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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진 시 모음 25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9.06.01. 11:56:10   조회: 79   추천: 3
    여명문학:

    김재진 시 모음 25편
    ☆★☆★☆★☆★☆★☆★☆★☆★☆★☆★☆★☆★
    《1》
    가을 그림자

    김재진

    가을은 깨어질까 두려운 유리창
    흘러온 시간들 말갛게 비치는
    갠 날의 연못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찾으러
    집나서는 황혼은
    물 빠진 감잎에 근심들이네
    가을날 수상한 나를 엿보는
    그림자는 순간접착제
    빛 속으로 나선 여윈 추억 들춰내는
    가을은 여름이 버린 구겨진 시간표
    ☆★☆★☆★☆★☆★☆★☆★☆★☆★☆★☆★☆★
    《2》
    가을입니다

    김재진

    한 그루 나무이고 싶습니다.
    메밀꽃 자욱한 봉평쯤에서
    길 묻는 한 사람 나그네이고 싶습니다.

    딸랑거리며 지나가는 달구지 따라
    눈 속에 밟힐 듯한 길을 느끼며
    걷다간 쉬고, 걷다간 쉬고 하는
    햇빛이고 싶습니다.

    가끔은 멍석에 누워
    고추처럼 빨갛게 일광욕하거나
    해금강 바라뵈는 몽돌밭을 지나는
    소금기 섞인 바람이고 싶습니다.

    플라타너스의 넓은 잎이
    구두 아래 바지락거리는 이맘 때
    허수아비처럼 팔을 벌린 내 마음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
    《3》
    거인

    김재진

    사람들은 기도를 무엇을 구하는 것이라 여기네
    가까운 이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기력할 때
    누군가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 속에서 더 이상
    내 안을 비추는 따뜻한 빛 찾을 수가 없을 때
    답답함이 세력을 얻어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내일이 안 보이는 깜깜함에 갇혔을 때
    어딘가에 매달려 사람들은 기도하고 싶어하네

    한때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한때 내가 미워했던 사람과
    한때 나를 힘들게 했던 그 모든 벽들과
    벽들이 갈라놓은 질식의 공간과
    저녁의 식사와 아침의 푸른 공기 사이에 박혀있는
    갈구의 절박함
    그러나 기도는 뭔가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네
    기도는 또 하나의 나
    내 안에 숨어있는 거인을 불러내는 일이라네
    ☆★☆★☆★☆★☆★☆★☆★☆★☆★☆★☆★☆★
    《4》
    겨울 나그네

    김재진

    점점 더 눈이 퍼붓고 지워진 길 위로 나무들만 보입니다
    나무가 입고 있는 저 순백의 옷은 나무가 읽어야 할 사상이 아닌지요
    두꺼운 책장 넘겨 찾아내는 그런 사상 말입니다
    그대가 앉아 있는 풍경 뒤에서 내가 노을이 된 것은 알 수 없는
    그런 사상 때문은 아닙니다
    그대라고 부르는 그 이름의 떨림이 좋아 그대를 그대라 부르고 싶을 뿐,
    또 한 번의 사라잉 신열처럼 찾아와서 나를 문 두드릴 때
    읽고 있던 책 내려놓으며
    그대는 나무가 입고 있는 그 차가운 사상으로 나를 바라보게 되겠지요
    그대, 단 한번 내가 가슴속에 쌓아두고 싶은 맹세나 기도 같은 그대
    그대가 퍼붓는 눈발이라면 나는 서 있는 나무 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대가 바람이라면 나는 윙윙 울고 있는 전신주 일수 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눈 위에 세워놓은 이정표 따라 슬픔 쪽으로 좀더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대는 쏟아지는 하늘입니다
    ☆★☆★☆★☆★☆★☆★☆★☆★☆★☆★☆★☆★
    《5》
    국화 앞에서

    김재진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
    귀밑에 아직 솜털 보송보송하거나
    인생을 살았어도 헛 살아버린
    마음에 낀 비계 덜어내지 못한 사람들은 모른다.

