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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태인 시 모음 34편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4.11.10. 06:48:24   조회: 1126   추천: 233
    여명문학:

    오태인 시 모음 34편
    ☆★☆★☆★☆★☆★☆★☆★☆★☆★☆★☆★☆★
    가을꽃

    오태인

    뜨거운 사랑도
    죄가 되는 이 땅
    교단의 바깥에서
    서러워라
    다가설 수 없는 거리
    들국화 구절초는
    저리도 예쁘게 피어
    먼발치에서나
    그리운 이름들
    하나씩 불러 보면
    그만 꽃은 지고
    꽃은 지고
    ☆★☆★☆★☆★☆★☆★☆★☆★☆★☆★☆★☆★
    개구리 우는 밤

    오태인

    눈물 꾹꾹 삼키며
    이 세상 살다가
    누구나 한 번쯤
    목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

    그래그래그래그래……

    속내 꽁꽁 숨기며
    이 세상 살다가
    나도 저처럼
    가슴 열고 울고 싶은
    밤이 있다. 그럼,

    그럼그럼그럼그럼……
    ☆★☆★☆★☆★☆★☆★☆★☆★☆★☆★☆★☆★
    겨울 산사 가는 길

    오태인

    때 절은 설움 같은 건
    툴툴 먼지로 털어 버리고
    가자 겨울 산
    칡넝쿨이나 잡고 오르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세상은 한낱 굿판 같은 것일까
    막소주 댓잔에 내장
    뒤틀리는 속앓이
    꿈결에도 목이 타는 갈증으로
    됫박이나 마셔댄 새벽 냉수에
    또다시 배앓이를 해야 하는
    이 시대 우리들의 아픔은
    엄살일까 투정으로나 볼까
    망나니 칼날바람에 허리 시린 잡목
    여자는 허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단다
    소한까지 넘기고 몇 만 원 받는 월급날
    사주팔자에도 없는 연탄 몇 장사들인 죄로
    손바닥만한 온기에 누워 죽어간 누이야
    우리는 내내 이렇게 부끄러이 살아서
    씻을 수 있을까 황천 가는 개울물에
    발이나 씻을 수 있을까
    빈 맘 달래어 길을 오르면
    그대 무덤 없는 혼령을 위해
    노승의 목탁 속에는
    눈이나 내릴까
    ☆★☆★☆★☆★☆★☆★☆★☆★☆★☆★☆★☆★
    겨울산은

    오태인


    저처럼 등이 하얗게 휘어져도
    그 무게를 다 버티고서

    내색 한 번 한 적 없지만
    어찌 사는 일에 한숨 내쉴 일 없으랴

    이따금
    산새 몇 마리 정적을 흔들며 날아 오르고

    놀란
    눈가루 어지러이 흩날리는 때도 있지만

    그마저
    그의 깊은 가슴속의 일이라네

    해거름 속
    무거운 지겟짐을 지고 돌아오시던
    ☆★☆★☆★☆★☆★☆★☆★☆★☆★☆★☆★☆★
    고제에서

    오태인

    세상은 모두 잠들었다
    낮에 불던 어지러운
    황사 바람 소리 멎고
    마을 쪽에서 들려오던 헛고함 몇
    제풀에 지쳐 쓰러졌는지
    이제 잠잠하다 투기도
    이것보다 더한 투기 있겠느냐는
    고랭지 채소 그 종잡을 수 없는
    희망과 절망 또한 잠들었다
    고제여, 늘 이곳에 와서는
    들뜬 수심과 그늘로 구겨진
    오기를 보았다 높은 다리
    그 헛된 꿈과 현기증으로
    아득하게 떨어져 내리는
    끝없는 추락을 보았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던가
    헛말이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추락할 뿐이다 어쩌다 몇 푼
    요행을 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추락의
    시작일 뿐이다 그 끝없는
    추락의 악순환을 위하여
    헛된 환상의 날개를 달기 위해
    도회에서 몇 또 돌아왔다고
    하던가 그들의 꿈도 수심도
    추락도 지금은 잠들었다
    국민학교 사택 견고한
    이중창을 뚫고 어느 풀섶에서인지
    혹은 갈아엎은 무논자락에서인지
    개구리소리 밤이 깊을수록
    더욱 또렷하게 들려올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개구리처럼
    듣는 이 없는 어둠을 향해
    끝없이 목청을 돋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쩌랴
    이 봄밤 개구리 울음조차
    없던들 살아 있음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개골 개골 개골
    갸르륵 갸르륵 갸르륵
    절망으로 패대기가 쳐지고
    밭채로 쟁기날에 갈아엎어질지라도
    어제 옮겨 심은 무 배추 모종을
    영 잠들지 않게 불러 깨우고
    황사바람에 고개 꺾인 나무들
    꺾였더라도 꺾인 가지 눈이라도
    틔우게 일으켜 세워서
    또 내일 날은 밝아올 것이다
    고제, 높은 다리
    이 헛된 꿈과 수심과
    끝없는 추락 또한
    함께 밝아올
    것이다
    ☆★☆★☆★☆★☆★☆★☆★☆★☆★☆★☆★☆★
    구절초

