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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동안 시 모음 19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8.02.07. 19:17:42   조회: 336   추천: 9
    여명문학:

    서동안 시 모음 19편
    ☆★☆★☆★☆★☆★☆★☆★☆★☆★☆★☆★☆★
    《1》
    그것에 관하여

    서동안

    그것이 밤마다 찾아오는 것은
    태초의 약속 때문일 것이다
    어느 밤에는 그곳을 콕 찌르며
    자신의 전 생애를 소리 없이 훑고 가기도 하는
    그를 에워싸고 있는 미미한 저항 때문일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삶은 이미 끝났다던가! 시작이라던가?
    나아감과 멈춤이 일치하지 않았으며
    어둠속의 그것은 왜 더 단단하고 무서운지
    봄밤에 성긴 그것은 허무하다든지
    세상의 모든 밤은 우직한 습관 때문에
    때론 편파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이미 태초의 영역, 날마다 진화하는
    밤이 없는 도시가 밤을 삼키듯이
    그것에 대한 종의 기원이라도 파 헤쳐 보아야 할지
    그는 마치 바지랑대 꼭대기에 매달려 있거나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윤슬처럼 휘어져 빛나거나
    그래도 꿈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니
    오늘밤에는 도야지, 한 열 마리쯤 우리에 가두어야겠다
    ☆★☆★☆★☆★☆★☆★☆★☆★☆★☆★☆★☆★
    《2》
    꽃피는 날이라는 게

    서동안

    꽃피는 날이라는 게 따로 있나요
    섬진강 매화
    낭자하게 향기 품었다는데

    두견새 목 젖는 피 한 점 받아먹고
    지천으로 붉어질 진달래꽃은
    산골바람 차가워서 하순께나 올려나

    순간의 절정에 지는 꽃처럼
    목숨도 불꽃처럼 타올라 사그라지는 것을
    한세상 사는 것이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순간이 오는 것임에
    꽃피는 날이란 사실 정해 놓은 날이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들과 인연 닿으면 꽃피는 날이 되는 것을요

    이적 지 건네준 마음도 예삿일이 아니라고
    가슴 아파 시린 바람 끝 잡고 서니
    새벽안개 저쪽에 만삭의 몸을 푸는 하현달이 뜬다
    채우고 비우는 만고의 몸짓으로 꽃피는 날을 기다리며,
    ☆★☆★☆★☆★☆★☆★☆★☆★☆★☆★☆★☆★
    《3》
    나팔꽃

    서동안

    장맛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산골의 밤이
    마을을 하얗게 휘감아 돌면
    오랜 윤회 쪽으로 별들이 일제히 귀 열어
    아침으로 건너오는 동안
    어둠의 푸른 점들이 내 눈을 할퀴면
    기억 저편에 가지런히 모아 놓은 그리움을
    지그시 눌러 앉힌다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라면
    죽어서도 만나야할 이유가 있어
    잠들어 있는 사람 깨어날 때
    아침이 꺼내 놓은 수천 개의
    햇살 무늬로 빛나는 낯 선 땅
    탱자나무 울타리에
    푸른 이슬로 새초롬히 목욕 끝내고
    새발간 입술 터지도록 가까이 다가가서
    저 지고지순함을 아침에 풀어 섞는 네가
    히말라야 설산을 그리워하는
    첫사랑 입술을 닮았구나
    ☆★☆★☆★☆★☆★☆★☆★☆★☆★☆★☆★☆★
    《4》
    낙엽이 가는 길

    서동안

    침몰하는 하루
    손 내밀어 잡을 수 없어
    속마음 열어 본다면
    낙엽따라
    탈래탈래 걸어가는 하얀 바람

    툭툭 털고 일어서는
    저 여린 잎도
    신이 허락하는 시간 지나면
    길 떠날 채비 서두르는
    하늘 밖의 사랑

    가르쳐 주는 이 없어도
    가을 앞에 가지런히 놓이면
    억울함 모두 잊은 채
    길은 활짝 열어 놓았네
    낙엽이 가는 길로…
    ☆★☆★☆★☆★☆★☆★☆★☆★☆★☆★☆★☆★
    《5》
    덕유산에 오르며