    사람이라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듯
    꽃이라도 다 같은 꽃은 아니다.
    눈부신 젊음 지나
    한참을 더 걸어가야 만날 수 있는 꽃,
    국화는 드러나는 꽃이 아니라
    숨어 있는 꽃이다.
    느끼는 꽃이 아니라 생각하는 꽃이다.
    꺾고 싶은 꽃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바라보는 꽃이다.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
    가을날 국화 앞에 서 보면 안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굴욕을 필요로 하는가를.
    어쩌면 삶이란
    하루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견디는 것인지 모른다.
    어디까지 끌고 가야할지 모를 인생을 끌고
    묵묵히 견디어내는 것인지 모른다.
    ☆★☆★☆★☆★☆★☆★☆★☆★☆★☆★☆★☆★
    《6》
    기다리는 사람

    김재진

    설령 네가 오지 않는다 해도
    기다림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 묵묵히 쳐다보며
    마음 속에 넣어둔 네 웃는 얼굴
    거울처럼 한 번씩 비춰볼 수 있다.

    기다리는 동안 함께 있던 저무는 해를
    눈 속에 가득히 담아둘 수 있다.
    세상에 와서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
    알고 보면 기다림이다.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기다리는 동안 따뜻했던 내 마음을
    너에게 주고 싶다.
    내 마음 가져간 네 마음을
    눈 녹듯 따뜻하게 녹여주고 싶다.

    삶에 지친 네 시린 손 잡아주고 싶다.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쉬어갈 수 있는
    편안한 기다림으로
    네 곁에 오래도록 서 있고 싶다.
    ☆★☆★☆★☆★☆★☆★☆★☆★☆★☆★☆★☆★
    《7》
    기차 타고 싶은 날

    김재진

    이제는 낡아 빛바랜
    가방 하나 둘러메고 길을 나선다.
    반짝거리는 레일이 햇빛과 만나고
    빵처럼 데워진 돌들 밟는
    단벌의 구두 위로 마음을 내맡긴다.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떠나는 친구 하나 배웅하고 싶은
    내 마음의 간이역
    한번쯤
    이별을 몸짓할 사람 없어도 내 시선은
    습관에 목이 묶여 뒤돌아본다.
    객실 맨 뒤칸에 몸을 놓은
    젊은 여인 하나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 밖을 보고
    머무르지 못해 안타까운 세월이 문득
    꺼낸 손수건 따라 흔들리고 있다.
    ☆★☆★☆★☆★☆★☆★☆★☆★☆★☆★☆★☆★
    《8》
    너 닮은 꽃 민들레

    김재진

    돌 틈에 피어 있는
    너 닮은 꽃 민들레
    시멘트 담 사이로 고개 내민
    훤하고 착한 얼굴
    작지만 약하지 않은
    네 웃는 모습 보며 나는
    네 노란 웃음 보며 나는
    네게 가 안기고 싶다.
    힘들어도 표 내지 않는,
    밟혀도 꺾이지 않는,
    네 얼굴 보며 나는
    한 아름 하늘을 안고 싶다
    ☆★☆★☆★☆★☆★☆★☆★☆★☆★☆★☆★☆★
    《9》
    너를 만나고 싶다

    김재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사소한 습관이나 잦은 실수,
    쉬 다치기 쉬운 내 자존심을 용납하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직설적으로 내뱉고선 이내 후회하는
    내 급한 성격을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과 만나고 싶다.
    스스로 그어 둔 금속에 고정된 채
    시멘트처럼 굳었다가 대리석처럼 반들거리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사람들 헤치고
    너를 만나고 싶다.
    입꼬리 말려 올라가는 미소 하나로
    모든 걸 녹여 버리는
    그런 사람.
    가뭇한 기억 더듬어 너를 찾는다.
    스치던 손가락의 감촉은 어디 갔나.
    다친 시간을 어루만지는
    밝고 따사롭던 그 햇살,
    이제 너를 만나고 싶다.
    막무가내의 고집과 시퍼런 질투,
    때로 타오르는 증오는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내 못된 인간을 용납하는 사람.
    덫에 치여 비틀거리거나
    어린아이처럼 꺼이꺼이 울기도 하는
    내 어리석음 그윽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내 살아가는 방식을 송두리째 이해하는
    너를 만나고 싶다.
    ☆★☆★☆★☆★☆★☆★☆★☆★☆★☆★☆★☆★
    《10》
    넉넉한 마음

