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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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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바벨탑, 공포의 바벨의 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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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56: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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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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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너진 바벨탑, 공포의 바벨의 도서관
출처 : 현대 문학 2002 년 1 월호 글 : 류신
1
우리 시대의 언어는 지금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격한 목소리로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일삼는 정치인들의 구린내 나는 입 속에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정확하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막강한 언론의
펜 끝에서, 원색적인 허사를 앞세워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토해내는
휘황찬란한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우리의 소중한 언어는 끊임없이 왜곡되고,
전도되고, 조작되고, 거래된다.
자본의 논리에 정복당한 오염된 언어, 부당한 현실에 상처받은 불구의 언어,
언어매춘에 의해 요설로 전락한 치욕의 언어, 순수를 잃어버린 외설의 언어,
그래서 더 이상 진실을 담지할 수 없을 만큼 마모된 언어. 한마디로 높은 고리로
인해 원금마저 완전 탕진된 언어라는 빈 동전! 최승자는 「언어가 어언」
(『문학사상』, 2001년 12월호)에서 이러한 언어에 대한 환멸과 부정적 전망을
“희망의 언어가 어언(…) 죽음의 언어가 되었다”고 요약한다.
인간들의 언어가 어언 소들의 언어가 되었다.
(2)
소들의 언어가 어언 말들의 언어가 되었다.
말들의 언어가 어언 호랑이들의 언어가 되었다.
호랑이들의 언어가 어언 고양이들의 언어가 되었다.
고양이들의 언어가 어언 새들의 언어가 되었다.
새들의 언어가 어언 나무들의 언어가 되었다.
나무들의 언어가 어언 꽃들의 언어가 되었다.
꽃들의 언어가 어언 풀들의 언어가 되었다.
희망의 언어가 어언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절망의 언어가 어언 죽음의 언어가 되었다.
언어가 어언 언어했다.
어언이 언어 어언했다.
최승자 / 「언어가 어언」 전문
아름다운 풍경묘사나 축축한 감상의 잔가지들이 철저히 벌채되어 쌀쌀맞게
건조한 진술의 뼈대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는 작품이다.
이러한 시쓰기 방식은 타락한 언어에 대한 강한 회의와 반성적 인식에서
비롯된 언어 금욕주의의 전략으로 보아야 온당할 듯싶다.
그래서 이 시의 첫인상은 “평평한 밋밋한`/`(…)`/`천편일률적인 똑같은
리듬의`/`김빠진 맥빠진`/`기진맥진한 기고만장을 잊어버린`/`이런 시”(최승자,
「이런詩」, 『문학동네』, 2001년 겨울호)처럼 차갑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각 행의 중심에 자리잡고 앉아 매우 유쾌한 지적 현기증을
유발하는 “어언”의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성급한 처사이다.
표면적으로 이 시는 희망의 언어가 절망의 언어로, 절망의 언어가 다시 죽음의
언어로 전도되는 과정을 인간의 언어가 동물들의 언어로, 동물들의 언어가 다시
식물들의 언어로 바뀌는 ‘지루한 비유’를 통해 보여주려 했던 것으로 읽힌다.
그러나 정작 이 시가 우리에게 주는 전언의 핵심은 인간들의 언어가 결국 풀들의
언어가 되었다는 결론에 깃들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시가 품은 예리한 비수는 “어언”이란 두 글자 속에 숨어 있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3)
그렇다면 도대체 “어언”에 도사리고 있는 비수의 정체는 무엇인가?
크게 세 층위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1) 시각적 층위. 이 시에서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는 부사 “어언”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덧’을 뜻하는 단순한 수사적 기능에만 머물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언”이라는 기표에는 부지불식간에 현실로 다가온 언어 타락현상에
대한 비탄과 자조의 심리가 투영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메타 언어적
의미가 겹쳐져 있다.
