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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19.

유쾌한 생리의 시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39:12

시란?:

(1)

유쾌한 생리의 시

출처 : 현대 문학 2000 년 1 월호/ 글 : 이승하

생리의 사전적 의미는 <생명체의 생명 활동과 관련되는 여러 현상,
또는 그 원리>이다.
흔히 생리대며 생리일이며 생리휴가 같은 낱말의 일부로써 쓰이고 있지만
나는 그저 <생명의 이치>나 <생명의 원리>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
생명체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들을 생각해본다.
그는 생애 몇 할의 시간 동안 잠을 잘 것이며, 음식물 섭취와 배설에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음식물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체가 인간이라면 종족 유지와 성적 쾌락이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닌 섹스에도 상당한 시간을 쓰게 될 것이다.
이런 것은 생명의 이치나 원리이므로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세계에서는 생리를 왜곡되게 표현하거나 생리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 드는 무리가 있다.
1999년 전반기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한 O양 비디오 제작 및 유통 사건은
인간의 생리인 <성>을 이용하여 돈을 벌어보려는 자의 치졸한 범죄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다.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음란물은 가히 노아의 홍수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 세계에서 성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리가 아니다.
생리와 별 상관이 없는 각종 인공의 장치들이 우리의 호주머니를 노리면서
<더 자극적인 것>, <더 변태적인 것>을 보라고, 아니 해보라고 충동질하고 있다.
그것들은 은밀하고 음습하며, 불건강하고 폭력적이다.
이런 바이러스 같은 존재들과 싸움을 할 사람은 누구인가. 시인이 새로운
세기에도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있다면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의 생리>를
못하게 하는 자들(그들 중의 일부가 마약 제조업자와 포르노 생산업자들일 듯)에
대해 거부의 몸짓을 해 보이는 데 있지 않을까.
성찬경의 시 「똥」(『시안』 겨울호)은 본문이 단 한 자도 없다.
둘째 페이지의 하단에 괄호가 나오고, 그 속에 몇 행의 설명이 전개된 뒤에 괄호가
닫힌다.

(2)

한 행을 뗀 뒤 각주가 하나 나오는 것이 시의 전부이다. 성찬경은 언제부터인가
단 한 글자로 쓴 자신의 시에 <일자시(一字詩)> 혹은 <절대시(絶對詩)>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 「똥」은 일자시가 아니다.
제목이 한 자이고 본문이 아예 없지만 괄호와 각주를 동원해 자신의 시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란 무엇인가.

굵고 긴 똥자루 하나가 (사윗감으로 최고다) 뚝 떨어진다. 똥은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누군가 똥을 눈다. 그 똥은 염소 똥처럼 동글동글하지도 않고 돼지 똥처럼
퍽하지도 않다.
굵고 길어 흡사 자루처럼 생긴 똥이 땅에 뚝 떨어져서 땅과 <울림의 맥>이 통한다. 딴딴하지도 묽지도 않은 똥 한 덩어리가 땅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시인은
이렇게 맥이 통한다는 의미심장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는 괄호 속에 나오는 또 하나의 괄호 속 글자, 바로
사윗감으로 최고라는 일종의 경탄이다. 똥의 모양이 아주 그럴듯해 사윗감으로
쳐도 최고라는 뜻으로 쓴 것이겠지만 뭐든지 잘 먹고 잘 소화하여 잘 배설하는
일에 대한 시인의 바람이 이 괄호 속 괄호에는 또한 들어 있다.
똥을 제목으로 쓰고서 본문 제시를 하지 않은 것을 두고 똥을 공(空)으로
보거나 우주로 보거나 생명체 최후(혹은 사후)의 모습으로 보거나 그것은
독자의 자유일 것이다.
하지만 1974년작 「公害時代와 詩人」부터 시작된 성찬경의 작업에 관심을
가져온 독자라면 자연스런 생리에 대한 예찬과 자연스럽지 못한 생리에 대한
거부감을 이 시의 텅 빈 본문으로부터 유추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물권(物權) 말살 시대를 통렬히 비판하고 우주율(宇宙律)의 시학을 전개해온
성찬경의 작업에 이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나로서는 「똥」의 생리가
아주 마음에 든다.
된똥도 물똥도 아닌 굵고 길게 잘생긴 똥에 대한 은근한 기림이 유쾌하다.
변비와 설사의 시대, 똥만 잘 싸도 살맛 나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3)