    오태인

    사연 없이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만
    하필 마음 여린 이 시절에 어쩌자고
    구구절절 피어서 사람의 발목을 붙드느냐.
    여름내 얼마나 속끓이며
    이불자락을 흥건히 적셨길래
    마른 자국마다 눈물 꽃이 피어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치대느냐.
    꽃이나 사람이나 사는 일은
    이렇듯 다 구구절절 소금 같은 일인 걸
    아, 구절초 흩뿌려져 쓰라린 날

    독한 술 한잔 가슴에 붓고 싶은 날
    ☆★☆★☆★☆★☆★☆★☆★☆★☆★☆★☆★☆★
    그 해 긴 겨울

    오태인

    그 해 긴 겨울
    고속도로 옆 좁은
    다락방 작은 창을
    열고 그리운 나라로
    가는 차들을 세며
    희망과 절망을 세며
    아버지의 청자담배를
    참 많이 훔쳐 피웠다
    아버지의 생애를 몰래
    훔쳐 피웠다
    ☆★☆★☆★☆★☆★☆★☆★☆★☆★☆★☆★☆★


    오태인

    흘러가는 물이
    길 가던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니?
    나도 모르지.
    길 가던 내가
    흘러가는 물에게 물었다.
    어디로 갈 거니?
    나도 모르지.

    온 곳도, 갈 곳도
    모르는 것들끼리
    잠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또 길을 갔다.
    ☆★☆★☆★☆★☆★☆★☆★☆★☆★☆★☆★☆★
    길 떠나는 이를 위하여

    오태인

    뒤돌아보지 마시게.
    선 길로 쭉 걸어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더라도
    앞으로, 언덕길에서 미끄러지더라도
    앞으로, 곧장 앞만 보고 가다가
    누군가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연민도 집착도 싹둑싹둑 잘라 버리고
    앞만 보고 가다가
    어떻게 걸어 왔는가조차도
    되돌아볼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행여
    외로움이든지 그리움이든지
    사무쳐 환장이라도 들거든
    그냥 아주 잠시 무릎 세워 엎드렸다가
    그래도 곧장 일어나 앞만 보고 가다가
    때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더라도 머뭇거릴 것 없이
    앞만 보고 가다가, 마침내
    되돌아볼 미련이나
    나아갈 오기마저 스러져
    모든 길들이 환하게 사라졌을 때

    거기 먼저 온 한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네.
    혹은, 먼저 피어 있는 꽃이든지.
    ☆★☆★☆★☆★☆★☆★☆★☆★☆★☆★☆★☆★
    꽃씨를 따며

    오태인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 해 늦가을
    어둑발이 내릴 때까지 꽃씨를 따며

    이따금 마른 꽃대궁 속에서
    떠나간 이름들이 벌레소리처럼
    윙윙거리며 달려 나왔지만
    우리들은 열심히 사루비아
    맨드라미 당국화
    나팔꽃 등의 이름표가 붙은
    봉지에다 익은 꽃씨를
    가려 넣고 있었다.