잘라 말하자면 “어언”은 희망의 언어가 죽음의 언어로 뒤바뀐 우리 시대의 비극
자체를 형태론적으로 환기시킨다. 즉, 언어의 ‘언’자와 ‘어’자를 슬쩍
뒤집어놓은 ‘어언’은 그 글자 모양 자체가 언어의 왜곡과 타락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키는 중요한 심미적 충격장치이다.
이렇게 볼 때 “어언”은 ‘어언(於焉)’인 동시에 ‘어언(語言)’이다. 즉,
“어언”은 장식적인 부사의 범주를 넘어서 시 전체의 주제와 문제의식을 온축한
‘상형문자’인 것이다. 위상학적(topologisch)인 측면에서 봐도 “어언”은
이 시의 중심이다. 각 행의 무게중심이자 시 전체를 관통하는 “어언”을
따라 선을 그으며 내려가 보라. “어언”의 궤적이 시의 몸을 구덥게 떠받치는
척추의 형상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중축의 마지막 마디에서 우리는 뜻밖에도 다시 “언어”라는 단어와
마주친다.
언어의 왜곡과 전도를 암시하는 “어언”의 본적이 다름아닌 “언어”였음이
밝혀지는 결정적인 대목이라 하겠다. 특히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이렇듯 혼탁해진
언어의 살풍경을 “언어”와 “어언”의 교차반복을 통해 시각적으로 극대화한다.
언어가 어언 언어했다.
어언이 언어 어언했다.
굳이 이 심드렁한 말장난(pun)의 속내를 가늠해보자면 ‘언어(言語)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언(語言)으로 뒤집혔다’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최승자의 이러한 상상력을 일컬어 ‘시각적 교란을 통한 각성의 전술’로
부르고 싶다.
(4)
2) 청각적 층위. “어언”은 자신의 앞뒤에 포진해 있는 “언어”라는 시어와
함께 묘한 음악적 흐름을 만든다.
단순한 산문적 진술 안에서 반복되는 ‘ㅓ’음은 “언어”와 “어언”의 관계를
음향적으로 재생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희망의 언어(언어)와 죽음의 언어(어언) 사이의 상징적 거리는
꽤 멀어 보인다.
하지만 시간적으로 보면 둘 사이는 멀면서도 가깝고 가까우면서도 먼 역설의
자장(磁場)권 안에 놓여 있다.
이유인즉 희망의 언어가 죽음의 언어로 전도되는 사건은 그야말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지기 때문이다.
긴 호흡으로만 느껴지던 ‘어언’의 이면에 ‘돌연’이라는 극적 전환의
계기가 잠복해 있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 테러사태를 ‘언어의 충돌’이라는 측면에서 재해석해보자.
비행기 자폭테러를 지시한 반미 성전의 영웅 빈 라덴의 말은 이슬람
과격분자들에게는 분명 희망의 언어로 각인되었을 터이지만, 그 순간 그 말은
죽음의 언어로 돌변해 미국의 심장을 관통해 폭발했다.
역으로 테러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라는 그럴듯한 명분 아래 내려진
부시의 보복공격 명령은 미국 행정부 내에서는 희망의 언어로 받아들여졌을
터이지만, 어느새 그 말은 죽음의 언어로 둔갑해 아프가니스탄 전역을
벌집 쑤시듯 헤집어놓고 말았다.
이렇듯 희망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는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절묘하게 이웃하고 있다.
둘 사이는 동일성 안에서 차이를 수태하고 단절 속에서 연속을 분만하는
기묘한 되먹임(feedback)의 관계인 것이다.
최승자는 언어의 자체에 내장된 이러한 패러독스(그래서 시인은 마지막 연에서
“언어가 되었다”는 수동태 대신 굳이 “언어했다”는 이상한 능동태를
만들지 않았을까?)를 ‘ㅓ’의 반복과 ‘ㄴ’의 배치를 통해 음악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언어가 어언 언어했다.`/`어언이 언어 어언했다.”
