    그늘 속에 못 박혀

    어떤 혼자를 연습하듯이

    아무도 예쁘다 말하지 못해요
    최선을 다해
    병들 테니까 꽃은

    사람을 묻은 사람처럼
    사람을 묻고도 미처 울지 못한 사람처럼

    쉼 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비 한 마리
    그 주린 입에
    상한 씨앗 같은 모이나 던져주어요

    죽은 자를 위하여

    나는 살아요 나를 죽이고
    또 시간을 죽여요
    ☆★☆★☆★☆★☆★☆★☆★☆★☆★☆★☆★☆★
    《8》
    비닐봉지

    박소란

    알 수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지

    퇴근길에 김밥 한 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에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째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인가

    쉽게 구멍이 나는

    버리면 된다, 이런 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검게 읊조리는

    자정도 지난 골목을 혼자 서성이는
    까닭도 없이
    달리는
    내처 나는, 날아보는, 제 더러운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새처럼
    어디로든

    언제든
    도무지 썩지 않는
    ☆★☆★☆★☆★☆★☆★☆★☆★☆★☆★☆★☆★
    《9》
    상추

    박소란

    퇴근길에 상추를 산다
    야채를 먹어보려고
    좀 건강해지려고

    슈퍼에서 한 봉지 천 오 백 원
    회원 가입을 하고 포인트를 적립한다
    남들처럼 잘 살아보려고

    어떤 이는 화분에 상추를 기른다는데
    아 예뻐라 정성으로 물을 주면서

    때가 되면 그것을 솎아 먹겠지

    상추를 먹으면
    단잠에 들 수 있다는데
    상추가 피를 맑게 한다는데

    나는 건강해질 것인가
    상추로 인해
    행복해질 것인가

    밥을 데운다

    냉장고에서 묵은 쌈장을 끄집어낸다
    상추가 포장된 비닐을 사정없이 찢는다
    찢은 비닐을 쓰레기통에 내동댕이치는 나는
    행복해질 것인가

    상추는 나를 사랑할 것인가
    ☆★☆★☆★☆★☆★☆★☆★☆★☆★☆★☆★☆★
    《10》
    선물

    박소란

    상자를 열 수 없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상자는 방 가운데 있다 잠자코 있다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는

    상자를 궁리하다 하루가 갔다
    무언가 들었다면 깨진 것, 분명 깨지고 말 것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은
    상자를 열 수 없다

    상자를 알 수 없다
    안다면 놀랄 것인가 무서워 울음을 터뜨릴 것인가

    나는 잠들 수 없다
    상자를 궁리하다 밤이 다 갔다 희고 무미한 낯빛이 되어갔다

    상자는 다만
    상자
    찢기고 뭉개질 것 버려진 것들 속에 묻혀 썩고 말 것

    잊으면 그만인 것

    잊을 수 없다
    상자는 있는지 아직 여기 있는지, 죽은 엄마라면
    알 것 같다 상자의 안과 밖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 하고 부르자
    상자의 방 가운데 내가 있다
    ☆★☆★☆★☆★☆★☆★☆★☆★☆★☆★☆★☆★
    《11》
    소요

    박소란

    사람이 있는 풍경,
    그 한 장의 사진을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은 쌓이고
    사람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휘청거린다

    풍경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한 사람의 걸음으로 인해
    풍경은 두근거림을 피하지 못한다

    나는 본다
    반쯤 녹아버린 눈사람과 같은 표정으로
    왜 이런 사진을 찍었나
    왜 이런 사진을 들여다보나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 속 몸부림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눈은 쌓이고
    쌓일수록 거세고
    사람은 기어코 넘어진다 강마른 무릎을 짓찧는다

    풍경 저 바깥 어딘가
    손을 흔드는 또 다른 사람이 있는가 어쩌면

    넘어진 사람은 일어선다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인해
    사람은 걷는다
    저 바깥 어딘가