    개학을 하기가 무섭게
    영이가 부산으로 전학을 가던 날
    우리는 예보된 단비 속에
    교장 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대로
    아무 차질없이 꽃모종을 옮겼었다.
    작업을 마치고
    운동장 배수로에
    모종삽을 씻으며
    돌아서 쏟아 내던 슬픔을
    우리는 서로 모르는 척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름이 다 되었을 무렵
    동성이가 훨씬 간편해진
    전학수속에 얹혀 훌쩍
    우리들 곁을 떠났을 때도
    뒤이어 화주가 인천으로
    뿌리뽑혀 갈 때에도
    우리는 입을 앙다물며 침묵했다.
    슬픔은 더욱 슬프게 안으로 닫아
    꽃씨는 익고
    성급하게 내리는 늦가을 어둑발
    씨앗의 외피처럼
    단단해진 어둠이 우리를 에워쌌고
    어둠의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어둠을
    꽃씨와 함께 밀봉하며
    봉해 지는 봉지처럼
    아무도 말이 없었다.
    ☆★☆★☆★☆★☆★☆★☆★☆★☆★☆★☆★☆★
    낙엽을 쓸며

    오태인

    한 아이가
    나무를 칵 베어삘라 한다
    또 한 아이가
    떨어질 테면 한꺼번에 떨어져라
    나무에 발길질을 한다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낙엽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는 성화
    가을 내내 아이들이 학교를 비질한다
    가을 내내 아이들이 학교를 발길질한다
    ☆★☆★☆★☆★☆★☆★☆★☆★☆★☆★☆★☆★
    내가 미조리에 가는 이유

    오태인

    지금
    누군가

    사람 때문에
    절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잊어버리는 일이
    죽는 일보다 어려우시면

    굳이 잊으려 말고
    그 사람을 사랑하면 그만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일이
    죽는 일보다 힘드시면

    그 사람을 가슴에 품고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죽기 전에 꼭
    남해 미조리에 한 번 가 보시라.

    거기 누구 한 사람
    만나게 되면,

    그리곤 죽든지, 말든지
    나는 모를 일이다.
    ☆★☆★☆★☆★☆★☆★☆★☆★☆★☆★☆★☆★
    능소화

    오태인

    누가 발목을 저리도
    모질게 붙들고 있을까.
    내 사랑은 끝내 담을 넘어
    내게 오지 못했다.

    여름내 안간힘으로
    목만 늘이다가
    눈 부릅뜬 채
    뚝뚝 떨어지고 말았다.
    ☆★☆★☆★☆★☆★☆★☆★☆★☆★☆★☆★☆★
    다솔사

    오태인

    여기는 산도 누워 있고
    부처님도 누워 있지요.
    스님의 목탁 소리도
    늘어지다 더 늘어지다가
    멈춰 버렸고, 화단의
    꽃들도 고개를 꺾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지요.
    길섶의 산비둘기도
    먹이 쪼는 일도 잊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고요.
    산나물 파는 할머니도
    파리채를 든 채
    파리와 입맞춤하며
    함께 졸고 있지요.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이
    적멸보궁 풍경을 딸랑딸랑
    흔들어보지만, 허!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요.

    다솔사에 한 번 와 보시지요.
    ☆★☆★☆★☆★☆★☆★☆★☆★☆★☆★☆★☆★
    등뒤의 사랑

    오태인

    앞만 보며 걸어왔다
    걷다가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고개를 돌리자
    저만치 걸어가는 사람의 하얀등이 보였다.
    아, 그는 내 등뒤에서
    얼마나 많은 날을 흐느껴
    울었던 것일까. 그 수척한 등줄기에
    상수리나무였는지 혹은 자작나무였는지.
    잎들의 그림자가 눈물 자국처럼 얼룩졌다.
    내가 이렇게 터무니없는 사랑을 좇아
    끝도 보이지 않는 숲길을 앞만 보며
    걸어올 때, 이따금 머리 위를 서늘하게
    덮으며 내가 좇던 사랑의 환영으로
    어른거렸던 그 어두운 그림자는
    그의 슬픔의 그늘이었을까. 때때로
    발목을 적시며 걸음을 무겁게 하던
    그것은 그의 눈물 이였을까.
    그럴 때마다 모든 숲이
    파르르 떨며 흐느끼던 그것은
    무너지는 오열이었을까

    미안하다 내 등뒤의 사랑

    끝내 내가 좇던 사랑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문득
    오던 길을 되돌아보게 되지만
    나는 달려가 차마 그대의
    등을 돌려세울 수가 없었다.
    ☆★☆★☆★☆★☆★☆★☆★☆★☆★☆★☆★☆★
    묘향산 바람방울

    오태인


    하, 바람방울이라니
    방울이 된, 바람이든지,
    바람에 흔들리는, 방울이라든지
    묘향산엔 바람방울이 있었네

    보현사 대웅전 앞마당
    8각 13층탑 옥개석 추녀마다 맺힌 바람
    방울,
    실오라기 같은 산들바람에도 운다는,

    그 이후,
    내 몸 곳곳에 도꼬마리 열매처럼 붙어와
    바람 없는 날에도 뎅 뎅 뎅
    울어대는데
    ☆★☆★☆★☆★☆★☆★☆★☆★☆★☆★☆★☆★
    미조리 가는 길

    오태인

    생애의 절반은
    멋모르고 살아왔고
    나머지 절반은
    부끄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

    벌써 몇 번째인가
    그곳에 다다르면 남는 건
    늘 허망하게 돌아오는 일뿐이었다.