여기서 ‘ㅓ’의 반복이 희망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상징한다면 ‘ㄴ’의 위치는 그것이 초래할 예측불허의 결과를 뜻한다.
이렇듯 시인은 희망의 언어와 죽음의 언어, ‘언어’와 ‘어언’ 사이의
(5)
처절한 모순성을 ‘ㅓ’음과 ‘ㄴ’음의 교차반복을 통해 음악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최승자의 전략을 ‘산문을 내파(內波)하는 운문의 힘’이라 부르고
싶다(이러한 음운론적 전략은 최근 최승자의 시학을 지배하는 모티프로 보인다.
최근 발표한 「나는 사람인가 간다인가?」[『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에서도
최승자는 “사람은 행위인가 존재인가?”라는 묵직한 철학적 물음과의 씨름을
“사람이 간다인가, 간다가 사람인가`//`(……)`//`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간다가 간다 간다가 간다”는 언어유희를 통해 답하고 있다).
3)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둻)적 층위. “어언”에 내포된 의미를 골똘히
바라볼수록 동독의 멸망을 예언한 시로 널리 알려져 있는 독일 시인
요하네스 베혀(Johannes R. Becher)의 「바벨탑」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린다.
동독 건국 당시 사회주의 이념 확립에 주춧돌을 놓은 문화국 장관이자 시인인
베혀는 1957년, 그러니까 동독이 건국된 지 10년도 채 안 된 시점에서 동독의
이념이 허망하게 무너지게 되리라는 충격적인 예언을 시 속에 감춰놓았다.
「바벨탑」의 전문은 의외로 간명하다.
소문은 떠들썩하고, 진실은 침묵한다. 말씀이 단어가 된다. 의미 없이 소멸되기
위하여. 그것은 바벨탑. 무너질 때 무(無)로 붕괴되리라.
그렇다. 베혀의 시참(詩讖)은 그대로 적중했다. 알다시피 독일인들이
‘기적의 해(anno mirabili)’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1989년을 기점으로
사회주의 천년왕국을 기획하던 동독은 말 그대로 기적처럼 “무(無)”로
바스러지고 말았다. 어언, 동독은 베를린장벽의 붕괴라는 팡파르로 시작된
통일이라는 거창한 예식을 거쳐 서독사회에 합병되어버림으로써 이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재독 소설가 강유일은 얼마 전 이 시를 『한국일보』에 소개하면서 “말씀이
단어가 된다`―`. 이 암호 같은 짧은 시구가 이 시인이 예언한 동독의 멸망이다.
말씀, 즉 전쟁과 계급 없는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대한 신념에 찬 약속의 말은
건국 후 채 10년도 되지 않아 지배라는 피비린내 나는 목표를 은폐하기 위한
불순한 말, 즉 공허한 단어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주석을 덧붙여준 바 있다.
이 해석처럼 곧 좌절될 동독의 꿈을 원래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가 수백 개의
서로 다른 언어로 쪼개지는 전대미문의 비극(바벨탑 붕괴사건)에 비유하는
베혀의 번뜩이는 기지가 자못 흥미롭다.
(6)
차원은 좀 다르지만 ‘여기 지금’ 우리의 현실도 여전히 말씀이 단어로
전락한 ‘포스트 바벨탑 시대’를 겪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유토피아의 기획과 혁명적 연대의식이 사라진 텅 빈 무대에서
냉소와 환멸, 권태와 자위가 한바탕 칼춤을 벌이는 포스트모던의 시대,
‘전체는 진리다’라는 과격한 외침이 잦아들고 ‘전체는 물론 부분마저
진리일 수 없다’(아도르노)는 주장이 시나브로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해체의 시대,
오랫동안 정치ㆍ경제ㆍ사회 체제를 주도해온 이성적 합리성의 부수적 결과들이
예측 불가능해짐에 따라 우리의 삶 자체가 커다란 위험에 노출된 불확실성의
시대, 다른 사람을 팔꿈치로 밀어내야만 자신이 한 단계 올라 설 수 있는
비연대적 ‘팔꿈치 사회’, 그리고 먹성 좋은 자본과 허울 좋은 세계화를
앞세워 삶의 단자화와 ‘20대 80의 사회’의 심화를 은근히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언어에 비유하자면 “소문은 떠들썩하고,
진실은 침묵”하는 시대, 희망의 언어가 죽음의 언어가 된 소통부재의 시대를
가쁜 숨을 이어가며 견디고 있는 셈이다.