    서동안

    아침 몰고 오는
    곱디고운 사연 쓰다듬으며
    선녀바위 지나는 구름

    무작정 너를 찾아
    유년의 산기슭 돌아치면
    잃어버린 아픔이 얼마나 쓰라렸는가
    길은 말없이 덕유산으로 손짓한다

    버려두고 온 고향 햇살
    내려앉는 가을 안개 헤집고
    참샘에 내려앉는 선홍빛 노을

    우리가 여기까지
    터펄거리며 찾아 온 까닭은
    고개 너머 오두막 등불
    작은 불씨 호랑나비 되었나
    까치발 해 보려고…

    산은, 산을 밟고
    밟힌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오르고
    나는 덕유산에 오르며
    또 다른 길을 만드네…
    ☆★☆★☆★☆★☆★☆★☆★☆★☆★☆★☆★☆★
    《6》
    동백꽃 피어 있는 섬

    서동안

    봄빛 몸살 앓는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뼘 누울 자리 그 비좁은 섬마을마저 버리고
    네가 떠나갔을 땅 어느 곳에 씨를 뿌렸니
    굳게 걸어 잠근 사립문 옆에 피어난
    새빨간 동백꽃 그 섬에 내팽개치고
    바닷바람 피해 찾아간 그곳은 살만 하니
    봄빛 아련한 그 섬에 밤새 비가 내리고
    살강마다 거미줄로 엮인 기다림이
    야위어 가는 것은 네 잘못이 아니다
    긴 빗소리 밟고 홀로 돌담 기웃거리다
    돌아서는 편지처럼
    꿈꾸는 일 아직 남아 어디선가 아침의 기척에
    붉은 립스틱 짙게 바르고 네 그림자 따라간 물결 속
    수많은 밑줄 친 그리움들이 파랑으로 일렁이면
    뱃멀미 짊어지고 아직 먼 길을 가야 하는데
    허기진 춘삼월이 익숙한 듯
    오후의 햇살에
    천천히 낯을 씻는 그 섬이 서럽게 운다
    ☆★☆★☆★☆★☆★☆★☆★☆★☆★☆★☆★☆★
    《7》
    둘이 걸었네

    서동안

    안개 부서지는 그 길을
    둘이 걸었네
    심심풀이가 아닌
    까마득한 인연의 아침 맞으러…

    밤의 강 휘젓는 달빛
    해맑은 고요를 헤치며
    언제까지 약속 했던 안개끝으로
    강한 집착 떨구어 내는 연습을…

    몇 그루 미루나무가 있고
    옹기 항아리 울타리 지나
    잊을 수 없는 추억 담아 내는 불멸의 밤
    결코 장난이 아니었네…

    까만 그리움 쌓이는 모래성
    촉촉하게 그려 낼 수 없었기에
    이제사 슬픈 고백하며
    둘이 걸었네…
    ☆★☆★☆★☆★☆★☆★☆★☆★☆★☆★☆★☆★
    《8》
    들국화 피면

    서동안

    비바람 오기 전
    가을의 전설 안고 오는
    들국화 피는 언덕
    애달픈 사모곡 소담스레 쓸어안는 고향
    찬 서리 다하도록 야속한 밤
    ☆★☆★☆★☆★☆★☆★☆★☆★☆★☆★☆★☆★
    《9》
    뜨거운 음성

    서동안

    큰 나무 꼭대기 까치집이 위태롭게 흔들리면
    까치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허공에 길을 만든다
    우리 엄니
    야학에서 한글 배우듯 가갸, 거 겨 그 길을 천천히 더듬거리며
    장마에 접어 든 7월이 부연 허공을 땅 쪽으로 잡아당기고