    그러나 결코 당도하지 못할 한 사람을
    나는 본다

    눈이 오고 있으므로
    눈이 그치지 않고 있으므로
    ☆★☆★☆★☆★☆★☆★☆★☆★☆★☆★☆★☆★
    《12》
    시 쓰는 남자

    박소란

    노트 위에 평생을 골몰했네
    힘겹게 써 내려간 다열종대의 행과 행 사이에서
    그는 자주 길을 잃었네 어쩌면
    마흔 일곱 혹은 여덟 번째로 향하는 급커브에서는
    펜을 꺾었어야 했는지도 돌연
    야근이 끝나고 돌아갈 곳이 떠오르지 않던 부랑의 밤
    어둠 쪽으로 한껏 몸을 낮춘 옥상 난간에 서서
    그는 실로 오랜만에 휘파람을 불었네
    쇳 쇳 쇳소리가 자맥질치는 허공을 응시하다 그대로 풍덩
    어둠 속에 온몸을 찔러 넣었네, 넣을 것이었네 그 순간
    그가 본 건 한때 꾸었던 푸른 꿈의 심상들
    누구나 한번쯤 노래했던 별, 별 같은 것 우수수
    아무렇게나 떨어져 야윈 꽁지를 파닥이고 있었네
    그는 왜 마침표를 찍지 못했나 이토록 오래 주저해야 했나
    어떤 비유로도 건널 수 없는 나날들을 수없이 쓰고 지우며
    절망의 습작만을 되풀이하며
    그는 살았네 산다는 건 정체불명의 메타포
    조악한 모음과 자음으로 띄엄띄엄 써 내려간
    비문투성이 시, 아무도 읽은 적이 없는
    그는
    아직 노트를 덮지 않고 있네
    ☆★☆★☆★☆★☆★☆★☆★☆★☆★☆★☆★☆★
    《13》
    심야 식당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14》
    아아

    박소란

    담장 저편 희부연 밥 냄새가 솟구치는 저녁
    아아,
    몸의 어느 동굴에서 기어 나오는 한줄기 신음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알을 집어들고 얼마예요 묻는다는 게 그만
    아파요 중얼거리는 나는 엄살이 심하군요
    단골 치과에선 종종 야단을 맞고 천진을 가장한 표정으로
    송곳니는 자꾸만 뾰족해진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아직
    아침이면 무심코 출근을 하고 한 달에 한두 번 누군가를 찾아 밤을 보내고
    그러면서도 수시로 아아,
    입을 틀어막는 일이란
    남몰래 동굴 속 한 마리 이름 모를 짐승을 기르는 일이란
    조금 외로운 것일지도 모른다고
    언젠가 동물도감 흐릿한 주석에 밑줄을 긋던 기억

    아니요 말한다는 게 또다시 아파요
    나는 아파요
    신경쇠약의 달은 일그러진 얼굴을 좀체 감추지 못하고
    집이 숨어든 골목은 캄캄해 어김없이 주린 짐승이 뒤를 따르고
    아아,

    간신히 사과 몇 알을 산다 붉은 살 곳곳에 멍이 든 사과
    짐승은 허겁지겁 생육을 씹어 삼키고는 번득이는 눈으로
    나를 본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
    《15》
    아이스크림

    박소란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이 달콤한 봉분 속에 초코로 덮인 조그만 무덤 속에
    사람이

    배스킨라빈스 언 컵을 놓고 마주 앉아
    정신 없이 퍼먹다 우리는

    플라스틱 스푼을 놓는다 그만
    놓고 만다
    으 갑자기 춥네
    과장되게 웅크리면서 애들처럼 괜히 킥킥거리면서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깥은 겨울

    패딩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뒤뚱뒤뚱 걷는다
    걷다가 빙판 위에 철퍼덕 넘어지는 한 사람
    야 저거 봐 봐 가리키자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너는 습관처럼 입술을 비빈다 혀로 핥는다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손끝으로 무덤 가장자리를 톡톡 건드리면서 진득한 흙을 헤집으면서
    재차 입술을 핥는다
    아직 단데
    사방은 온통 핑크로 장식돼 있고 우리는 너무도 멀쩡한데

