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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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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격월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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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5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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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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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 격월평
출처 : 현대 문학 2002 년 6 월호 글 : 류 신
1
“징그러운 발을 감추고/안 보이는 한쌍의 촉각을 세운”(이가림,
「2만 5천 볼트의 사랑」) 한 마리 기다란 지네 지하철. 그 녀석이 도심
한가운데서 지상으로 꿈틀거리며 기어올라올 때가 있다. 대개 한강을 가로지르기
위함이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땅굴을 요리조리 미끄러지듯 달리던 ‘철 지네’는 강을 건너기
위해 땅 위로 철커덕 철커덕 기어나오는 것이다.
햇빛이 쨍쨍한 날이면 지하철의 지상 나들이는 눅눅해진 음지의 근육들을 탈탈
털어 말리는 일광욕의 즐거움으로도 전이될 수 있을 터이다.
윤제림은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창작과비평』, 봄호)에서 지하철의
지상 외출에 아주 색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에게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고마운 일이다.” 왜 일까? 전문을 읽어보자.
강을 건너느라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섰을 때
말없이 앉아 있던 아줌마 하나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한다
눈 온다
옆자리 노인은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며
손가락 마디 하나가 없는 손으로
차창 밖을 가리킨다
눈 온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본다
눈 온다
만화책을 읽고 앉았던 빨간 머리 계집애가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든다
눈 온다
(2)
한강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
지하철이 가끔씩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지하철은 대도시에 새로이 출현한 무표정한 연옥이다.1) 철관(鐵棺) 속에
생매장된 채 어색한 시선을 애써 감추고 있는 익명의 승객들. 더 이상 정체성을
가진 주체로서가 아니라 은박 종이로 된 인형처럼 바스락거리는 생기 없는 사람들.
그런데 지하철이 땅 위로 기어나오는 순간 승객들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진다.
심드렁한 낯빛에 돌연 생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눈 때문이다.
사람들이 한강 위로 흩뿌려지는 하얀 눈을 보는 순간 지하철 여기저기서
“눈 온다”라는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흩어진다. 입을 꽉 다물고 앉아 있던
아줌마가 동행의 옆구리를 찌르며, 노인이 반쯤 감은 눈으로 앉아 있던 손자를
흔들어 깨우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던 젊은 남녀가 얼굴을 마주 보며,
만화책에 몰두하던 빨간 머리 여자아이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눈 온다”(안도현 시인이 타고 있었다면 “워매, 눈 오시네`/`뭔
일이다냐, 요것이 대체”[「눈 오시는 날」]라고 말했을 것이다.) 세대를 초월해
번지는 이 말은 끊어졌던 대화의 시작, 단절되었던 소통의 재기를 알리는
소중한 징후로 읽힌다.
이렇듯 시인은 사방으로 흩어지는 눈 속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치유할 수 있는 소통의 에너지가 잠복해 있음을 오롯이 깨닫는다.
“지하철이 가끔 지상으로 올라서주는 것”이 시인에게 더없이 고마운 일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윤제림의 「지하철에 눈이 내린다」는 이편과 저편을 잇는 교량,
그 다리를 통과해 한강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그리고 지상과 천상을 하나로
이어주며 온 세상을 하얗게 물들이는 함박눈이 행복하게 한데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해냄으로써 우리들이 잊고 사는 ‘인간의 고리’가
무엇인지를 가만히 되짚어보게 해준다.
눈을 읽는 윤제림의 눈망울이 미덥고 포근하다.
(3)
2
한 남자가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은 깊이 눈에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조금도 보이지 않을 뿐더러 성은 안개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는 기형도의 「숲으로 된 성벽」에 나오는 신비로운 성으로부터 초청받아
온 측량기사이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선 뒤부터는 초청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이며,
그는 마을에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을 단 한 사람도 만날 수 없다.
자신이 이곳을 방문한 이유를 증명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마을사람들은 그의 신분을 의심하고
거부하며 적대시한다.
그는 성의 변두리를 끝없이 방황하며 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다해보지만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처음 마을을 찾아올 때처럼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톱밥처럼 서걱거리고
있을 뿐이다.