    새들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인가
    나무는 새들의 둥지를 의지대로 불러들일 수 없지만
    새들은 나무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여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이 풍경을 읽고 있는 중이다

    새들의 일방적인 침범 의식에 관하여 성냄도 없는 듯하나
    기실 빗방울 기우는 대로 조금씩 출렁이며 바람의 부피만큼 일어서며
    땅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허공과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때론 고집을 피우다가 똑 부러지기도 하지만
    저 길을 닦아내는 나무의 기세가 자못 사납기도 하다

    본디 누구의 영역을 탐하려고 그런 것을 아닐 터
    필요에 의해 간절히 머리를 들어 올리다 보니
    누이는 싫고 매부는 좋은 공생의 순간들이
    사람이 사는 방향으로 조금씩 길을 밀어 놓는다

    ‘에미는 자슥을 위해 한 목심 바칠 각오가 단디 되 있능 겨’
    ‘긍께 넌 죽으라고 공부만 하면 되능 겨’
    시퍼런 불꽃이 풍문처럼 뒤척이며 맨 땅이 일어선다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무의 음성이 뜨겁다
    ‘이떼꺼정 뭘 보고 배우며 살았능 감’

    혼자 일어섰다는 뒤설렘으로 가득한 삶이
    실은 큰 나무에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지는 일방통행의 길이 없듯이
    어머니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욱 뜨겁다
    ☆★☆★☆★☆★☆★☆★☆★☆★☆★☆★☆★☆★
    《10》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서동안

    허리 질끈 동여맨
    가을 산이 처마 끝에 걸렸다
    (큰 소리로)
    아버지~ 時祭시제 모시고 왔습니다
    응~ 초상 치르고 왔다고?
    누가 죽었는데~

    아버지 발자국 소리에
    푸르던 산이 붉으레 물들어 가는 오후
    등 굽은 세월이 산자락에 떨어지는
    노을빛까지 끌어당겨
    나뭇잎 지는 소리까지 들었던 아버지의 귀에는
    이승의 소리를 지워 내는 시간이
    시냇물처럼 흐르고

    아버지는 가을을 듣지 못한다
    환갑이 지날 무렵부터 보청기를 끼어야 하셨던
    그래서 사람들의 입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듣는 청각 장애인
    아버지는 눈으로 가을을 보신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달빛으로 가을을 칠 한다
    마른 빛은 갈대꽃이 되고
    남은 물감에는 벼꽃 한 줌 넣어서
    휘저어 마시는 논가 어디쯤

    낡은 지게에 짊어지고 온 삶의 무게만큼
    짓눌린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갈대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
    《11》
    아침에 태양을 피하는 색칠을 하면서

    서동안

    만추의 아침은
    나뭇잎에 물감을 채색하는 일이다

    햇살 부서지는 가을 아침
    햇빛날개 밟고 가는 그 길에도
    어젯밤 잠 못 들었던 언 가슴이 있다

    햇살이 미치지 못하는 반대편
    햇빛 투사하지 못한 나뭇잎들은
    푸르뎅뎅한 얼굴로 푸시시 한 길을 만들며
    잊혀 진 사랑도 사랑이라고
    내 손을 붙잡고 마른 가슴을 더듬어 보라한다

    마른 가슴 더듬어
    채색하는 손길에
    발효되지 못한 그리움이
    하얀 소금기로 묻어나고

    가을걷이 끝난 논 가운데
    벙어리 모자 눌러 쓴 허수아비가 발뒤꿈치 살짝 들고
    미운 그리움도 그리움이라도
    살찐 참새 엉덩이를 토닥거려주는 아침

    한낮이 오기 전에
    한낮이 오기 전에 만추의 화폭에 물감을 칠해야지
    오늘 아침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어디서부터 어떤 색으로
    만추를 그려 넣을까,
    ☆★☆★☆★☆★☆★☆★☆★☆★☆★☆★☆★☆★
    《12》
    어머니의 가을