    김재진

    고궁의 처마 끝을 싸고도는
    편안한 곡선 하나 가지고 싶다.
    뾰족한 생각들 하나씩 내려놓고
    마침내 닳고닳아 모서리가 없어진
    냇가의 돌멩이처럼 둥글고 싶다.
    지나온 길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
    부끄러움으로 구겨지지 않는
    정직한 주름살 몇 개 가지고 싶다.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속이며 살아왔던
    어리석었던 날들 다 용서하며
    날카로운 빗금으로 부딪히는 너를
    달래고 어루만져 주고 싶다.
    ☆★☆★☆★☆★☆★☆★☆★☆★☆★☆★☆★☆★
    《11》
    따뜻한 그리움

    김재진

    찻잔을 싸안듯,
    그리움도
    따뜻한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생각하면 촉촉이 가슴 적셔오는
    눈물이라도
    그렇게
    따뜻한 눈물이라면 좋겠네

    내가 너에게 기대고
    또 네가 나에게 기대는
    풍경이라도
    그렇게
    흐뭇한 풍경이라면 좋겠네

    성에 낀 세상이 바깥에 매달리고
    조그만 입김 불어 창문을 닦는
    그리움이라도 모락모락
    김 오르는 그리움이라면 좋겠네
    ☆★☆★☆★☆★☆★☆★☆★☆★☆★☆★☆★☆★
    《12》
    마음 길

    김재진

    마음에도 길이 있어
    아득하게 멀거나 좁을 대로 좁아져
    숨 가쁜 모양이다.

    갈 수 없는 곳과, 가고는 오지 않는 곳으로
    그 길 끊어진 자리에 절벽 있어
    가다가 뛰어내리고 싶을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어
    열리거나 닫히거나 더러는 비틀릴 때 있는 모양이다.

    마음에도 항아리 있어
    그 안에 누군가를 담아두고
    오래오래 익혀 먹고 싶은 모양이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가
    달그락달그락 설거지 하고 있는 저녁
    일어서지 못한 몸이 따라 문밖을 나서는데
    마음에도 길이 있어 나뉘는 모양이다
    ☆★☆★☆★☆★☆★☆★☆★☆★☆★☆★☆★☆★
    《13》
    벼랑에 대하여

    김재진

    한 줄의 편지 쓰고 싶은 날 있듯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있다.
    견딜 수 없던 마음 갑자기 풀어지고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 문득
    이해되어질 때 있다.

    저마다의 상황과 저마다의 변명 속을
    견디어가야 하는 사람들
    땡볕을 걸어가는 맨발의 구도자처럼
    돌이켜보면 삶 또한
    구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세파에 부대껴
    마음 젖지 않는 날 드물고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벼랑에 서보면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이 문득
    용서하고 싶어질 때 있다.
    ☆★☆★☆★☆★☆★☆★☆★☆★☆★☆★☆★☆★
    《14》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김재진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나
    말없는 나무로 있고 싶었다

    길 위에 서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
    해님은 또 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빛 고운 열매. 등처럼 걸어둔 채
    속으로 가만가만 무르익고 싶었다

    다시 사랑이 내게로 왔을 때 나
    누구냐고 넌지시 물어보며

    감춰둔 그늘 드려 네 안으로
    소리 없이 그윽하게 스며들고 싶었다

    그만 사랑이 내게서 떠날 때
    닫혔던 속 그제야 열어뵈며 나
    네 뒤에 오랫동안 서 있고 싶었다
    ☆★☆★☆★☆★☆★☆★☆★☆★☆★☆★☆★☆★
    《15》
    사랑한다는 말

