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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카드
영국에 태동(笞童:whipping boy)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매를 맞는 아이란 뜻이다.
아무리 지체가 높은 왕자(王子)라도 교육 중에 매 맞을 일을 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하지만 왕자를 때릴 수는 없어 대신 매를 맞는 아이 하나를 정해둔다.
왕자 대신 매를 맞는 아이가 태동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매품 판다 하여 돈 받고 대신 매를 맞는 대태(代笞)제도가 있었다.
흥부가 매품 팔러 병영(兵營)에 갔다가 그나마도 빽 있는 놈에게
선을 빼앗기고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
대신하는 사람은 피눈물나는 일이지만 대신시키는 사람은 편리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 같은 대태는 옛날이야기요, 현대는 온통 대신문화(代身文化)가 판치고 있어
어떻게 가급적 최소의 노력을 들이고 최대로 대신 시키느냐가
삶의 원칙처럼 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리농업(代理農業)이 서서히 싹트고 있지만
미국은 농부가 손에 흙 하나 묻히질 않고 농사를 대신시키는
이상한 나라가 돼 있다.
종달새가 지지배배 지저귀면 씨 뿌릴 철이 됐구나 하고
씨 뿌리는 대리회사(代理會社)에 전화 한 통만 건다.
그럼 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며 씨앗을 뿌려준다.
이렇게 전화 한 통으로 거름도 주고 살충. 제초(除草)도 하며 수확에서 탈곡,
보관, 판매까지 손 하나 까딱 않고 해낸다.
편리한 것은 좋은데 대리농업의 보급률과 농부들의 우울증 발생률 및 자살률이
정확하게 비례하는 반작용 또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농사짓는다는 것은 수지타산이 전부가 아닌 까닭에 손수 농사지으면서
얻게 마련인 아기자기한 삶의 재미와 보람을 상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공장도 기계를 대여, 가동까지 시켜주는 리스회사가 대행해주고,
가스. 전기. 전화 같은 공공요금도 은행의 온라인이 대행해준다.
심부름회사가 생겨 호적초본도 대신 떼어다주고, 파티회사가 생겨
잔치도 대행해준다.
각급 학위논문도 대신 써주는 논문 대행업까지 생겨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대신 술 마셔주는 술상무(常務)가 생겨나고, 대신 아이를 낳아주는
대리모(代理母).대리부(代理父)까지 생겨났다.
데이트하기 번거로운데 대리연애를 시키고, 살기 번거로운데
남을 대신 살리고 일찍 죽어버린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는
대신문화 전성시대다.
영국왕자 매 맞는 것을 대신하는 태동이나 흥부의 매품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근간 '타임' 지에 보면 미국에서 '감정(感情)카드'라 하여 사람의
감정까지 대행해주는 감정 대행 산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한다.
예쁘장한 그림이 그려진 카드에
"지금 내 가슴은 낙서를 기다리는 백지(白紙) 같다."느니,
"내 눈에 눈물이 괴어 당신의 환영(幻影)이 익사(溺死)할 지경"이라느니
별의별 감정문구를 인쇄해서 가두에서 판단.
어느 한 회사에서만 2억 장을 팔고 있다던가.
인간의 가장 인간다운 최후의 보루인 감정까지 내가 직접 못 나타내고
틀에 박힌 상품으로 대행시킨다는 것은 인간 목석화(木石化)의
서글픈 징후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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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감정카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