    서동안

    갓 길어 올린 아침이
    짧은 햇살 등에 업고
    자분자분 걸어가는 허리 굽은 가을날
    어머니의 하루해는 길었다

    자식들은 먹고 살길 바빠
    달포가 재우도록 소식도 없는데
    자식 챙겨줄 주머니, 주머니 채우는
    손바닥은 갈라지고 손등은 터지고
    햇살 먹은 몸은 천근만근
    수분 기 빠진 어머니는 깃털처럼 가벼워라

    가난은 철학을 낳는다고 했던가
    아따, 그랑께 말도 하지마
    돌아보면 나 산 시상이 징그럽당께
    볏짚 묶듯이 책으로 묶으면
    한 백 권을 맨들것이구만,
    ☆★☆★☆★☆★☆★☆★☆★☆★☆★☆★☆★☆★
    《13》
    옹기가 있는 풍경

    서동안

    세월의 파편 감싸 안는 거기
    산굽이 길 후렴처럼
    산국이 피었다

    바람이 꾸물대는 안개를
    산골짜기 깊고 은밀한 곳으로
    밀어 올리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꽃
    밤의 어깨를 딛고 일어서는
    도공의 눈 속에도 산국이 피었다

    천 년 전부터
    끼니를 걱정하던 때까지
    도자기가 되지 못한 옹기는
    질량의 향기란 향기는 다 받아 들여

    흙의 기억이며
    불꽃의 뜨거움이며
    겉보리 쌀 서 말에 시집 온 새댁이
    한 끼의 쌀밥을
    눈물이 나도록 맛있게 먹은 기억까지

    햇살 담은 옹기는
    굽은 등에 수북하게 내려앉는
    잿빛 같은 도공의 숨소리까지
    인생의 후렴처럼, 햇살 고운 오후
    산국에게 도란도란 말을 건네고 있었다
    ☆★☆★☆★☆★☆★☆★☆★☆★☆★☆★☆★☆★
    《14》
    인연(因緣)의 차(茶)향기

    서동안

    보낸 적 없는 세월은 가고
    흐르며 머물러 깊어지는 틈 사이
    마주친 눈빛에 걸음 멈추어 두근대는 가슴

    붉은 심지로 활활 태워 그 세월에 피는 꽃이여
    꽃으로 피었기에 무슨 소용이 닿겠느냐만
    어둠의 끝, 진흙탕 속에 저리도 고운 인연 지을까

    시들어 툭툭 떨어지는
    햇살 안고 돌아오지 못한 인연도 있겠지만
    하늘 문 열리어 첫 바람일 때
    사분사분 눈뜨는 꽃

    천 리를 은은하게 물들이는 꽃향기 따라 오세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왜냐고 묻지 마세요
    사람의 향기는
    만 리 까지 퍼진다고 하잖아요

    따가운 햇살에 수분 말라가기 전
    꽃 피는 세상 자분자분 저며 뒀다가
    서늘히 추워진 찬바람 옹두리 헤집고
    선한 인연들이 찾아오는 그 날에는
    그대 위해 마련된 연 꽃차를 끓여도 되겠지요

    ☆★☆★☆★☆★☆★☆★☆★☆★☆★☆★☆★☆★
    《15》
    호수에 빠진 푸른 달빛

    서동안

    산 마을로 돌아앉아
    이제는
    제 그림자 홀로 닦고 있는
    호수에 빠진 푸른 달빛

    밤새도록 읽고 또 익은
    가슴 미어져
    빗물에 씻겨 간
    낯선 편린 한 조각

    깨끗한 이슬로 몸을 감싸 주고
    뜻대로 안 되면 모른다고 할까봐
    종이배 띄우고 가만가만 찾아 가는
    꿈으로 엮은 그리움

    두레박 길어 올려
    물동이에 담은 사랑
    푸른 달빛 호수에 빠져
    맑은 눈망울로 이야기하는 시월의 밤

    호수에 빠진 것은
    푸른 달빛이 아닌
    내 마음이었네
    네 마음이었네.
    ☆★☆★☆★☆★☆★☆★☆★☆★☆★☆★☆★☆★
    《16》
    홍시 有感유감