이쯤 해서 나는 “말씀이 단어가 된다”는 베혀의 암호화된 파산선고와 “언어가
어언 언어했다”는 최승자의 투박한 잠언이 포개지는 황홀한 점이지대를 꿈꾼다.
추측컨대 이러한 나의 몽상은 사랑하는 최승자 시와 함께 누워 있으면서
동시에 베혀 시를 생각하는 시읽기의 ‘허락된 불륜’ 행위에 해당될 터이다.
내가 두 텍스트를 자유롭게 오가며 낳은 ‘사생아’는 기특하게도 이런 시구를
한달음에 토해놓는다.
말씀이 돌연 단어됐다.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어언”은 “시 읽기의 복수(複數)적 즐거움”(김승희)을
선사하는 신비로운 의문부호임이 틀림없다.
“어언”은 이 시에 내장된 여러 의미의 층위를 자유롭게 소통시켜주는 시의
‘관절’인 셈이다.
그러나 “어언”에 관한 긴 설명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언”이 뜻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시인 자신도 그것의 의미를 요량할 수 없을 터이다.
그럼에도, 비록 선승들의 서릿발 같은 게송(偈頌)은 아닐지라도, “어언이 언어
어언했다”는 주문(呪文)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면
당신은 시인이 쳐놓은 덫에 이미 말려든 것이다.
(7)
나 역시 그 그물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내가 지금 실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어언이 언어 어언했다”에 악착같이 붙어 있는 ‘ㄴ’자를 모두 떼어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소이연은 여기에 있다.
어어이 어어 어어했다.
추측컨대 이 ‘이상한 악순환(circulus vitiosus)’은 무너진 바벨탑의 폐허
위에서 절망의 언어 부스러기들이 안간힘을 쓰며 내지르는 자조와 탄식의
소리 사슬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시(언어)와 세계(사물) 사이의
‘르네상스적 일체감’(미셀 푸코)이 불가능해진 시대를 사는 시인이 언어의 주검
앞에 보내는 만가(輓歌)인가? ‘초월적인 기의(transzendentales signifikat)’를
잃어버린 익명화 된 기표들의 힘겨운 신음 소리인가? 혹은 희망 없이 지속되는
삶의 절망감이 중얼거리는 독백인가, 방언인가? 아, 무너진 바벨탑아! 부디
봉황의 높은 뜻을 뱁새가 몰랐기를 바랄 따름이다.
2
장이지는 「흡혈귀의 책」(『현대문학』, 2001년 12월호)에서 으스스한 공포영화의
주인공으로 책을 내세우는 기괴한 상상력을 펼친다. 그는 근엄해만 보이는 책의
어깨 위에 인간의 영혼을 빨아먹는 무시무시한 드라큘라의 검은 망토를 걸쳐준다.
정확히 말하면 장이지는 “서편에서 퍼덕거리며 날아오는 박쥐소리”와 함께
“밤이 온갖 사악한 것들과 함께 도래”하는 “초현실적인 방” 안에 가매장된
흡혈귀-책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사람의 목에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져간다는
섬뜩한 환상의 곡예를 보여준다.
인간을 삼키고 빨아들이는 책이라는 기괴한 식인(食人)의 흡반! 시인은 사람의
자양분을 빨아먹음으로써 호화스럽게 장정된 흡혈귀-책의 그로테스크한 외관과
그 안에 씌어진 공포의 기록을 이렇게 묘사한다.
