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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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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감과 통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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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4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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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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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감과 통찰
출처 : 현대 문학 2002 년 7 월호 / 글 : 이혜원
1. 일상이 시가 되는 순간
시는 어느 순간에 오는가? 무엇이든 시가 될 수는 있지만 언제든지
시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곡가가 최초의 악상(樂想)을 떠올려야 곡을 붙여나갈 수 있듯 시인도
시상(詩想)이 일어야만 펜을 들 수 있다.
시는 숙고의 산물이지만 시상의 순간은 매우 짧고 직관적이다.
중국의 시론가 왕사진(王士?)은, 시라는 예술은 말로써는 전달되지 않고
묘오(妙悟)의 섬광 속에서만 터득될 수 있는 비법이라고 하여, 시에서 묘오
또는 영감(靈感)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고사(故事)를 중시하는 전통 시학과는 달리 시인의 개성과 창조력을 중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현대시의 정신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섬광과도 같이 뇌리를 스치는 이 영감의 순간은 언제, 어디서 올지 알 수 없다.
아주 쉽게 분명하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수도 있다.
그만그만한 일상의 시간 중에 영감의 순간을 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박목월 시인은 시가 안 써질 때 하염없이 걸었다고 하고, 서정주 시인은
마룻바닥을 떼굴떼굴 굴렀다고 한다.
그들에게도 시를 만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던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일상을 벗어난 새로운 경험을 통해 착상을 한다. 그들에게 여행은
접시(接詩)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영감의 순간이 종종 특별한 시간과 관련된다는 사실은, 박정만 시인처럼
죽음을 목전에 두고 신들린 듯 시를 썼던 경우에서도 단적으로 증명이 된다.
그렇지만 모든 시가 특별하고 색다른 경험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영감의 순간을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한다고 시가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왕사진이 개오(開悟)에 이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지적한 것은 그 때문이다.
즉 평소 마음을 닦아놓지 않는다면 설령 그 계기가 온다 해도 각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2)
외계에 대해 섬세하게 반응할 수 있는 감수성의 훈련은 당연히 더 자주,
또 더 용이하게 영감의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할 것이다.
항상 열려 있는 감수성은 일상의 도처에서 영감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
범상한 일상에서 시를 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특별한 감식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순간에 시의 그물에 걸려든 시상을 붙들어낸 시인은 그것을 시의 언어로
가두고 길러 하나의 피조물로 완성시킨다.
시는 어디에고 있지만 그것을 포착하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능력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좋은 시를 얻기 위해서는 영감의 순간을 붙드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의미화하는 뛰어난 통찰력이 요구된다.
영감의 순간은 단순한 묘사의 차원이 아니라 삶에 대한 통찰로 재구성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점수’의 과정은 필요불가결하다. 마음을 넓히고 공부를
쌓아놓지 않으면 좋은 시상을 얻더라도 최상의 시를 쓰기는 어렵다.
또 뛰어난 영감이란 그 속에 이미 삶에 대한 통찰의 핵심을 내포하기 마련이다.
어느 경우나 시인의 개성과 능력의 전모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돈오’와 ‘점수’는 상보적으로 상승 작용을 하는 시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일상의 순간에서 이끌어낸 시상이 흥미롭고 그것에 대한 통찰력이 돋보이는
네 편의 시를 살펴보도록 한다.
이 시들은 모두 일상의 아주 짧은 순간에 일어난 영감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행하고 있다.
영감의 순간과 그것을 재구성하는 과정들을 눈여겨볼 만하다.
2. ‘바지’와 ‘바다’
오탁번의 시 「죽음에 관하여」(『현대시학』, 6월호)는 병원에서의 특이한
체험을 배경으로 한다.
머리를 다쳐 치료를 받던 중에 “바지”를 달라는 말을 하려는데 “바지”가
자꾸만 “바다”로 발음되는 기이한 체험이 이 시를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대개의 시들이 시상을 일으키고 그것을 끌어가는 과정을 순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에 비해 이 시는 영감이 일었던 순간을 절정 부분에 놓아 극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구성의 묘미를 보여준다.
(3)
이 시의 전반부에서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 과정과 감회가 실감나게 그려진다.
속설처럼 시인은 ‘쉰아홉 고개’를 넘다가 넘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왼쪽 머리가/씀벅씀벅 쏙독새 울음을 울고/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라는
통증의 묘사에서, 여유를 부려보지만 상당히 심각한 병세를 짐작하게 한다.