    서동안

    가지 끝에 달린 감들이
    석양빛 보다, 연지곤지 찍은 새색시
    홍조 띈 얼굴보다 더 붉다

    별빛 총총한 밤
    어둠보다 무거운 눈을 감고
    할머니 무릎에 누우면
    성황당 돌무더기보다 더 많은 옛날이야기며
    오만가지 생각보다 더 맛있는 음식들이
    화수분처럼 샘솟는다

    연두 빛보다 맑은 연두 빛 감꽃이
    지상으로 추락한 아침이면
    잰걸음으로 꽃을 주워 무명실에 짓던 목걸이는
    아내의 생일에 사준 진주 목걸이보다
    훨씬 고왔다

    꽃이 지고 열매가 무르익어
    잎 새 떨 구는 저녁
    홍시 몇 개 꺼내 놓고
    내 삶의 고비마다 쓰린 눈물 닦아주던
    할머니 생각에 황급히 창문을 열었다

    그 밤들의 기억들이
    달빛에 젖어 하얗게 일어서면
    가지 끝에 홍시 두어 개 남겨 놓고
    빈 바람만 휑한 할머니의 창문을 닫는다
    ☆★☆★☆★☆★☆★☆★☆★☆★☆★☆★☆★☆★
    《17》
    홍어와 탁주

    서동안

    사는 일도 가끔은
    발효될 때가 있는 것이라

    붉은 빛을 없애고 때로는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때론 아내가 곰삭은 손끝으로 해 주는
    진하게 발효된 음식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살이 둥글지 못해
    모난 길 걸어도
    장터에서 만나지는 익숙해진 얼굴들과

    사돈의 팔촌까지
    안부를 물으며
    톡 쏘는 인생의 맛을 느끼며 소설이 현실이 되는

    막막한 세월이라도
    어느 곳에선가 만나지는 인연들
    오래 묵은 사람들과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열길 물 속 들여다보듯
    한 길 사람 마음 속 환히 들여다보며
    텁텁한 막걸리의 진국 같이

    저 심중을 꿰뚫어 보는
    순수한 마음을 거울 안에 들여 놓고
    마음의 등불을 켜고

    칼칼하게 곰삭아
    애린으로 차려 놓은 저 꽃보다 더 붉은 빛으로 남는 거기
    걸림이 없이 뻥 뚫어지는 콧속 같은 세상이기를

    * 인연(因緣)의 차(茶)향기

    보낸 적 없는 세월은 가고
    흐르며 머물러 깊어지는 틈 사이
    마주친 눈빛에 걸음 멈추어 두근대는 가슴

    붉은 심지로 활활 태워 그 세월에 피는 꽃이여
    꽃으로 피었기에 무슨 소용이 닿겠느냐만
    어둠의 끝, 진흙탕 속에 저리도 고운 인연 지을까

    시들어 툭툭 떨어지는
    햇살 안고 돌아 오지 못한 인연도 있겠지만
    하늘 문 열리어 첫 바람일 때
    사분사분 눈 뜨는 꽃

    천 리를 은은하게 물들이는 꽃향기 따라 오세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왜냐고 묻지 마세요
    사람의 향기는
    만 리 까지 퍼진다고 하잖아요

    따가운 햇살에 수분 말라가기 전
    꽃 피는 세상 자분자분 저며 뒀다가
    서늘히 추워진 찬바람 옹두리 헤집고
    선한 인연들이 찾아오는 그 날에는
    그대 위해 마련된 연꽃차를 끓여도 되겠지요