    언 것은 녹기 마련이라지만
    그런 장면은 왠지 께름칙해서
    왠지 서글퍼서
    슬그머니 문을 나선 우리는

    검은 발자국이 무수한 빙판 앞에 서서
    이 속에도 사람이 묻혔을까

    못 들은 척
    겨울도 곧 끝이 나겠지 중얼거린다

    천천히 걷는다
    불 꺼진 간판 같은 서로의 옆얼굴을 흘깃거리면서

    초코일까 흙일까
    아니면 그냥 얼음일까
    ☆★☆★☆★☆★☆★☆★☆★☆★☆★☆★☆★☆★
    《16》
    이명(耳鳴)

    박소란

    그의 귓속에 작은 집 한 채 짓고 싶었네
    꽃 피고 잎 돋아 무성한 한때
    몇 마리 이름 없는 새들 약속처럼 날아와
    알을 품고 기르듯
    우묵한 둥지 하나 틀고 싶었네
    긴 한숨이 그의 몸을 들고 날 때마다 더욱 아득해지던
    어느 기슭, 꿈꾸듯 홀로 누워
    검게 충혈된 천장을 올려다보면
    이내 바스러져 내릴 듯한 마음의 지푸라기들
    그를 지탱해온 시간의 여린 어깨들
    가만가만 토닥여주고 싶었네
    그의 바깥을 맴돌던 노래 죄다 불러들여 놀아도 좋을
    다정한 집 한 채
    나는 그 속 헛것처럼 앉아 오래오래
    알을 품고 싶었네
    빛을 문 새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일어나
    축포처럼 환한 울음 터뜨릴 때
    나도 따라 울고 싶었네
    언젠가 닿지 못한 말, 그 한마디
    오랜 잠을 떨치고 와 마침내 훨훨 날아오를 때까지
    끝없는 환열로 먹먹히 차 오를 때까지
    오래오래 울고 싶었네
    ☆★☆★☆★☆★☆★☆★☆★☆★☆★☆★☆★☆★
    《17》
    주소

    박소란

    내 집은 왜 종점에 있나



    안간힘으로
    바퀴를 굴려야 겨우 가닿는 꼭데기

    그러니 모두
    내게서 서둘러 하차하고 만 게 아닌가
    ☆★☆★☆★☆★☆★☆★☆★☆★☆★☆★☆★☆★
    《18》
    통속적 하루

    박소란

    전화를 걸지 못했다

    9층 사무실 창으로 내려다본 바깥 풍경이 탄식하듯 저무는
    이 저녁의 낙막을 나는 그저 방관하기로 한다

    눈 주는 곳마다 노을은 무너지고 순하던 잎사귀 화염처럼 치솟아
    죄는 깊어 가는데 사랑의 죄 사랑할 수 없는
    한 그루 은행나무

    제 바로 곁에 병든 짝을 세워둔 저 맥목한 사내를
    뿌리째 흔든다 한들 우리 계절은 너무나 뻔하고 뻔한 것이어서 결국
    구린 열매 몇알 빈 가슴을 탕진하고 말 뿐

    거리는 온통 멀어지는 뒷모습들로 가득해
    누구든 어디든 붙잡고만 싶어
    퇴근을 놓치고 선 하늘의 망연한 얼굴만 들여다볼 때

    이대로 잠시 앓기로 한다
    단지 오늘만, 끝으로
    보고 싶다 한마디가 몰고 온 이 하루의 고약한 병증
    ☆★☆★☆★☆★☆★☆★☆★☆★☆★☆★☆★☆★
    《19》
    휴일

    박소란

    전화를 기다린다

    약속을 취소하고 초록이 뛰노는 한낮의 거리를
    취소하고 잘 지내요?
    환한 인사와 악수와 까닭 없이 들뜬
    웃음을 취소한다

    울음을 취소한다
    티브이를 끄려다 그만둔다 비밀한 습관처럼
    재방송되는 한 사람이

    공들여 만든 상념의 자세와 기꺼이 암막커튼을 드리운
    어느 하루,
    기다린다

    한 통의 전화를
    기다리는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어요 한 마디 대사만을 반복하며
    좀처럼 퇴장하지 않는