하루에 링거 주사를 세 대씩 맞는 중증 환자로 설날 아침에 병실에서 떡국을
먹는 처지와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를 절박한 상황을 시인은 담담하게 진술한다.
그러면서도 “수술 받다가 내가 죽으면/눈물 흘리는 사람 참 많을까/나를
미워하던 사람도/비로소 저를 미워할까”라는 너무도 인간적인 심리상태를
진솔하게 보여준다.
후반부는 반전과 역전을 거듭하는 시상의 급격한 변화로 흥미를 더한다.
죽음을 상상할 정도로 심각했던 병세가 호전되어 두통이 가신 날 “바지 속에서
문뜩 일어서는 뿌리!”의 신비에 시인은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고 고백한다.
죽음이 삶으로 전환하는 이 감격적인 순간을 어찌 무심하게 넘겨버릴 수
있겠는가. 그는 새 생명을 얻은 듯 흥분하여 말끔히 면도를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지”는 “바다”로 뒤바뀌어 “바다 하나 주세요”,
“바다 하나요”라는 말만 되풀이되어 나온다.
언어기능을 맡은 왼쪽 뇌신경에
순식간에 오류가 일어나서
환자복 바지가
푸른 바다로 변해버렸다
아아 나는 파도에 휩쓸리는
갸울은 목숨이었다
멀쩡한 의식 속에서 “바지”가 “바다”가 되어버리는 이 기막힌 현실을
접하면서 ‘시인’인 그가 받았을 충격과 절망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그는 역시 시인답게 이 상황을 시적인 이미지로 능란하게 치환시킨다.
“바지”가 “바다”가 되어버리는 현실 앞에서 위태롭기만 한 자신의 처지를
“파도에 휩쓸리는/갸울은 목숨”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가냘픈’과 ‘기울은’을 합성한 듯한 “갸울은”이라는 신조어는 죽음의
공포 앞에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연약한 존재를 실감나게 그려보인다.
(4)
시인은 아마도 이 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을, “바지”가 “바다”로
도치되는 엉뚱한 경험을 시의 절정과 대단원에 놓음으로써 극적인
효과를 얻고 있다.
시의 첫 연에 나오는 “두통은 파도보다 높았다”라는 구절의 “파도”가
마지막 연의 “파도”와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시를 열고 닫는 것도 이 시의
치밀한 구성미를 보여준다.
시인은 “바지”가 “바다”가 되는 충격적인 경험을 재치 있게 시화함으로써
죽음 앞에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처지를 선명하게 각성시킨다.
3. 황사 속의 무덤
김승희의 「유허(遺墟)」(『현대문학』, 6월호)는 ‘황사의 아침’에 대한
인상에서 출발한다.
이제 우리의 생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황사는 이미 많은 시인들에게 어두운
시심을 불러일으켜왔다.
김승희 시인은 특유의 역동적인 상상력으로 이 황사 세상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펼쳐 보인다.
“자유는 자유로에 묶여 있고./하늘은 황사에 묶여 있다.”라는
첫 문장에서부터 이 시는 답답하고 암담한 상황을 암시한다.
시인이 황사에서 ‘무덤’의 이미지를 끌어내게 되는 동기는 자동차 위에
점점이 쌓인 황사분에 기인한다.
자욱이 황사에 뒤덮인 자동차는 “봉분” 같고 “문도 창도 없이 혼자
남겨진 바위” 같기도 하다.
그 속에서 노란 잠수함이라는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며 황사에 뒤덮인 자동차가
“노란 잠수함”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황사로 뒤덮인 머리칼을 하고 여기저기서 핸드폰을 들고 고함을 치는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광기”를 엿보고는 이 황사 세상이
“끔찍한 포경선(捕鯨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한다.
이런 비약적인 상상은 멜빌의 소설 『백경』에 나오는 에이헙 선장과 그의
선원들처럼, 무언가를 향해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는 이 황사 도시의
사람들이 보이는 집단적 광기에서 기인한다.
황사로 뒤덮인 자동차를 목격하는 데서 시작된 시인의 상상은 황사에
대한 현상적인 차원에서 벗어나 점점 내면화한다.