원래 그는 명예와 평화 속에서 생을 영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성의 매끄러운 벽을 정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진정 싸우기 위해 이곳에 온 사람이었다. 성으로 들어가기. 그의 지고한
생의 목표는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성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대관절 이것이 싸움이었단
말이냐? 심각한 저항은 하나도 없고 (…), 그는 전투 태세를 갖추고 주위를
돌아보면서 적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투쟁의 철회는 곧 죽음이다.
그는 끈질기게 세상과 싸웠지만 결국 기진맥진해 쓰러지고 만다.
온통 하얀 눈으로 점령당한 마을 어딘가에 쓰러진 남자, 그가 바로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 소설 『성(城)』에 등장하는 K이다. 카프카의 절친한
친구 막스 브로트는 이 소설의 결말에 관해서, “카프카는 마지막 장을 쓰지
않았다. 내가 그 결말에 관해서 질문했더니,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 그(K)는 투쟁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않았지만 지나치게 피로한 나머지
죽는다. 그의 임종 자리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강조 필자)
(4)
눈이 내린다
가벼움을
치욕처럼 여기며
부 들 부 들 떨어진다
가벼움을 저지시키기 위해
바람과 맞설 무게 따위를 갖기 위해
눈은 솜털보다 못한 온 힘으로
자신을 꾹 꾹 억누르느라
온몸을 휘청댄다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데까지 나아가는
완 / 전/ 부/ 정
나는 그 불가사의한 싸움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투쟁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않지만
지나치게 피로한 나머지 죽어버리는 이른 생애를
눈이 그치고
시신(屍身)들 위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선다
심은희는 「눈」(『현대문학』, 4월호)에서 카프카가 유보해두었던
『성』의 마지막 장을 시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 시인은
“가벼움을/치욕처럼 여기며/부 들 부 들” 떨어지는 눈의 모습에서 허무로
가득 찬 환멸의 세계와 맞서 “솜털보다 못한 온 힘으로/자신을 꾹 꾹
억누르느라/온몸을 휘청”대는 처절한 실존적 고투를 상상한다 :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데까지 나아가는/완/ 전/ 부 / 정”. 여리고 약하게만 보이는
눈이 품은 세상에 대한 결연한 독기! 시인은 지리멸렬한 세상과 펼치는 눈들의
“그 불가사의한 싸움”에서 카프카의 K, 곧 “투쟁의 고삐를 결코 늦추지
(5)
않지만/지나치게 피로한 나머지 죽어버리는 이른 생애”의 단면을
갈파해낸 것이다.
그밖에도 「눈」은 가벼움과의 싸움으로 온 힘을 소진한 채 지상으로 추락한
눈송이들, 그 백색의 “시신(屍身)들 위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면까지 K의 마지막 생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시 읽는 맛을 배가시키는
부사(“부 들 부 들”, “꾹 꾹”)의 세련된 삽입과 함께 소설이 시를 부화시킨
드문 예로 이 작품을 기억하고 싶다.
눈을 읽는 심은희의 눈초리가 매섭고 치열하다.
3
쓸데없는 묘사와 수사의 곁가지들을 깔끔하게 쳐내고 사색과 명상의 운신 폭을
최대한 넓혀놓은 임선기의 「밤 눈」(『창작과비평』, 봄호)은 눈송이들이 밤하늘에
타전하는 ‘푸른’ 맥박 소리에 귀기울인다. ‘연상의 금욕주의’가 낳은
간명한 시의 전문을 읽어보자.
계단들마다에
쌓이는
흩어지는
눈송이들
어느 빈터에
앉아
눈 맞는
아이들
(6)
돌멩이들
쏟아지며
날리며
그칠 듯
그치지 않을 듯
푸른 소리들
빈터에 앉아
밤의
어둠이 듣는
마치 하늘에서 눈이 떨어지는 모습처럼 시행을 짧게 끊어 수직적으로 배열한 것이
눈에 띈다.
(수직적인 차원을 물적으로 실현해놓은 “계단”을 시의 전면에 배치해놓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각각의 행이 거의 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는 절제된
배열은 두 번씩 반복되는 각운(“는”, “들”, “며”, “듯”)과 더불어
경쾌하면서도 몽환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형식적 고려는
‘의미’보다는 ‘리듬’을 중시하려는 시인의 태도에서 비롯된 결과로 읽힌다.