(……)
책은 나다. 당신은 나를 읽는다.
루비와 사파이어 박힌 장정, 인피(人皮)로 만든 책장,
갖가지 독으로 씌어진 흡혈귀의 역사,
(8)
“책은 나다”라는 단언에서 확연하게 전해지듯 생명을 얻은 책은 시적 자아의
분신이다.
그러나 그 생명체는 흉측하게 아름다운 흡혈귀의 모습을 띠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만약 ‘당신이 나를 읽는다’면, 다시 말해 “인피(人皮)로 만든
책장”을 열고 텍스트의 안으로 들어온다면 그곳에서 당신은 가학과 피학,
해악과 훼손이 서로 피로 뒤엉킨 그로테스크한 전장(戰場)을 목도하게 된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독서 행위를 “갖가지 독으로 씌어진 흡혈귀의 역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책읽기는 책의 입장에서 보면 “당신의 환상으로 피와 살을 얻”는
육화(肉化)의 순간이지만 당신(독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 존재가 책의
혈관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분해의 순간과 다를 바 없다.
책이 책을 말한다. 당신이 나를 비추고
내가 당신을 비추는 곳. 우리는 함께 있다.
방안에. 당신도 내 존재를 느낀다.
활자의 망토 뒤에 숨은 시신(屍身/詩神)을.
당신은 나를 읽으면서 수척해진다.
손가락은 검게 썩어 가며 눈과 혀에도
독이 번진다. 식은땀이 흐른다.
담쟁이넝쿨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불안해진다.
그렇다. 불안! 나는 당신과 함께 있다.
이 초현실적인 방. 황야도 무너진 자리에서.
1페이지에서도 2페이지에서도 그 다음 페이지에서도
나는 당신과 함께 있다.
가공할 책의 흡입력에 의해 피폐해진 정신과 쇠약해진 육신, 자신의 모든
자양분을 흡혈귀 책에 전송하려는 집요한 광기. 그리고 “담쟁이넝쿨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도 불안”해질 정도로 예민해진 초긴장. 바로 이 순간, 시인은
“나는 당신과 함께 있다”고 외친다.
책이 당신을 읽고 당신이 책을 읽는 경이로운 화합의 순간을 노래한 셈이다.
(9)
이렇게 볼 때 이 시에서 흡혈귀와 독자 사이는 가학과 피학이 숨가쁘게 교차되는
사디마조히즘적(sadomasochistisch) 관계로 위장된 행복한 삼투적교호관계로
읽힌다.
왜냐하면 이 시에서 흡혈귀의 책이 독자에게 끼치는 ‘해독(害毒)’은 독자가
책과 벌이는 치열한 ‘해독(解毒`/`解讀)’의 몸부림에 대한 역설적 비유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인은 결코 책과의 밋밋한 일방향적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책의 이빨이
자신의 영혼의 급소를 찌르고, 자신의 몸이 책의 심연 속으로 빨려들어가
서로 스며들고 갈마드는 보다 자극적이고 잔혹한 사랑을 꿈꾼다.
예컨대 “당신이 나를 비추고`/`내가 당신을 비추는 곳. 우리는 함께 있다”와
“1페이지에서도 2페이지에서도 그 다음 페이지에서도`/`나는 당신과 함께
있다”는 구절은 책과의 완전한 혼교(魂交)를 꿈꾸는 시인의 열망을 잘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초현실적인 방”에 기거하는 흡혈귀의 책은 무한한 육모방으로
이루어져 있는 보르헤르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꽂혀 있을
‘완전한 책(a total book)’, 이른바 다른 모든 책의 주해서요 완벽한 개요서인
‘책의 인간’에 대한 공포영화적 버전으로도 읽힌다.
