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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두리 시 모음 15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4.03.12. 22:07:36   조회: 2719   추천: 211
    여명문학:

    정두리 시 모음 15편
    ☆★☆★☆★☆★☆★☆★☆★☆★☆★☆★☆★☆★
    그대

    정두리

    우리는 누구입니까
    빈 언덕에 자운영 꽃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없는 반짝이는 조약돌
    이름을 얻지 못한 구석진 마을의 투명한 시냇물
    일제히 흰 띠를 두르고 스스로 다가오는 첫 눈입니다

    우리는 무엇입니까
    늘 앞질러 사랑케 하실 품
    덜어내고도 몇 배로 다시 고이는 힘
    이파리도 되고 실팍한 줄기도 되고
    아, 한 몫에 그대를 다 품을 수 있는 씨앗으로 남고 싶습니다
    허물없이 맨발인 넉넉한 저녁입니다
    뜨거운 목젖까지 알아내고도 코 끝으로까지 발이 저린
    우리는 나무입니다

    우리는 어떤 노래입니까
    이노리 나무 정수리에 낭낭 걸린 노래 한 소절
    아름다운 세상을 눈물나게 하는 눈물나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대와 나는 두고 두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네게로 이르는 길
    네가 깨끗한 얼굴로 내게로 되돌아오는 길
    그대와 나는 내리 내리 사랑하는 일만 남겨두어야 합니다
    ☆★☆★☆★☆★☆★☆★☆★☆★☆★☆★☆★☆★
    꽁보리밥

    정두리

    보리밥보다
    더 어두운 밥

    '꽁'
    그 말 하나가 보태는

    먹어도 고픈
    듣기만 해도
    먼저 허기지는
    남루한 음식

    그래도 입 속에서
    머물대다 넘어가는 것이

    과욕을 누르고
    과식을 용서해 줄
    이름만으로도
    참으로 낮아지는
    꽁보리밥.
    ☆★☆★☆★☆★☆★☆★☆★☆★☆★☆★☆★☆★
    내 의자

    정두리

    알맞게
    키도 다리도
    알맞게
    그래야 편안해
    큰 의자 깊숙한 자리
    욕심내지 말 것
    두 개의 자리도
    탐내지 말아
    등을 곧추세우고
    앞을 바라봐
    거기에 반듯함이 보인다면
    바로 앉은
    내 의자
    ☆★☆★☆★☆★☆★☆★☆★☆★☆★☆★☆★☆★
    단풍나무

    정두리

    햇빛이 불씨를 묻어놓고
    바람은 부채질하고
    이웃은 모여서 손뼉쳐주고
    걱정 없이 신나는 가을날의 불구경
    오래도록 불타는 단풍나무의 불
    ☆★☆★☆★☆★☆★☆★☆★☆★☆★☆★☆★☆★
    라일락

    정두리

    가지마다 숨겨진
    작은 향기 주머니

    이름 석자 뒤에도
    묻어나는 냄새

    향기로만
    나무가 되려는 나무

    소올솔
    작은 주머니가
    올을 풀어서

    봄 하늘을
    향긋하니 덮어 버렸다.
    ☆★☆★☆★☆★☆★☆★☆★☆★☆★☆★☆★☆★
    먼지의 자리

    정두리

    먼지는 어디에건
    주저앉으려고 든다
    살금살금
    가볍게
    무엇보다 사람들의
    무관심 위에 앉기를 좋아한다
    아무도 몰래
    숨어 만든 자리
    그 자리 엄청 넓어서
    나중엔 먼지가 먼저 놀라
    풀석 일어난다
    ☆★☆★☆★☆★☆★☆★☆★☆★☆★☆★☆★☆★
    바람의 울음

    정두리

    아기 소나무를 보며
    바람이 매를 듭니다.

    쑤 - 욱
    가슴을 펴!

    매를 맞으며 우는 것은
    소나무가 아닙니다.

    회초리 내던지고
    긁힌 자국 만져주며
    오래도록

    바람은 울고 있습니다.
    ☆★☆★☆★☆★☆★☆★☆★☆★☆★☆★☆★☆★
    산수유 꽃

    정두리

    이른 봄
    햇살이 씨앗을 뿌렸다
    산수유나무
    품었던 씨앗을 틔운다
    차조알 같이 자잘한 노란 꽃
    아직 뺨이 시려
    깨알만큼 얼굴을 내민
    그래도 촘촘히 달린 산수유 꽃
    ☆★☆★☆★☆★☆★☆★☆★☆★☆★☆★☆★☆★
    소나무

    정두리

    나이테를 보지 않고
    눈어림으로 알 수 있는 버젓한 어깨

    튼튼한 다리가
    보기 좋다.

    꽃보다 더 나은
    푸른 솔이 좋다.

    이런 거구나
    이래야 하는구나.

    냄새도 빛깔도
    이름과 닮은
    의젓한 나무.

    네 모습을 보면서
    소나무야
    꿈까지 푸르게 꾸고 싶다.
    ☆★☆★☆★☆★☆★☆★☆★☆★☆★☆★☆★☆★
    씨앗

    정두리

    씨앗은 크지 않아도 된다
    까만 점 하나가 만든 나무숲
    그 숲에 둥지 튼 비비새 한 마리
    까만 씨앗 한 개가 하는 일은
    작은 점 하나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
    애기 똥 풀 꽃

    정두리

    아기가 기저귀 벗고
    들에다 똥을 누었다네
    아기 똥은 이쁘기도 하지
    노랑 노랑 노랑 꽃
    아기는 온종일 혼자 놀았네
    여기 저기 조오기
    애기똥풀꽃은 그렇게 자꾸자꾸 피어났다네
    ☆★☆★☆★☆★☆★☆★☆★☆★☆★☆★☆★☆★
    어머니의 눈물

    정두리

    회초리를 들었지만 차마
    못 때리신다.
    아픈 매보다 더 무서운
    무서운 목소리보다 더 무서운
    어머니의 눈물이 손등에
    떨어진다.
    어머니의 굵은 눈물에 내가
    젖는다.
    ☆★☆★☆★☆★☆★☆★☆★☆★☆★☆★☆★☆★
    엄마가 아플 때

    정두리

    조용하다
    빈 집 같다

    강아지 밥도 챙겨 먹이고
    바람이 떨군
    빨래도 개켜 놓아두고

    내가 할 일이 뭐가 있나

    엄마가 아플 때
    나는 철드는 아이가 된다

    철든 만큼 기운 없는
    아이가 된다.
    ☆★☆★☆★☆★☆★☆★☆★☆★☆★☆★☆★☆★
    코스모스

    정두리

    나란히 나란히 누가 불렀나
    들길에 나란한 코스모스
    외로운 들길이 얼마나 환한지
    그 길 지나면서 그냥 가긴 싫어
    바람도 꽃잎 속에 숨었다 가네
    ☆★☆★☆★☆★☆★☆★☆★☆★☆★☆★☆★☆★


    정두리

    밭에서 김매던 할머니
    호미 던지고
    혼잣말 한다
    "에구, 무섭게 자라네."

    누구도 기운 내라고
    물 한 모금 뿌려 주거나
    응원해 주지 않았다
    그냥 업신여기며
    이름이 없이
    풀, 풀 불렀다는데~

    풀은 자기가
    힘이 센 줄도 모르고
    무서운 줄도 모르고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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