    노란 유채밭 너머, 벌써부터
    남빛으로 잔잔하게 일렁이는
    앵강만, 이어 언덕길을 따라
    등나무들이 연보랏빛 꽃등을
    밝힐 것이다.

    밝힌들, 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몇 날의
    몸살 끝에 달려가 만나는 건,

    돌아오면서 주워야 할
    내 사랑의 부끄러운 잔해들뿐이었다.

    생애의 절반을
    멋모르고 사랑하며 다 보내고,
    돌아보며 가슴 칠 줄 알면서
    나는 또 오늘 미조리에 간다
    ☆★☆★☆★☆★☆★☆★☆★☆★☆★☆★☆★☆★
    백양사에서

    오태인

    백양은 없었습니다.
    희고 큰 바위산 하나
    백양사 뒤로 무심하게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지요.
    백암산이라더군요.

    비 내리는 저녁 무렵
    백양사 입구에서 비에 젖는
    어둠만 멀거니 쳐다보다
    그냥 자기로 했습니다.
    잠결에도 빗소리가 들렸습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당신의 꿈을
    몇 번이나 꾸었습니다.

    산안개가 뒤척이는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아, 그때 나는 백양사의
    백양을 보았습니다.
    눈처럼 아름다운 백양 한 마리
    백암산 중턱을 재빨리 가로질러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순간이었습니다.

    아주 잠시 내게 왔던
    백양 사라지고, 백암산엔
    보리수 잎처럼 푸른
    매미 소리만 가슴에 서늘했습니다.
    ☆★☆★☆★☆★☆★☆★☆★☆★☆★☆★☆★☆★
    비 갠 아침

    오태인

    이렇듯 맑은 구슬 하나 품으려고
    간밤에 그렇게 무릎 세워
    엎드려 우셨습니까.

    누군가의 울음이 이렇듯 눈부신
    아침을 만드는 것인 줄 몰랐습니다.

    또르릉 또르릉……

    당신의 가슴에서 구르는
    아, 투명한 실로폰 소리를 듣습니다.
    ☆★☆★☆★☆★☆★☆★☆★☆★☆★☆★☆★☆★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오태인

    하필 이 저물 녘
    긴 그림자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한 그루 나무처럼
    우두커니 서서
    사람을 그리워하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일,
    홀로 선 나무처럼
    고독한 일이다.
    제 그림자만 마냥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있는
    나무처럼 참 쓸쓸한 일이다.
    ☆★☆★☆★☆★☆★☆★☆★☆★☆★☆★☆★☆★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다

    오태인

    그 여름 내내
    기차는 하필 잠들지 못하는
    늦은 밤이나 너무 일찍
    깨어버리고야 마는 새벽녘에야
    당도해서 가슴을 밟고 지나갔다.

    사람의 가슴에도 레일이 있는 것임을
    그 해 여름 그 역 부근에 살면서,
    한 사람을 난감하게 그리워하면서
    비로소 알았다. 낮 동안 기차가 오고,
    또 지나갔는지는 모를 일이다.

    딸랑딸랑 기차의 당도를
    알리는 종소리는 늘 가슴부터
    흔들어 놓았다. 그 순간
    레일 위의 어떤 금속이나
    닳고 닳은 침목의 혈관인들
    터질 듯 긴장하지 않았으랴. 이어
    기차는 견딜 수 없는 육중한
    무게로 와서는 가슴을 철컥철컥
    밟고 어딘가로 사라져갔다.
    아주 짧게,
    그러나 그 무게가 얼마나 오래도록
    사람의 가슴을 짓눌렀는지를