또 한 편의 유쾌한 생리의 시는 오세영의 「情事」(『현대시학』 11월호)이다.
어느 글에서 나는 오세영을 <장고(長考)로 선택한 언어를 바둑돌을 놓듯
행간마다 신중하게 배치하여>, <정신의 집중력과 영혼의 염결성을 띤 서정시의
본래 모습을 지켰던 것이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러던 시인이 이순(耳順)의 나이로 다가가면서 오히려 더욱 젊은 시를 쓰고 있다.
연전에 낸 날카로운 현실 풍자, 문명 비판 시집 『아메리카 시편』도 그러했지만
이번에 읽게 된 시는 발정기가 따로 없는 인간의 대표적인 생리인 섹스 그 자체를
다룬 시라 젊은이의 열정을 십분 느끼게 된다.
일단 시인은 인간이 성교할 때 내는 소리를 제1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打樂音인지도 몰라
두드려서 울려내는 신음소리,
絃樂音인지도 몰라
간질여서 울려내는 웃음소리,
管樂音인지도 몰라
성대에서 떨려나는 목소리.

고전소설 「춘향전」이나 판소리계 소설 「변강쇠가」가 곧바로 연상될 정도의
짙은 정사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신문 연재소설이라면 그런 장면을 여러 날에 걸쳐 묘사하겠지만 시인은
그 대신 (사람의 몸을) <두드려서 울려내는 신음소리>와 <간질여서 울려내는
웃음소리>, 그리고 <성대에서 떨려나는 목소리> 이 세 가지 목소리가 각각
타악음·현악음·관악음일지 모른다면서 우스꽝스런 음담패설을 한다.
그런 연후 <누구의 악기인가/인간의 日常은 소나타이지만/神은 가끔 교향악을
듣고 싶다.>라는 제2연으로 가서 <인간의 일상：소나타<神이 듣고자 하는
곡：교향악>이라는 공식을 제시한다.
<소나타<교향악>으로서, 대다수의 교향악은 소나타의 형식을 취하지만 시인은
교향악을 소나타보다 웅장한 것으로 본 모양이다.
아니면 소나타보다는 교향악을 화음이 더욱 잘 이루어진 연주로 본 양이다.
신이 듣고자 하는 교향악의 실체는 바로 이어지는 제3연과 제4연이다.

(4)

이별이라든가 혹은 사랑이라든가
모든 운명적인 것이여,

오랜 기다림 끝에 맨몸이 하나로 어우러
웃음과 울음과 신음이 범벅된
한밤의
情事.

한자의 좋을 호(好)자는 여자와 아들이 만나면 서로 좋아하게 된다는 뜻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남녀가 만나야 일의 실마리가 풀리고 역사가 이루어진다.
사랑과 이별을 포함한 모든 운명적인 일은 남녀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의 한 과정에 정사가 있다.
그런데 <오랜 기다림 끝에 맨몸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웃음과 울음과 신음이
범벅된> 소리를 낸다면? 그 합환(合歡)의 시간에 두 사람이 얼마나 멋진
화음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고 시인은 생각하고 이 시를 쓴 것이리라.
신이 듣고자 한 곡…… 교향악은 바로 이때 나는 소리가 아닐까, 하고
시인은 또 생각하고서 이 시를 쓴 것이리라.
나는 정사를 이런 식으로 멋들어지게 묘사한 시를 현대시에서는
아직 읽은 적이 없다.
영화마다 넘쳐나는 정사 신을 떠올려보라. 불륜이 아니면 변태요, 강간이
아니면 윤간이 아니던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의
각종 장면이 인터넷을 통해 안방까지 파고들 때, 시인이 이렇게 오랜 기다림 끝
정사의 교향악을 들려주어 독자는 문득 유쾌해진다.
고려 가요에 음탕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하여 낮추어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부른 것은 조선조 초기의 양반들이었다.
하지만 「서경별곡」「쌍화점」「이상곡」「만전춘」 등은 우리의 훌륭한
고전 문학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억압된 남녀 관계에 대한 해방의 꿈을 담았다기보다는 인간다운
삶이 상실된 상황에 대해 애달파하는 것이 보다 큰 주제이다. 생리를 가로막는
온갖 제도와 법도에 대한 항의의 정신이 담겨 있는 작품들인 것이다.

