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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느 겨울의 기억
출처 : 현대 문학 2001 년 5 월호 / 글 : 이희중
시인들이 사는 마을에는 지난 겨울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는 지난 겨울에 눈이 많이 오기도 했다. ]
평생 그렇게 많은 눈이, 그렇게 자주 내리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지난 두 달 사이 나온 문예지들의 신작시란은 온통 눈 잔치다.
지난해와 올해에 걸친 겨울에 이 땅에 눈이 매우 많이 내렸다는 사실을 후대의
기상학자들은 문예지들만 훑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인들은 물건들, 물상들, 삼라만상을 들여다보며 해탈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의 명민한 눈들이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곤 하던 그 희한한 기후를
놓칠 리가 없다.
그때 그 눈 속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오래 전부터 겨울을
남달리 좋아해 온, 남쪽의 어떤 시인은 눈이 내리는 날 바닷가의 횟집을 찾아간다.
그는 술을 마시고 싶었다고 말하지 않고 짐짓, [하늘 땅이 맞물리는
지평선에는/가고 싶은 보고 싶은 것들도/한꺼번에 맞물려 가물거릴지,/문득
그 지평선에 가고 싶었다]라며 말머리를 든다.
눈이 많이 내리면 먼 곳을 보기는 어려운 법. 지평선은 말하자면 나를 중심으로
보아 땅의 먼 끝일 텐데 하필 눈 내리는 날 지평선을 보겠다니. 그의 무모한
기도는 기필코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구나 여기말고도 이 세상에는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
보고 싶은 것들은 언제 어디서나
천지사방에 다 가물거리겠구나
문 닫는 것도 잊어버리고
눈보라가 넋 놓고 가물거린다
이 세상 천지사방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
정양, 「지평선」(『창작과비평』 봄호), 끝 부분
(2)
그는 눈 때문에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찾다가, [지평선이 가물거린다],
[보고 싶은 것은 가물거린다]라는 두 진술에서 [모든 보고 싶은 것은
지평선이다]라는 명제를 끌어내는 이상한 삼단논법을 구사한다.
그래서 [여기말고도 이 세상에는 지평선 아닌 데가 없겠구나]라고 말하게 되었다.
시인은 그래도 되며 시인이 아니더라도 눈 오는 날에는 그래도 될 법하다.
그는 시인인데, 눈까지 내리고 있다.
이제 눈[雪]조차 가물거리는 판국에, 마지막 말 [눈이 멎을 것 같지 않다]는 어둡고
흐리고 긴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가물거리는 것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다른 시인은 눈 내리는 산을 보고 있다. 그의 눈에는, 폭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는 소나무의 가지가 예삿일로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명상 속에서, 소나무는 난데없는 폭설로 수백 년의 미래가 단번에 꺾이는
낭패를 당한 참담한 식물이 아니라,
영원한 이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용맹한 선사가 된다.
땅에 내리기 전에 먼저 받으려고
지켜섰다가 끝내
무게 이기지 못하고
딱 부러지는 순간
하늘을 몸에 받는다
아무 팔이나 부러지는 것이 아니다
높고 푸른 하늘로 힘껏 들어올린 팔만 부러질 수 있다
이성선, 「부러진 팔」(『현대시학』 4월호), 중간 부분.
소나무는 [긴 팔을 내어/눈을 받]으려고 했건만, 다른 누구보다 먼저 받으려고
했건만, 너무 많이 받아 부러진다.
그 순간 눈은 [하늘을 몸에 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끔찍한 소리를 내며 찢어져 나간 소나무의 상처에는 碑銘 같은
잠언이 남는다.
(3)
다시 적어 보는 그 잠언, [아무 팔이나 부러지는 것이 아니다/높고 푸른
하늘로 힘껏 들어올린 팔만 부러질 수 있다]는 아름답고 무섭다.
그렇다면 참 많은 소나무들이 지난 겨울에는 하늘을 몸에 받았다.
그때 우리들의 팔은 어떤 자세로 있었던가. 어떤 시인은 온 거리를 덮어 버린
눈을 치우다가 지친다. [이쪽을 치우다 보면/저쪽이 불어나]는 곤란한
상황에서 [이 짓이야말로 제로에서 제로를 퍼다가/제로를 메우는 일이
아닌가]라며 화를 낸다.
그때 <바보성인, 痴聖人, 大痴聖>을 떠올린다. 진정으로 훌륭한 이들은,
시인이 앞서 품은 울화 비슷한 의문과는 달리, 이런 어리석은 짓을 오히려
즐기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더러운 질문이 바보성인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엄청난 쓰레기인 눈더미,
하늘이 우리에게
쓰레기를 치우라고 그 많은 눈을 퍼부었단 말인가?
최승호, 「바보성인에 대한 기억」(『현대시학』 3월호), 끝 부분.
오랜 세월 시적 명상을 지속해 온 이 시인의 요즘 화두는 <쓰레기>인 모양이다.
그는 최근 두 달 동안 가장 많은 시를 발표한 시인이기도 한데―스무 권의
문예지 가운데 네 권에 그의 작품이 실려 있다―이 시와 같은 지면에 발표한
「검은 고양이」와 「내쫓겼으나 밤의 한구석에 붙어 있는 것」
(『창작과비평』 봄호) 등의 작품에서 그의 새 화두, <쓰레기>를 만날 수 있다.