    아, 기차는 모를 것이다.
    ☆★☆★☆★☆★☆★☆★☆★☆★☆★☆★☆★☆★
    산 그림자

    오태인


    산은 제 그림자를 보이지 않는다
    그 그림자를 보았다는 사람,
    구름의 그림자를 보았을 뿐이리라

    산은 제억장을 천근만근 누르는 바위벽의
    그림자에 매달린 낙랑장송 한 그루
    비틀린 그림자를 굽어보는 흰 폭포의 깊디깊은 음영
    속에 흔들리는 잔가지 많은 물푸레나누
    그림자의 발바닥을 간지르는 송사리떼의
    잠긴 그림자까지 모두
    제 가슴에 꼭꼭 묻어 두더니

    단 한번 나는 보았다
    깊은 장롱 속에 수의를 꺼내듯
    검은 그림자를 풀어놓고 넋을 잃던

    그때, 또 다른 산 하나가 무너지던 날
    ☆★☆★☆★☆★☆★☆★☆★☆★☆★☆★☆★☆★
    산수유

    오태인

    꽃,
    그늘조차 따뜻하다

    노오란 병아리
    떼 몰리듯 하교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

    뭐라 모를 쫑알거림
    알아들었는지
    까르르 자지러지는 햇살

    봄,
    길목이 환하다
    ☆★☆★☆★☆★☆★☆★☆★☆★☆★☆★☆★☆★
    상처

    오태인

    아직 필 꽃이
    남아 있으려나.

    피는 꽃도 많고
    지는 꽃도 참 많은데

    이 꽃 피었다 진자리
    상처는 다 어떡하나.

    싸움으로 받은 상처보다
    사랑으로 입은 상처가
    더 깊다는 것을 알면서

    그래도 필 꽃이
    아직 남아 있으려나.
    ☆★☆★☆★☆★☆★☆★☆★☆★☆★☆★☆★☆★
    시를 쓴다는 것

    오태인

    내 시가 사람들에게
    밥 한 톨만큼의 희망이나
    위안도 될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내 시가 사람들에게
    나무 한 그루만큼의 그늘이나
    온기도 줄 수 없는 것이라면
    참 미안한 일이다.

    이 세상에
    먼지처럼 풀풀 날아다니며
    밥을 더럽히는 시여.
    생살 찍혀 쿵쿵 넘어지는
    숲이여.

    시를 쓴다는 것,
    참 두려운 일이다.
    ☆★☆★☆★☆★☆★☆★☆★☆★☆★☆★☆★☆★
    앞으로 나란히

    오태인

    아무 생각도 없이
    선생들은 '앞으로 나란히'를 내뱉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아이들은 '앞으로 나란히'를 따라하면서
    우리들은 모두 앞으로 나란히가 되어갑니다
    앞으로 나란히가 되어
    누구에겐가 나란히 끌려가고 있습니다
    ☆★☆★☆★☆★☆★☆★☆★☆★☆★☆★☆★☆★
    역사

    오태인

    말 잃은 이 땅의 시인을 만나자
    그리고 바람이 시퍼렇게 날 세우는 영토에 서자
    다시 북소리 드높던 옛 성곽
    거룩한 피의 의미를 생각할 때다
    이 시대 우리들 진실 혹은 믿음은
    미친 칼날바람에 지느러미를 잘리우고
    내내 얌전히 잠재우던 아픈 기억들
    침묵의 강물은 그친 것이 아니라
    해일을 몰고 오기 위한 징조의 모음이다
    누웠던 풀들 일어서고
    잠들던 파도 날 세우고
    백골의 나무들 귀 열어서
    다시

    이 시대 말 잃은 시인을 만나자
    ☆★☆★☆★☆★☆★☆★☆★☆★☆★☆★☆★☆★
    오월

    오태인

    하늘엔 흰 구름
    땅 위엔 보랏빛 구름
    꽃, 자운영인가요

    햇살 질펀한 무논엔 높은음자리표를 그리는 물뱀
    한 마리, 요리조리 떼 지어 몰려다니는 새까만
    음표들의 알 수 없는 노래, 그래도 가슴은 바람든
    풀섶 마냥 마구 일렁이는데,

    어디로 가려는지
    발 없는 개구리밥은
    물 위에 동동

    누가 저리도 그리운지
    얼굴 없는 쑥국 새는
    온종일 훌쩍훌쩍
    ☆★☆★☆★☆★☆★☆★☆★☆★☆★☆★☆★☆★
    오월의 편지

    오태인

    그러기를 참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새 꽃들은 혼자 피었다 지고
    꽃 진자리엔 풀들이 돋기도 하면서
    스스로 키운 나무들이 숲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숲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늘을 보며
    그대가 참 많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가는 길은
    숲들에 가려 향방조차 알 수 없고
    그대 또한 그대가 만든 숲 속에서
    내게 오는 길이 보이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렇게
    모든 길이 가려 보이지 않을 때일수록
    가슴에 풀물 같은 그리움 뚝뚝 젖더라도