    * 꽃피는 날이라는 게

    꽃피는 날이라는 게 따로 있나요
    섬진강 매화
    낭자하게 향기 품었다는데

    두견새 목 젖는 피 한 점 받아먹고
    지천으로 붉어질 진달래꽃은
    산골바람 차가워서 하순께나 올려나

    순간의 절정에 지는 꽃처럼
    목숨도 불꽃처럼 타올라 사그라지는 것을
    한세상 사는 것이 피었다 지는 것이 아니던가

    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순간이 오는 것임에
    꽃피는 날이란 사실 정해 놓은 날이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들과 인연 닿으면 꽃피는 날이 되는 것을요

    이적 지 건네준 마음도 예삿일이 아니라고
    가슴 아파 시린 바람 끝 잡고 서니
    새벽안개 저쪽에 만삭의 몸을 푸는 하현달이 뜬다
    채우고 비우는 만고의 몸짓으로 꽃피는 날을 기다리며,

    *뜨거운 음성

    큰 나무 꼭대기 까치집이 위태롭게 흔들리면
    까치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허공에 길을 만든다
    우리 엄니
    야학에서 한글 배우듯 가갸, 거 겨 그 길을 천천히 더듬거리며
    장마에 접어 든 7월이 부연 허공을 땅 쪽으로 잡아당기고

    새들의 영역을 침범한 대가인가
    나무는 새들의 둥지를 의지대로 불러들일 수 없지만
    새들은 나무를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 듯하여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이 풍경을 읽고 있는 중이다

    새들의 일방적인 침범 의식에 관하여 성냄도 없는 듯하나
    기실 빗방울 기우는 대로 조금씩 출렁이며 바람의 부피만큼 일어서며
    땅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허공과 부드럽게 어우러지는,
    때론 고집을 피우다가 똑 부러지기도 하지만
    저 길을 닦아내는 나무의 기세가 자못 사납기도 하다

    본디 누구의 영역을 탐하려고 그런 것을 아닐 터
    필요에 의해 간절히 머리를 들어 올리다 보니
    누이는 싫고 매부는 좋은 공생의 순간들이
    사람이 사는 방향으로 조금씩 길을 밀어 놓는다

    ‘에미는 자슥을 위해 한 목심 바칠 각오가 단디 되 있능 겨’
    ‘긍께 넌 죽으라고 공부만 하면 되능 겨’
    시퍼런 불꽃이 풍문처럼 뒤척이며 맨 땅이 일어선다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리는 나무의 음성이 뜨겁다
    ‘이떼꺼정 뭘 보고 배우며 살았능 감’

    혼자 일어섰다는 뒤설렘으로 가득한 삶이
    실은 큰 나무에 의지하며 그 힘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스스로 만들어지는 일방통행의 길이 없듯이
    어머니의 음성이 오늘따라 더욱 뜨겁다

    *화개 장터에서 만난 수선화

    이역만리 낯선 땅
    화개장터 한 모퉁이
    무슨 볼일 있어 왔는지

    원색의 기쁨으로
    오후 한때를 받치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자기보다
    미운 사람이면
    자존심 상하니까

    자기보다
    예쁜 사람이
    주인 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아도취의 기쁨으로
    꽃샘바람 속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 맞추며

    숱한 인연들이 오고가는
    화개장터의 일상을
    가지런히 닦아 놓는다

    이상 5편 원고 올립니다
    수고로움 많으신 임원진님들께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서동안 올림
    ☆★☆★☆★☆★☆★☆★☆★☆★☆★☆★☆★☆★
    《18》
    화개 장터에서 만난 수선화

    서동안

    이역만리 낯선 땅
    화개장터 한 모퉁이
    무슨 볼일 있어 왔는지

    원색의 기쁨으로
    오후 한때를 받치며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유심히 관찰한다