(5)
황사를 무릅쓰고 어딘가를 향해 질주하는 사람들을 향해 있던 시인의 눈길은
다시 자신에게 향해 “정말이지 나는 몰랐다./내 가슴 아래 이렇게도 많은
황사 무덤이 입주된 것을.”이라는 자책을 낳는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역시 “산다는 것은. 언제나. 무릅쓰고 산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도시를 가득 메운 황사는, 이미 모두의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던 “사막”을
새삼 확인시켜준 것이다.
모래 사막에서 ‘사랑’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에게 삶은 끝없이 해체되고
소멸되기만 하는 불모지일 수밖에 없다.
시 곳곳에서 모래알 같은 작은 점을 찍어 황사가루가 날리는 듯한 느낌을
시각화했던 시인은 마지막 부분에서는 “모래”와 “자유”라는 어휘의
자모를 낱낱이 해체시켜 소멸의 의미를 강조한다.
사막에서 갇혀 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무릅쓰고 살기에 급급한 삶에 있어
“자유”는 찾을 길 없다. “먼지 속에 빛나는 바람을 타고서/모래 자궁을
향하여 회오리치며 흩어져 올라간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이러한 삶의
허무한 종말을 압축해보인다. 앞에 나왔던 “봉분”의 이미지는 결국
“모래 자궁”으로 귀결된다.
여기서의 삶은 ‘자궁’이라는 태초의 자리로 돌아가지만 그것은 ‘모래’와
같은 불모지이다.
시인은 현대의 소모적인 삶이 도달하는 허망한 결론을 ‘유허(遺墟)’로서
냉철하게 규정한다.
황사의 아침에 시인이 발견한 것은 바로 거대한 내면의 사막이었던 것이다.
4. 전기밥통 우주선
너무나 익숙해서 지나쳐오던 사물이 때로는 전혀 새로운 상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서동욱의 「겨울 밤, 전기밥통」(『문학동네』, 여름호)이라는 시에서는 전기밥통이
엉뚱하게도 “우주선”과 결합한다.
이러한 상상이 가능했던 것은, 그 전기밥통이 놓인 자리가 옛 궁터에 살림을
차려놓은 집 마루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주선을 떠올리기 이전에 전기밥통은 “옛 궁터의 주춧돌”을 연상시킨다.
한밤중에 꽁꽁 얼어붙은 마루 위에 우두커니 놓여 있는 전기밥통은 주춧돌을
연상시킬 만하다.
(6)
한 가족의 식생을 담당하는 전기밥통이나 집 전체를 지탱하는 주춧돌은 삶의
저변이자 기반이라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그런데 다음 단계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 일어난다. “가까이 가보니
그 주춧돌은 수천 년 전/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선이었다”고 “이 마루가
바로/우주인들과 교류하던 그 궁터였구나”라는 것이다. 마땅히 ‘전기밥통’과
‘우주선’의 유사성이 납득할 만하게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처음 우주로 출항했을 땐 꽤나 멋졌을 붉은 색 세단/지구의 벌판에 수천 년
묻혀 있느라 플라스틱엔 흠집이 나고/Gold Star라고 쓴 로고도 아래쪽이
너덜거려”와 같은 묘사는 다소 엉뚱하지만 유쾌한 상상의 과정을 보여준다.
전기밥통의 둥근 모양과 ‘Gold Star’라는 로고에서 우주선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법도 하다.
일단 연상의 고리를 만들어낸 상상력은 이제 능동적으로 스토리를 엮어간다.
전기밥통이 우주선이라면 밥통의 단추를 누르는 것은 우주선의 출구를
여는 것과 같을 것이다. “두려움 속에서 우주선의 단추를 누르자 서서히
입구가 열리고/펄펄 끓어오르는 김이 확 얼굴을 덮쳤다”라는 비유도
공상과학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오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쯤에 이르면 상상력은 제동을 걸 수 없을 정도로 전진하기 마련이다.
아, 우주인들은 죽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말로만 듣던
지하세계의 입구로구나! 여편네와 나와 왕년의 잘난 모험가들이
얼어붙은 별의 표면에서 숨죽이고 잠자는 동안
우주인들은 새로운 모험을 찾아
지표 밑으로 내려갔구나!
‘저 밑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김이 피어오르는 우주선은 우주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고, 우주선은
이제 우주인들이 모험하고 있는 “지하세계의 입구”가 된다.
그렇다면 지하세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우주인들의 모험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힘겨운 일상에 쫓겨 숨죽이고 잠자기에 바빴던 시인은 “밥 식는 줄도 모르고
나는/펄펄 끓는 밑 없는 세계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라는 결말로
다른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표현한다.