    그냥 이대로 있겠습니다.
    그냥 그대로 있으셔도 괜찮습니다
    ☆★☆★☆★☆★☆★☆★☆★☆★☆★☆★☆★☆★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오태인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숲이 눈부신 것은
    파릇파릇 새잎이 눈뜨기 때문이지
    저렇듯 언덕이 듬직한 것은
    쑥쑥 새싹들이 키 커가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도랑물이 생기를 찾는 것은
    갓 깨어난 올챙이 송사리들이
    졸래졸래 물 속에 놀고 있기 때문이지
    저렇듯 농사 집 뜨락이 따뜻한 것은
    갓 태어난 송아지 강아지들이
    올망졸망 봄볕에 몸 부비고 있기 때문이지

    다시 봄이 오고
    이렇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새잎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새싹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다시 오월이 찾아오고
    이렇게 세상이 사랑스러운 것은
    올챙이 같은, 송사리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송아지 같은, 강아지 같은 너희들이 있기 때문이지
    ☆★☆★☆★☆★☆★☆★☆★☆★☆★☆★☆★☆★
    저문 강엔

    오태인

    저무는 강에 나가
    어둠이 강물에 어떻게
    젖어드는가를 보았습니다.
    강의 가장 깊은 곳에 젖어든
    어둠은 이내 수면으로 피어오르더니
    어느 새 하늘에 자갈돌 같은
    노란 별이 깔리더군요.

    저무는 강에 나가
    그리움이 가슴에 어떻게
    스며 오는가를 느꼈습니다.
    가슴 맨 밑바닥에 스며든
    그리움은 금방 눈시울을 적셔 오더니
    어느 새 하늘에 소금 같은
    하얀 별이 흩뿌려지더군요.

    저문 강엔 온통
    별들만 반짝반짝 흐르더군요.
    ☆★☆★☆★☆★☆★☆★☆★☆★☆★☆★☆★☆★
    정동진

    오태인


    굳이 여름날엔 오전 다섯 시
    아니면 오후 여섯시쯤이 좋겠다

    아직 남아있는 햇살
    부서진 세월을 회유하든, 수작부리든
    바다의 섬뜩한 지느러미를 볼 수 있는
    그 무렵, 밀려오는 사람들에 익숙한
    애늙은이 소나무 몇, 등 굽은
    그림자를 내려 깔고 손을 벌려도
    잠시 못 본체 바다만 보자

    등뒤로 투덜투덜
    투덜거리며 기차가 몇 번 지나갈 것이다

    그새에도 시계탑의 모래는
    하얗게 시간을 쌓으며,

    어느 한 세월의 기억을 덮으며
    떨어지고, 유리상자 속에 신기루처럼
    갑작스런 누각 하나 또 세운들, 모래에서
    기다리는 고래는 끝내 오지 않으리라
    정동진,

    그 시간쯤, 마침내 바다에
    깊고 푸른 그림자를 버리고
    해변을 따라 뉘엿뉘엿 사라지고 있는 한
    사람,
    사랑이라 해도 좋겠다
    ☆★☆★☆★☆★☆★☆★☆★☆★☆★☆★☆★☆★
    제비꽃

    오태인

    허리를 굽혀야
    눈 맞출 수 있는 꽃

    무릎을 꿇어야
    손잡을 수 있는 꽃

    허리를 굽혀도
    무릎을 꿇어도

    그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손 한 번 내밀지 않는

    제비꽃
    같은 아이들
    같은
    ☆★☆★☆★☆★☆★☆★☆★☆★☆★☆★☆★☆★
    화개리 벚꽃

    오태인

    꽃이 핍니다.
    마음 두지 않겠습니다.

    꽃이 진다 한들
    마음 쓰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때아닌 폭설같이 당혹스럽게
    세상을 덮쳐 오는 꽃
    사람의 마음 또한 이렇게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을

    한때 아름다운 젊은 날
    거기 잊지 못하고 찾아올
    누군가 또 한 사람
    그러나 그 사람조차 몰래

    올해도 화개리 가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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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황인숙 시 모음 25편 김용호2014.10.23.104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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