    김재진

    누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속엔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에게 사랑 받는다고 하는 말속엔
    햇빛처럼 가득한 따뜻함이 들어 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거나
    누가 누구를 한없이 기다린다는 말속에
    숨어 있는 예쁜 가시,
    누구를 사랑한다고 하는 말보다
    예리한 아픔은 없다
    ☆★☆★☆★☆★☆★☆★☆★☆★☆★☆★☆★☆★
    《16》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김재진

    남아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아프지 않고
    마음 졸이지도 않고
    슬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온다던 소식 오지 않고 고지서만 쌓이는 날
    배고픈 우체통이
    온종일 입 벌리고 빨갛게 서 있는 날
    길에 나가 벌 받는 사람처럼 그대를 기다리네
    미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외롭지 않고 지치지 않고
    웃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까닭 없이 자꾸자꾸 눈물만 흐르는 밤
    길에 서서 허염없이 하늘만 쳐다보네
    걸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 따뜻한
    사랑할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
    《17》
    세월

    김재진

    살아가다 한번씩
    생각나는 사람으로 살자

    먼길을 걸어 가 닿은곳 아예 없어도
    기다리는 사람 있는 듯
    그렇게 마음의 젖은 자리 외면하며 살자

    다가오는 시간은 언제나
    지나갔던 세월(歲月),
    먼 바다의 끝이 선 자리로 이어지듯
    아쉬운 이별에 지겨운 만남이
    있듯 모르는 척 그저
    뭉개어진
    마음으로 살자
    ☆★☆★☆★☆★☆★☆★☆★☆★☆★☆★☆★☆★
    《18》
    시간의 세 가지 걸음

    김재진

    ‘시간은 세 가지 걸음이 있다.
    미래는 주저하면서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달아나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승자는 패자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만
    시간에 여유가 있고,
    패자는 승자보다 게으르지만
    늘 바쁘다고 말한다.

    승자의 하루는 25시간이고
    패자의 하루는 23시간밖에 안 된다.’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올라가면 내려와야 하듯이
    폭염이 내리쬐다가 또 비가 쏟아지고,
    다시 폭염이 계속되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다가온다.
    절정에 가면 모든 것은
    내리막길을 가기 마련이다.

    느리게, 그리고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것 같지만
    미래는 현재가 되는 순간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가 버린다.

    하루하루는 지루한데 일주일은 금방 흩어지고,
    한 달이나 일 년은 쏜살같이 날아가고 없다.
    우리 만난 지가 언제였더라 하며
    악수하다 보면 못 본지 10년.
    강산도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변해
    한때의 친구가 서먹서먹한 타인이 되어 있다.

    승자는 시간을 관리하며 살고,
    패자는 시간에 끌려가며 산다는데
    인생에서 패자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인생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라
    우린 그저 무엇을 경험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그 경험이 다할 때
    세상을 떠날 뿐이다.

    적지 않은 경험을 했지만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어떤 경험이
    내 인생에 남아 있을까?

    다가오는 미래를 다 알 수야 없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시간에 끌려다니며 살지 말고
    시간을 부리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19》
    첫눈 생각

    김재진

    입김만으로도 따뜻할 수 있다면 좋겠다.
    기다리는 눈은 안 오고 손가락만 시린 밤
    네 가슴속으로 내려가
    너를 깨울 수만 있다면 나는
    더 깊은 곳 어디라도 내려갈 수 있다.
    종소리에 놀란 네가 잠에서 깨고
    잠옷바람으로 언뜻 창 밖을 내다볼 때
    첫눈 되어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반색하며 기뻐하는 너를 위해
    이 세상 어디라도 쌓일 수만 있다면 좋겠다.
    햇빛에 녹지 않는 응달이 되어
    오래도록 네 눈길 끌었으면 좋겠다.
    ☆★☆★☆★☆★☆★☆★☆★☆★☆★☆★☆★☆★
    《20》
    치유

    김재진

    나의 치유는
    너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가듯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너는 내게 그 모든 것이다

    모든 치유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아무것도 아니기에 나는
    그 모두였고

    내가 꿈꾸지 못한 너는 나의
    하나뿐인 치유다
    ☆★☆★☆★☆★☆★☆★☆★☆★☆★☆★☆★☆★
    《21》


    김재진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가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
    《22》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김재진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때 그 용서할 수 없던 일들
    용서할 수 있으리.