(7)
전기밥통을 보며 주춧돌이나 우주선, 또는 지하세계의 입구를 떠올리던 시인은,
우주인에 대한 즐거운 상상에 그치지 않고 그런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힘겹게
살아가는 나날들을 되돌아본다.
그는 “나날은 힘겨운 것이라/세상의 별들은 이제 모험하길 꺼리며 잠만 잔다”는
현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꿈꾸고 모험할 줄 아는 삶을 그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다소 과장된 공상의 나래를 폈던 것도 짐짓 힘겹고 지루한 일상에서
멀찌감치 벗어나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가장 일상적인 생활 도구인 전기밥통과 가장 공상적인 사유의 산물인
우주선의 돌연한 결합은 일상의 과도한 무게에 눌려 매몰되어 있던 내면의
꿈과 욕망을 새삼스럽게 일깨운다.
5. 시가 된 가족사진
가족사진은 늘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한다. 가족사진은 가족사의 기록이며
증거이기 때문이다.
정영주의 「복원된 사진」(『문예중앙』, 여름호)은 가족사진을 바라보면서
착상을 얻은 시이다.
이 시에서는 스캐너를 이용해 가족사진을 컴퓨터로 복원시키는 과정과 가족의
내력이 흥미롭게 중첩된다.
스캐너로 오래된 가족사진을 구우면서 “천 도 이상 불가마에서나 구워질 수 있는
과거가 인공 빛 속에선 재생될 수 있을지”라는 우려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이 가족사진에 녹녹치 않은 사연이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사연이란 지난 시대 많은 가족들이 그랬듯이 어머니의 일방적인 희생과
아버지의 무책임한 방임으로 인해 어두웠던 가족사이다.
“어머니 얼굴 위로 낭자하게 난 갈라지고 터진 사진 속의 길 지울 수 있을지,
이지러진 어머니 생애 벌레처럼 파먹고 잘라내 쭉정이만 남긴 아버지
사진 속에선 유독 혼자만 행복해 보였다”는 묘사가 이 가족의 어색한 구도를
압축해 보여준다.
가족사진에서도 표나게 겉도는 아버지를 새삼 확인하면서 아버지를 향한
그간의 응어리진 감정이 터져나온다.
아버지는 지금 허울좋게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컴퓨터 앨범 안에 저장되고
있지만, “식솔이라는 된장 속에 꼭꼭 박힌 간이 든 장아찌 단단히 눌러야 깊은
(8)
맛 우러나는 목숨처럼 아버진 한 번도 같은 항아리 안에 저장돼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겨진 삶들이 단 한 번의 엔터로 복원”되는
컴퓨터의 마술을 지켜보며 시인은 내내 착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재생 주파로 바짝 달궈진 어머니, 나, 오빠, 동생, 그 찢어진 틈새로 뜨겁게
붙은 살이 핏줄로 이어지는 빛가마 복원된 사진” 속에서 여전히 “해독되지
않는 기표”로 떠 있는 아버지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가족사와 관련된 고전적인 주제를 현대적인 장면으로
새롭게 보여준다.
발상의 동기는 가족사진을 스캔하는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시인은 이 과정을
진지하면서도 재치 있게 의미화해나간다. “사진 속에서나마 한때 울타리였던
허술한 명분들이 지금에서야 컴퓨터 앨범 안에 저장된다” “전자파 불빛이
사진 속 과거를 주르르 훑고 나갈 때 탈색된 내 몸이 얼마나 진저리쳤을까”
“아버지 당신 혼자 해독되지 않는 기표로 떠 있었다
클릭할 수 없는 과거로 퉁그러진 채” 등 사진 복원의 전 과정은 예리한
자의식을 동반하고 있다.
컴퓨터 시대의 현대적인 사진 복원 과정을 묘사하면서도 시인은 뿌리깊은
가족의식을 고스란히 되살리고 있다.
역시 시는 어디에든 있지만 그것을 끌어내는 것은 전적으로 시인의 개성과
능력이라 할 만하다.
이혜원 196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교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저서로 『현대시의 욕망과 이미지』 『세기말의 꿈과 문학』 등이 있다. 현재 고려대에 출강중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7,671자
낱말 : 1,790개
원고 분량 : 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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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0. 전체글: 72 방문수: 607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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