만약 의미 쪽에 더 무게를 두었다면 시인은 이와 유사한 모양으로 행갈이를
했을 것이다.
계단들마다에 쌓이는 흩어지는
눈송이들
어느 빈터에 앉아 눈 맞는
(7)
아이들 돌멩이들
쏟아지며 날리며
그칠 듯 그치지 않을 듯
푸른 소리들
빈터에 앉아
밤의 어둠이 듣는
원작과 비교해볼 때 이렇게 헤쳐 모인 시(?)에서는 시인이 강조하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의 이미지와 시 전편을 타고 내리던 몽환적인 리듬감이 죽어버리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임선기의 「밤 눈」은 에즈라 파운드의 구분처럼 어휘의 무리 속에서
사고의 무도(舞蹈)가 드러나는 ‘로고포에이어(logopoeia)’보다는 시에 내재한
음악성이 의미의 방향 내지 동향을 결정하는 ‘멜로포에이어(melopoeia)’에
가깝다. 또한 「밤 눈」은 김수영의 「눈」을 떠올리게 한다 :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이 시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내리는 눈을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의 운동과 연관짓는 김상환의 상상력은
설득력이 있다.
그의 말대로 김수영은 “이 시를 통하여 무한정 담기는 시간을 재차
풀어놓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시간은 스스로를 풀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무한히
이어지는 무한정자라면, 그래서 언제나 다시의 운동 속에 있다면, 이 무한정한
다시는 자발적 밀봉과 개봉 사이의 다시인지 모른다.” 단정하기(“내린다”)와
의심하기(“내릴까”), 묶는 일과 푸는 일, 고정하는 일과 움직이는 일 사이의
교차반복, 그것이 위의 시를 통하여 개봉된 시간의 모습일 터이다.
풍요로운 시적 울림을 공명시키는 임선기의 시에서도 시간은 쌓이고 흩어지는
눈송이처럼 반복해서 스스로를 저장하고 소비한다. 물론 이런 시간은 무지속적
순간들이 논리적으로 정돈된 연속체, 즉 시계의 초침이 계속 돌아가며 가리키는
지점들의 총체를 뜻하지 않는다.
“쏟아지며//날리며//그칠 듯//그치지 않”는 밤 눈의 동선(動線)이 암시적으로
보여주듯이 그것은 우리가 흔히 세고 따질 수 있는 기계적인 시간의 연속이
(8)
아니라 인간의 의식 속에서 메아리치는 간단없는 자기 성찰의 리듬이자 진득한
자기반성의 사이클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눈과 공기가 서로 맨살을
비비며 내는 “푸른 소리들”(시각과 청각 이미지가 결합된 이 시어는
김광균의 「외인촌(外人村)」에 나오는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를
떠올리게 한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시적 몽상의 율동, 즉 이어졌다
끊어지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사유의 오우로보로스(Ouroboros)에
대한 공감각(共感覺)적 표현으로 읽힌다. 간밤에 흩날리던 수많은 생각의 편린들,
그 눈송이들이 차곡차곡 잠들어 있는 묵상의 “빈터”는 어디에 있을까.
눈을 읽는 임선기의 눈길이 처연하고 웅숭깊다.
1) 동시에 지하철은 ‘즐거운 지옥’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수라장을 방불케하는
출퇴근 시간 지하철의 살풍경을 “이 땅의 눈물겨운 살붙이들 모두가/서로
뺨을 맞대고/서로 어깨를 비벼대고/서로 밀치고/서로 부추기고/서로 껴안으며”
“너의 살결에/나의 살결이 닿고/너의 숨결에/나의 숨결이 섞이는/황홀한
세상”으로 읽고 있는 이가림의 「2만 5천 볼트의 사랑」을 보라.
류 신 1968년 인천에서 태어나 200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주요 평론으로 「변증법과 다섯 개의 바퀴―이윤기론」 「김춘수와 천사, 그리고 릴케」 「배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독문과에 출강중이며 한독문화연구소(IKDK)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5,912자
낱말 : 1,336개
원고 분량 : 47.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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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5. 전체글: 72 방문수: 608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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