    자존심만 내 세우다 돌아 서고 말던
    미숙한 첫사랑도 이해할 수 있으리.

    모란이 지고 나면 장미가 피듯,
    삶에는 저마다 제 철이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찬물처럼 들이키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나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를 향해
    미안하단 말 한 마디 건넬 수 있으리.

    기쁨 뒤엔 슬픔이
    슬픔 뒤엔 또 기쁨이 기다리는 순환의 원리를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너에게 말해 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쉬, 너를 보내지 않으리.

    밤새 썼다 찢어버린 그 편지를
    찢지 않고 우체통에 넣으리.

    사랑이 가도 남은 마음의 흔적을
    상처라 부르지 않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망설이기만 하다 포기하고 만
    금지된 길들 찾아가 보리.

    사랑에는 결코
    금지될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일깨워 주리.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그때 내 마음 흔들어 놓던
    너의 그 눈빛이 일러 주는 길을 따라
    돈에도 이름에도
    그 아무 것에도 매이지 않으리.

    너를 위해 다시 한 번 살아 볼 수 있다면,
    지키지 못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으리.

    한 톨의 씨앗 속에 나무가 숨어 있듯,
    절망 속에 숨어 있는 희망을 보여 주리.

    다시 한 번 너를 위해 살아 볼 수 있다면,
    물방울 같은 네 손톱에 물들기 위해
    해마다 봉숭아를 내 가슴에 심으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널 기다리며 서성대던 영화관 앞을
    만날 사람 없더라도 서 있어 보리.

    영화가 끝나면 밀려나오는 사람들 속에
    네 얼굴 찾아보며 가슴 두근거리리.

    한 번쯤 다시 살아 볼 수 있다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리.

    때로는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모든 것 다 바쳐 너를 사랑하리.
    ☆★☆★☆★☆★☆★☆★☆★☆★☆★☆★☆★☆★
    《23》
    햇살이야기

    김재진

    모든 것 다 잃어 버렸다고 생각한 날
    반짝이는 햇살이 다가와
    아니라고 말했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니
    아무것도 잃은 것 없다고
    어깨에 앉은 햇살이 내게
    아니라고 말했네.
    ☆★☆★☆★☆★☆★☆★☆★☆★☆★☆★☆★☆★
    《24》
    혼자라고 느낄 때

    김재진

    함께 가던 사람들 속에서 문득
    혼자라고 느낄 때
    깜깜한 영화관에 앉아 막
    불이 켜지고 흐릿해진 화면 위로
    올라가는 자막 바라보며
    일어서지도 못하고 그렇게
    흐르는 눈물 닦아내고 있을 때
    영화 속의 슬픔이 마음속의 슬픔을
    건드려 덧나게 할 때
    비어 있는 방문을 도둑처럼 열고
    상처받고 상처 내며 보낸 하루를
    구겨진 편지처럼 가만 책상 위에 놓을 때
    아, 온종일 그렇게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느낄 때
    사랑아, 너는
    내 속에 숨어 언제나 나를 보고 있다.
    ☆★☆★☆★☆★☆★☆★☆★☆★☆★☆★☆★☆★
    《25》
    후회

    김재진

    내가 무심코 한 장의 종이를 구겨버릴 때
    몇 그루의 나무가 베어질지 모른다.

    내가 무심코 입술을 움직이며 혀 놀릴 때
    몇 사람의 가슴이 상처 날지 모른다.

    내가신고 다닌 이 구두가
    얼마나 많은 벌레들을 위협했는지 나는
    모르고 있었을 뿐이다.

    누군가를 용서하며 받아들인다는 그 말이
    스스로를 용서하며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간 뒤에야 나는 알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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