    알 듯 말 듯 묵묵한 표정을 짓는
    점차 몰두하며
    퍽 자연스러운 연기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취소한다
    드라마는 끝나지 않고

    전화를 기다린다

    여보세요
    퍽 자연스러운 대사다 고개를 끄덕이는 한 사람이
    ☆★☆★☆★☆★☆★☆★☆★☆★☆★☆★☆★☆★
    《20》
    미역

    박소란

    미역이 사라지지 않는다

    지난밤 이끌리듯 불 앞에 서서 한 냄비 미역국을 끓였을 뿐인데
    허겁지겁 한 덩이 찬밥을 말았을 뿐인데

    사라지지 않는다
    이불 속으로 손을 뻗으면 한 줌 미역이 무섭게 엉긴 한 다발 머리칼이
    빈 몸을 휘감고
    빈 방을 넘실거리고, 살려줘 애걸하는 모양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미역은,

    대체 무엇일까 책장 가장자리 크고 두꺼운 책을 찾아 펼치자
    미역은 있다 어김없이
    핏기를 잃은 종이 위에 목이 꺾인 활자 위에

    입가에 마른 미역 부스러기를 묻힌 채 떠도는 창 밖의 사람을 바라보다가
    당신도 미역국을 먹었습니까
    한 마디 건넸을 뿐인데
    한 차례 눈을 마주 보았을 뿐인데

