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골 시인 김용호의 문학과 인생 - 그도세상 ▒ gudosesang.com

자작시 마당

아이디
암호

회원가입 암호분실

2024. 04. 19.

나를 넘어서기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59:24

시란?:

(1)

서른 살의 눈 외 4편

출처 / 현대문학 1998 년 5 월호 / 글 천양희

나를 넘어서기
시작노트

며칠 전 물가에 가서 신발을 벗었다.
그냥 신발을 벗었을 뿐인데, 나는 마치 단단한 내 껍질을 벗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동안 나는 신발조차 벗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 속에 발을 넣었다. 서늘했다. 물 속의 맨발! 맨발을 떠난 물! 그게
다름 아닌 내 풀기였다.
벗어나기였다.
맨발이 물살에 쓸렸다.
쓸린 것은 발인데 마음이 먼저 물 속에 쓸렸다.
물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물 속에 내가 빠져 있었다. 존재의 심연 같았다. 서늘했다.
날마다 거울을 본다. 거울이 물 속 같다.
거울 속의 나를 본다. 거울 속에 내가 빠져 있다.
존재의 다른 심연 같다. 서늘하다. 나는 그 빠져 있음의 서늘함을 몰두라 한다.
몰입이라 한다.
나는 그때 철저하게 혼자다. 그때 나는 침묵과 한 몸이 된다.
그것 역시 나에겐 여전히 어떤 삶이다.
그래서인지 침묵할 때마다 내 존재의 심연 속에서 까마귀떼들이 울부짖는다.
갇히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그럴 때 나는 까마귀 소리처럼 혼란스럽다.
거울 속의 나는 육체를 통해서 자신을 보려 하고, 물 속의 나는 응혈
풀기로써 자신을 보려 한다.
이 둘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그게 내 존재의 본질이다. 시
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본질의 세계, 본체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요즘 <나는 나>를 넘어서기를 시도한다.

(2)

그 시도는 초월하기이다. 그렇다면 시 쓰기 또한 그 계속적인 초월하기
또는 끊임없는 상상하기일 것이다.
이렇듯 시의 공간은 그 변위(變位)가 커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이면서 세상이 되어야 하듯이. 혼자만의 정의는 마침내
억압이 되고 만다.
그래서 삶은 참으로 어렵다. 시 잘 쓰기는 참으로 어렵다.
거문고를 앞에 두고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다. 『줄을 너무 죄니 어떻더냐.』
『끊어집니다.』『느슨하게 하면……』『음이 제대로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 공부도 그렇게 하거라.』 내가 나에게 주고 싶은 말이다.

서른 살의 눈

허공에서 소리치며
눈이 내린다
가로수들이 그걸 받으려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미 썩은 잎들은 따뜻해
추억의 길들 오래 적막하다
서른이 되면
길모퉁이 어디서나
가로등이 반짝, 켜지리라 믿었다
나는 이제
다른 길 예감할 수 없다
길바닥 하나 덮겠다고
눈발은 종일 몸 바꿔 뒤척인다
그러나 눈송이들이여
백색정토! 설국(雪國)이나 설궁(雪宮)
그건 늘 우리의 함정이었다
한번 내린 눈은
때가 되면 세상이 곧
물든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3)

사람의 길 사이로 눈발이 빠져나간다
눈발이, 눈의 발이 하늘로 들려 있다
눈은 녹고 그래서 눈에 눈물 보인다.

스스로를 부르다

나무가 있는데 생김새가 닥나무와 같으며 결이 검고 그 꽃은 사방을 비춘다
그것의 이름을 미곡(迷穀)이라 하여 차고 다니면 미혹되지 않는다.
새가 있는데, 생김새가 올빼미와 같고 머리가 희다
그 이름을 황조(黃鳥)라 하는데 그 울음이 스스로를 부른다 이것을
먹으면 질투하지 않는다

(그 울음이 스스로를 부른다고? 그 꽃이 사방을
비춘다고? 미혹되지 않는다고? 질투하지 않는다고?)

어느덧 내 눈에서 새가 울고 있군요
어느새 내 눈에서 꽃이 피어났군요.

이 시는 「山海經」을 패러디한 것임.

침묵 氏

침묵 氏는 파괴를 모른다.
파괴야말로 아름다운 나의 베아트리체라고 말한 시인이 있다.
침묵 氏는 웃는다. 침묵은 파괴의 원인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침묵 氏는 웃는다. 침묵을 깨고 싶은 망측한 망치들 도끼들. 그러나
침묵 氏는 끄떡 않는다.

(4)

누가 지금 <침묵은 금>이란 말 기억이나 할까.
누가 지금 <면벽묵언>이란 말 이해나 할까.
이제 아무도 침묵을 사랑하지 않는다. 옹호하는 자도 없다.
우울한 저녁이 다가온다.
시간은 부풀고 고요는 붐빈다. 나는 오늘 「침묵에 관하여」를 다시 읽는다.
세상이 침묵을 잘못 써버렸다.
세상이 잘못 쓴 침묵의 문장. 그때 나는 보았다.
폐허는 얼마나 고요한가. 고요는 극점이다.
극점은 또 얼마나 그윽한가. 침묵에 관하여 내 관점의 일부는 그대의 것이다.
침묵 氏. 나는 가만히 책장을 덮는다.

왁자지껄

다른 데도 아니고
머릿속에서 까마귀, 까마귀떼가
다른 때도 아니고
아침나절 내내 해질 때까지
까마귀, 까마귀 소리가
오늘은 내가 아파, 말하려다
까마귀, 까마귀 소리가
다른 것도 아니고
까마귀, 까마귀떼가
무덤도 아니고 내 머릿속에
까마귀 까마귀떼가 왁자지껄왁자지껄왁자지껄
어쩌자고 저 까마귀 까마귀떼가
어쩌자고 어쩌자고 어쩌자고.

(5)

사흘 동안

나는 꼬박 사흘을 잤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흘을 잤다
네가 아프구나, 하면서 사흘을 잤다
시간을 뜯어먹으며 사흘을 잤다
죽은 듯 산 듯 사흘을 잤다
무덤처럼 누워 사흘을 잤다

세상이 이제 나를 보탰다.

천양희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1967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마음의 수수밭」 등 다수가 있으며,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2,589자
낱말 : 615개
원고분량 : 23.7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