“초현실적인 방” 안에서 때로는 쥐 떼로, 때로는 독거미 떼로, 때로는
푸른 늑대로 자유롭게 변신하는 “활자의 망토 뒤에 숨은
시신(屍身`/`詩神)”! 좀 무리한 연상일지 모르겠으나, 흡혈귀의 책은 시인에 의해
컬트영화의 문법으로 새롭게 각색된 ‘책의 인간’의 기괴한 변신체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시에서 책은 지식과 정보를 담은 활자의 집합체 그 이상임은 분명하다.
시인에게 책은 단순한 대상이 아니다.
책은 시인의 정신과 몸을 장악하려는 집요한 시혼(詩魂)의 시선이고, 목소리이고,
호흡이고, 몸이다.
바짝바짝 시인의 피를 말리는 시의 악마적(원초적) 본령, 이것이 바로 흡혈귀-책의
정체인 것이다.
너무나 매혹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이 미증유의 힘! 따라서 이 시에서 “나”가
시인이 탐독하는 책인 동시에 시인을 곤혹스럽게 응시하는 시의 유령이라면,
“당신”은 서음증(書淫症) 환자이자 시혼에 전 존재를 내던지려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시인 장이지가 숨어들어가 있었던 곳은 “나”가 아니라
“당신”이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시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자.
(10)
당신이 환상으로 이 방을 채우고 있는 동안
나는 박쥐로 변해 당신에게로 갈 것이다.
쥐 떼로, 독거미 떼로. 나는 조밀한 재난이다.
완벽한 푸른 늑대 한 마리이며 분산하는 수만 개의
단어들이다. 잉크와 독, 당신의 환상으로 피와 살을 얻은
나는 죽었으나 영원히 쇠멸하지 않는다.
오늘밤 당신은 당신을 죽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지난한 죽음에 송곳니를 가져갈 것이다.
낙엽 쓸리는 소리, 늑대의 길게 목을 빼는 울음.
들리는가? 당신의 감각은 예민해져 있다.
들리는가? 우리는 함께 있다.
시인은 흡혈귀의 책에 자신의 영혼을 내놓음으로써 앓는 자욱한 신열의 환상을
“분산하는 수만 개의/단어들”이 자신의 영혼을 나포하는 어떤 “조밀한 재난”의
필연적 귀결로 상상한다.
여기서 “조밀한 재난”이란 타성에 젖은 시인의 정신에 고문과 충격을
가함으로써 축 늘어져 있던 시정신을 발기시키는 ‘지독한 봉변’으로 읽힌다.
따라서 흡혈귀의 책은 시인에게 “오늘밤 당신은 당신을 죽여야 할 것이다”라고
당당히 명령한다.
자기 갱신과 신생의 꿈은 극단적인 자기 부정과 자해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끔찍한 전언인 셈이다.
동시에 이 말은 처절할 정도의 자기 파괴를 통해 부활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시인 자신의 비장한 의지 표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오늘밤 공포의 밀실로 끌려들어가 문자`-`드라큘라가 내리는
행복한 처형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자신을 유린하는 난폭한 시신(詩神)의 송곳니에 “지난한 죽음”을 헌납하려고
바벨의 도서관 중 가장 무시무시한 방 안에 꽂혀 있을 흡혈귀-책과의 독대를
청하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시인을 물어뜯고, 할퀴고, 찌르는 ‘뱀파이어 시혼’과의 원초적 교감을
위해서라면 옥쇄(玉碎)까지 마다하지 않겠다는 젊은 시인 장이지의 당돌한
담력, 그 ‘공포의 출사표’에 박수를 보낸다.
(11)
그러나 부디 명줄만은 보존하길. 그래서 그의 뺨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보다
짙고 단단한 시의 열매로 맺어지길. 앞으로도 늘 그의 감각이 예민해져
있기를 바란다.