    그는 몹시 운다
    갈 곳을 모르는 귀신같이
    머리를 풀어헤친 채로 뜨거운 물 속에 잠긴다

    미역은 순식간에 불어나 짭조름한 살 냄새를 피우고

    누구의 생일입니까 오늘은
    누구를 위해 미역국은 끓고 있습니까

    사라질 듯 사라질 듯
    한 그릇 밤이 사라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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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2 안광수 시 모음 61편 김용호2019.07.25.2884
    221 박종영 시 모음 71편 김용호2019.07.25.2785
    220 박남준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9.07.25.2958
    219 정용철시모음 21편 김용호2019.06.01.35513
    218 김지순 시 모음 35편 김용호2019.06.01.2927
    217 이문재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9.06.01.3899
    216 김동수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9.06.01.26521
    215 김재진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9.06.01.3917
    214 이성지 시 모음 50편 김용호2019.06.01.30510
    213 김명인시모음 65편 김용호2019.06.01.31411
    212 이길옥 시 모음 20편 김용호2019.06.01.2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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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 이명희 시 모음 21편 김용호2019.06.01.2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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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4 김민자 시 모음 6편 김용호2018.02.07.60319
    143 최명운 시 모음 31편 김용호2018.02.07.53516
    142 김홍성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8.02.07.83520
    141 서동안 시 모음 19편 김용호2018.02.07.51037
    140 조은주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8.02.05.57218
    139 장석주 시 모음 31편 김용호2018.02.05.64216
    138 임우성 시 모음 49편 김용호2018.02.05.51516
    137 박재성 시 모음 51편 김용호2018.02.05.53114
    136 전덕기 시 모음 23편 김용호2018.02.05.44212
    135 십자가시모음 35편 김용호2018.02.05.48622
    134 차영일 시 모음 26편 김용호2018.02.05.48926
    133 한정원 시 모음 20편 김용호2018.02.05.47816
    132 박희종 시 모음 22편 김용호2018.02.05.53617
    131 최규영 시 모음 17편 김용호2018.02.05.50814
    130 이정순 시 모음 30편 김용호2018.01.19.65919
    129 최한식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8.01.19.67819
    128 이경순 시 모음 22편 김용호2018.01.19.63337
    127 손숙자 시 모음 50편 김용호2018.01.19.77118
    126 최제순 시 모음 16편 김용호2018.01.19.64619
    125 조미하 시 모음 65편 수정김용호2018.01.19.70921
    124 이정애 시 모음 56편 김용호2018.01.09.82242
    123 김수열 시 모음 26편 김용호2017.12.31.86524
    122 정재영 시 모음 65편 김용호2017.12.26.78823
    121 도지현 시 모음 82편 김용호2017.11.20.139828
    120 10월시 모음 45편 김용호2017.09.17.81536
    119 9월시 모음 59편 김용호2017.09.17.99727
    118 기도시모음 65편 김용호2017.09.12.124034
    117 김수향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7.09.02.91336
    116 조미경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7.02.05.103749
    115 이필종 시모음 35편 김용호2016.12.13.141564
    114 이점순 시 모음 75편 김용호2015.12.31.2742113
    113 전근표 시 모음 85편 김용호2015.06.12.2660212
    112 최학 시 모음 10편 김용호2015.06.12.1627122
    111 임경숙 시 모음 90편 김용호2015.02.15.2153427
    110 임경숙 시 모음 53편 김용호2015.01.25.1937223
    109 12월시모음 73편 김용호2014.12.07.1752363
    108 홍해리 시 모음 55편 김용호2014.11.10.2299191
    107 복효근 시 모음 60편 김용호2014.11.10.2493318
    106 강해산 시 모음 60편 김용호2014.11.10.1989198
    105 이시영 시 모음 35편 김용호2014.11.10.1690208
    104 안현심 시 모음 21편 김용호2014.11.10.1236205
    103 신동엽 시 모음 45편 김용호2014.11.10.1991444
    102 오태인 시 모음 34편 김용호2014.11.10.1379260
    101 박경리 시 모음 70편 김용호2014.11.01.1724351
    100 이효녕 시 모음 65편 김용호2014.11.01.1357398
    99 오세영 시 모음 55편 김용호2014.11.01.2338454
    98 이정록 시 모음 27편 김용호2014.10.23.1868101
    97 이은상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4.10.23.1295243
    96 정채봉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4.10.23.2112148
    95 성진명 시 모음 45편 김용호2014.10.23.1258268
    94 우덕희 시 모음 22편 김용호2014.10.23.1574142
    93 황인숙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4.10.23.1243238
    92 곽재규 시 모음 34편 김용호2014.10.23.1505226
    91 이병주 시 모음 50편 김용호2014.10.07.1311146
    90 오세철 시 모음 87편 김용호2014.10.07.1808297
    89 김동원 시 모음 79편 김용호2014.10.07.1030116
    88 구연배 시 모음 40편 김용호2014.10.07.1229272
    87 김영화 시 모음 30편 김용호2014.10.07.1237205
    86 선미숙 시 모음 70편 김용호2014.10.07.1292182
    85 이병율 시 모음 45편 김용호2014.10.07.1588219
    84 박현숙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4.10.07.1119181
    83 이승하 시 모음 16편 김용호2014.10.07.1114211
    82 김옥자 시 모음 열편 김용호2014.10.07.1194162
    81 문병란 시 모음 33편 김용호2014.10.07.1217193
    80 김명우 시 모음 열 다섯편 김용호2014.10.07.122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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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황금찬 시 모음 34편 김용호 2004.12.29.2321330
    32 양현근 시 모음 21편 김용호 2004.12.29.245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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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박인환 시 모음 17편 김용호 2004.12.29.221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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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서정윤시모음 41편 김용호 2004.03.12.295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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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이해인 시 모음 28편 김용호 2004.03.12.4574303
    20 박노해 시 모음/15편 김용호 2004.03.12.305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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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정두리 시 모음 15편 김용호 2004.03.12.3340226
    17 도종환 시 모음 40편 김용호 2004.03.12.3510402
    16 정호승 시 모음 39편 김용호 2004.03.12.3040379
    15 유치환 시 모음 45편 김용호 2004.03.12.3495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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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김시습 시 모음 65편 김용호 2004.02.24.2983471
    7 박목월 시 모음 30편 김용호 2004.02.24.2433260
    6 고정희 시 모음 38편 김용호 2004.02.10.3155495
    5 서정주 시 모음 41편 김용호 2004.02.09.3122465
    4 노천명 시 모음 23편 김용호 2004.02.08.2320420
    3 정지용 시 모음 24편 김용호 2004.02.08.2205352
    2 김현승 시 모음 35편 김용호 2004.02.03.5460545
    1 주옥같은시어모음 김용호 2004.02.03.2944413
    0 여명 문학 회칙  여명문학2004.01.25.197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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