    자기보다
    미운 사람이면
    자존심 상하니까

    자기보다
    예쁜 사람이
    주인 되기를 갈망하면서

    자아도취의 기쁨으로
    꽃샘바람 속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 맞추며

    숱한 인연들이 오고가는
    화개장터의 일상을
    가지런히 닦아 놓는다
    ☆★☆★☆★☆★☆★☆★☆★☆★☆★☆★☆★☆★
    《19》
    황촛대에

    서동안

    불붙는 너의 그림자
    하늘빛에 시들고
    논두렁에 콩잎 지거든
    마디마디 얽힌 매듭
    머리 풀어 꽃이 되었나

    떠난 님 찾으러
    눈물 고인 가슴에
    소리 없는 이슬 내리고
    정녕 들국화로 피어난
    철없는 여인이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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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복효근 시 모음 60편 김용호2014.11.10.1783300
    92 강해산 시 모음 60편 김용호2014.11.10.1630182
    91 이시영 시 모음 35편 김용호2014.11.10.1322195
    90 안현심 시 모음 21편 김용호2014.11.10.1079182
    89 신동엽 시 모음 45편 김용호2014.11.10.1678330
    88 오태인 시 모음 34편 김용호2014.11.10.1154235
    87 박경리 시 모음 70편 김용호2014.11.01.1433246
    86 이효녕 시 모음 65편 김용호2014.11.01.1076333
    85 오세영 시 모음 55편 김용호2014.11.01.1536319
    84 이정록 시 모음 27편 김용호2014.10.23.164191
    83 이은상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4.10.23.1054223
    82 정채봉 시 모음 41편 김용호2014.10.23.1674133
    81 성진명 시 모음 45편 김용호2014.10.23.1055169
    80 우덕희 시 모음 22편 김용호2014.10.23.1409136
    79 황인숙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4.10.23.1063224
    78 곽재규 시 모음 34편 김용호2014.10.23.1219193
    77 이병주 시 모음 50편 김용호2014.10.07.1106131
    76 오세철 시 모음 87편 김용호2014.10.07.1206273
    75 김동원 시 모음 79편 김용호2014.10.07.857104
    74 구연배 시 모음 36편 김용호2014.10.07.1018243
    73 김영화 시 모음 30편 김용호2014.10.07.989184
    72 선미숙 시 모음 40편 김용호2014.10.07.1025159
    71 이병율 시 모음 43편 김용호2014.10.07.1256209
    70 박현숙 시 모음 15편 김용호2014.10.07.886170
    69 이승하 시 모음 16편 김용호2014.10.07.838152
    68 김옥자 시 모음 열편 김용호2014.10.07.1000153
    67 최봄샘 시 모음 9편 김용호2014.10.07.902138
    66 김명우 시 모음 열 다섯편 김용호2014.10.07.1051244
    65 한선미 시 모음 열 한편 김용호2014.10.07.884208
    64 김예성 시 모음 55편 김용호2014.10.07.876204
    63 전병윤 시 모음 81편 김용호2014.10.07.941357
    62 김성우 시 모음 열 두 편 김용호2014.10.07.916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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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 마종기 시 모음 38편 김용호2014.10.07.1283315
    59 심성보 시 모음 20편 김용호2014.10.07.1019188
    58 박재삼 시 모음 27편 김용호2014.10.07.1236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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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강은교 시 모음 40편 김용호2006.08.09.6529724
    45 천상병 시 모음 20편 김용호2006.08.09.57595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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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신석정 시 모음 65편 김용호 2005.01.05.2347270
    22 윤동주 시모음 스무편 김용호 2004.12.29.2998230
    21 천양희 시 모음 77편 김용호 2004.12.29.2076281
    20 허영자 시 모음 18편 김용호 2004.12.29.1954256
    19 황금찬 시 모음 34편 김용호 2004.12.29.2036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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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김지하 시 모음 52편 김용호 2004.12.29.2153340
    16 박인환 시 모음 17편 김용호 2004.12.29.186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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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이해인 시 모음 28편 김용호 2004.03.12.4161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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