눈을 퍼부은 하늘의 뜻이 <쓰레기를 치우라>는 것이었다면, 이 과업은
우리의 죄과이거나, 깨달음의 권고일 것이다. 남들이 땀흘려 눈을 치운 후
그 길을 걷는 자는 누구인가.
또 다른 시인은 한밤 빠르게 달리는 차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눈을 본다.
그에게 눈이 [바람의 알], [허공을 떠돌다가 너무 오랫동안 부화된, 그 속에서
늙어 버린 알들]로 보이는 이유는 차 안에 같이 타고 있는 사연 깊은 피붙이,
곧 어머니 때문이다.
어두운 바깥 덕분에 그는 유리 너머 밖의 눈과 유리에 비친 안의 자신을
함께 볼 수 있다.
(4)
(…) 알속에 스민 붉은 눈 핏발 선 알속의 눈알 수많은 내 눈알들이 공중을
들어 올리고 있어요 저건 백말떼야, 하늘에 오르려다 웅덩이에 빠진 니 할미야,
아직도 거꾸로 처박혀 머리 풀고 우는 내 어미야, 차창 밖을 향해 옹알이를
하는 어린 어머니 (…)
이영주, 「겨울밤, 눈발」(『현대시』 4월호), 중간 부분.
언제부턴가 여성 시인들은 자주 어머니, 할머니를 모시고 다닌다.
어쨌든 인용한 부분 다음에도 [야산 아래 홀로 남아 적막에 구멍을 내듯
조심조심 밭을 갈던 어머니], [너무 오래 씨앗을 심던 어머니], [자라기 전에 흙을
덮고 다시 씨앗을 심던 어머니], [뒷좌석에 둥글게 부푼 알처럼 앉아 바람을
가만가만 다스리던 어머니]를 잇달아 보여 준다.
어머니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눈송이들에서 [충혈된 눈알]을 본다.
이는 바로 자신의 <눈알>이다. 그에게 눈[雪]도 알이고, 눈[眼]도 알이다.
이 시인도 이즈음 많은 시를 발표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작업」
「이 도시의 동굴」(『문예중앙』 봄호), 「집 앞의 나무를 잘라낸 사내」
(『문학동네』 봄호) 등의 작품들에는 따로 언급할 만한 성취와 개성이 뚜렷하다.
이들 작품에는 예사롭지 않은 기세가 있다.
다른 젊은 시인은 장바닥에서 눈을 맞고 있다. 그가 왜, 어느 시각에 재래시장
한 쪽에서 <묽은 죽>을 마시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묽은 죽을 마시며
김밥을 바라본다.
눈 내리는 수유 중앙 시장
가게마다 흰 김이 피어오르고
묽은 죽을 마시다 보았지, 김밥을 말다가
문득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
끈적이는 생애의 竹簡과
그 위에 찍힌 밥알 같은 방점들을,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家系를
장만호, 「김밥 마는 여자」(『현대문학』 4월호), 앞 부분.
그는, [김밥을 말다가] [김발에 묻은 밥알을 떼어먹는 여자]를 보고, 서지학적
상상력을 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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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상력은 한동안 적지 않은 시인들이 애용하던 것으로, 큰 성취를
이루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지만 어휘, 문자, 활자, 문장부호, 서책 등을 둘러싼,
이른바 <먹물>들에게 친숙한 세상을 드러내어 꽤 재미가 있었다.
그는 김밥을 <죽간>으로, 밥알을 <방점>으로 변환한 후, 김밥을 <뗏목>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런, [저렇게 작은 뗏목이 싣고 나르는 어떤 家系]라니. 나는 비유로 시가
결판난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결단코 아니지만 이 비유의 길은 높이가 있다.
인용하지 않은 뒷부분에도 또 하나 있다.
[색색의 야채들을 밥알의 끈기로 붙들어 놓고/붓꽃 같은 손이 열릴 때마다
필사되는/검은 두루마리]라고, 막 만들어지는 김밥을 빗댔다.
여기서 서지학적 상상력의 한 꼭대기를 나는 만난다.
김밥이 그런 것인가, 필사되는 검은 두루마리. 그럼 그걸 먹는 일은 무엇인가.
하얀 눈과 검은 김밥, 자신이 마시는 묽은 죽과 저 김 속의 단단한 밥알의
대조까지 시인이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외에도 많은 좋은 시를 읽었다. 새로운 빛을 발하는 임영조, 송수권
(『21세기문학』 봄호 외), 이재무(『문학동네』 봄호), 이상희(『세계의문학』
봄호 외), 장옥관, 박형준의 시편들(이상 『작가세계』 봄호), 여전히 넉넉하고
따뜻한 고진하의 시편들(『현대시학』 4월호 외), 더 넓어지고 깊어진
최정례(『시안』 봄호), 강윤후의 시편들(『현대시』 3월호),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착시킨 유승도의 시편들(『작가』 봄호 외),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눈길을 자랑하는 김은경의 시편들(『실천문학』 봄호), 그리고 이상스럽게
선정적인, 그러나 꼭 그것만은 아닌 김록의 「관능 속에서의 멈춤」(『포에지』
겨울호) 등을 따로 기억해 둔다.
이희중 1960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고,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7년 『광주일보』,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으며,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었다. 현재 전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시집으로 『푸른 비상구』, 평론집으로 『기억의 지도』가 있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4,595자
낱말 : 1,096개
원고 분량 : 3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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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어느 겨울의 기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