‘공포의 도서관’ 모티프와 연관해서 차창룡의 재기발랄한 상상력을 따로
기억하고 싶다. 「도서관에서」(『문학동네』, 2001년 여름호)에서 차창룡은
도서관을 “계통적으로 정리된 나무의 납골당”으로, 복사실을 “지식을 태우는
연기가 스모그”처럼 퍼져 있는 모습으로, 책을 “얇은 종이관에 안치된
시체들”로, 도서관 사서를 썩고 썩은 지식의 “똥을 퍼주는 배식원”으로,
그리고 독서행위를 “시체들이 제공하는 언제나 날것인 죽은 회를 음복”하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풍자한다.
도서관 구석구석에서 풍겨나오는 답답한 엄숙주의를 한갓 우스개로 만들어
방일하게 깨부수는 그만의 독특한 냉소와 해학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러한 예기치 못한 상상력의 기습작전은 그가 도서관을 욕망의 허망함이
드러나는 공간의 메타포로 파악하는 대목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즉, 그는 도서관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헛된 지식욕이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욕망의 격전지로 읽고 있는 것이다.
남진우의 「도서관에서의 기도」에 나오는 “일용할 굶주림?`/`굶주림이라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충분하다`/`아무리 먹어치워도 질리지 않는 탐욕의
눈빛과`/`어둡게 입 벌리고 있는 머릿속의 허방`//`(…)저 글자들의 산`/`죽은
나무의 무덤”이라는 시구가 오버랩되는 차창룡의 시는 이렇게 뒷문을
닫으면서 연다.
나무의 시체를 먹고 또 먹어
나의 뱃속에 도서관만한 나무 한 그루 뿌리내릴 때까지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를 낳고
나는 나에게서 나와 나를 낳고
먼저 죽어야 할 나의 고기로 회를 쳐 먹는 시간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헛된 식욕을 위해
시간의 목탁을 두들기며 탁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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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도 서늘한 동성(同性)―페티시즘의 미학이라는 이색적인 표찰을 달아주고
싶은, 다시 말해 “한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입고” 장을 보면서 죽은
어머니의 삶을 온몸으로 ‘걸치고’ 생체험하는 이경림의 「걸친, 엄마」
(『현대시』, 2001년 11월호), 바람과 모래를 각각 “인칭과 인칭을 잇는
조용한 사슬들”로 이루어진 홑소리(모음)의 나라와 “인칭을 만들지 않는”
닿소리(자음)의 나라로 연상하는 권혁웅의 이란성 쌍둥이 시 「바람의 나라」와
「모래의 나라」(『문학과사회』, 2001년 겨울호), 우리 삶을 깔아뭉개는
폭압적인 물벼락 속에서 그 물살을 거슬러 치솟는 ‘물구나무선 물줄기’를 밀도
높은 투시력으로 잡아낸 김진경의 「폭포」(『실천문학』, 2001년 겨울호)가
나를 들리게 했음을 밝혀둔다.
특히 치열한 사고의 타작마당을 거쳐 정예화된 「폭포」의 마지막 두 연은
가슴을 친다. 비천(飛泉)의 절정으로 자욱이 솟아오르는 물안개, 하얀 포말로
장렬히 산화하는 이 수직적인 저항의 파토스를 보라. “둘레도 깊이도 없는 허공”
속으로 역류하는 “곧은 소리”(김수영 「폭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다.
정말이지 비경(秘境)이 따로 없다.
차라리 맹렬하게
쏟아져 내리고 싶다.
맹렬하게 쏟아져 내려
일어서고 싶다.
몸을 벗어던진 길들이
절벽을 거슬러 오르고
이윽고 절정에서 웅웅거리며
둘레도 깊이도 없는 허공을
하얗게 솟아오른다.
류 신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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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주요 평론으로 「변증법과
다섯 개의 바퀴―이윤기론」 「0/1의 비평에서 0/2의 비평으로」
「김춘수와 천사, 그리고 릴케」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독문과에 출강중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김용호
글자 : 11,566자
낱말 : 2,543개
원고분량 : 85.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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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0. 전체글: 72 방문수: 60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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