(5)

그래서 「情事」는 젊은 시이면서 동시에 고전적인 작품이다.
성 담론의 공론화를 외친 대학 교수와 탤런트도 있었는데 그들의 담론은
지나치게 새된 목소리였다.
비해 오 시인의 이런 생리에 관련된 음담은 보다 건강하고 건전하다.
그래서 유쾌한 것일까.
40대 시인의 시 가운데에도 유쾌한 생리의 시가 있다.
1957년생 이중기 시인의 「참 환한 세상」(『창작과비평』 겨울호). 이 시는
소리판에서 판소리 가락을 뽑고 있는 늙은 소리꾼의 파안대소를 연상하면서
읽어야 한다.

파꽃 한번 오지게 둥둥둥둥 피어난다
거두절미하고 사내의 힘찬 자지 같다

단돈 만 원도 안 되는 원수 같은 것들이
근육질로 불끈불끈 치솟는 풍경을 흘겨보던
등 굽은 늙은이 입술 묘하게 비틀며 웃는다
빗장거리로 달려들어 북소리 물고
둥둥둥둥, 북소리 물고 달려가는
저 수여리, 수여리들의 환호작약에
늙은이는 왈칵, 그리움도 치살려본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시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사내의 힘찬 자지 같은 파꽃이 왜 오지게 둥둥둥둥 피어나는지 알 수 없고,
<단돈 만 원도 안 되는 원수 같은 것들>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다.
<빗장거리>와 <수여리> 같은 순우리말이 갖고 있는 뜻도 여기서는
잘 연결되지 않는다.
제3연을 읽고 난 뒤 앞부분의 뜻을 다시 음미해보자.

내 아직 펼칠 뜻 없는 긴 아니리
시간이 마음을 압도하는 벼룻길일지라도
북소리로 팽팽하게 펼쳐 보일 수 있으리
화살 되어 궁궁궁궁 달려갈 수 있으리

(6)

<아니리>는 판소리에서 연기자가 창을 하다가 중간중간에 엮어나가는 사설이다.
즉 앞서 말한 <소리판에서 판소리 가락을 뽑고 있는 늙은 소리꾼>을 묘사한
시임을 알게 하는 것이 제3연의 1행이다.
소리꾼은 만 원도 채 안 되는 돈을 내고 구경하러 온 젊은것들을 굽어보며
입술을 묘하게 비틀며 웃는다. 부럽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한 것이다.
꿀벌의 암컷을 가리켜 수여리라고 하니 피어난 파꽃은 당연히 남자이다.
제2연에 빗장거리로 달려들어 북소리 무는 사내와 북소리 물고 달려가는
수여리들의 환호작약이 나오므로 판소리를 듣고서 박수갈채를 하는 뭇 구경꾼을
연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밤의 향연을 연상할 수 있으며, <늙은이는 왈칵, 그리움도
치살려본다>에서 가버린 젊음을 아쉬워하는 소리꾼의 심리도 유추해볼 수 있다.
아무튼 저승꽃 만발한 늙은 소리꾼은 <서러운 절창>이지만 환하게 웃으면서
노래한다.
자신의 생리에 대한 체념이 서러운 절창을 낳는다. 비록 북소리로는 팽팽하게
펼쳐 보일 수 있고 (마음으로는) 화살이 되어 달려갈 수도 있지만 생리는 이미
그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욕망의 수사를 생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꽃이 피워내는 법구경보다
참 노골적으로
욕망의 수사를 생략하며
무궁무궁 피어나는 파꽃의 절경에 젖은
저 늙은이 파안!
저승꽃 만발한 서러운 절창!

세상 참 환하다

세상 참 환해서 유쾌하다. 비아그라를 사먹으며 회춘을 꾀하는 이가 많다고 한다.
정력제라면 물불을 안 가리는 이 땅의 아저씨들은 생리, 그 생명의 순리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의 이치, 생명의 원리를 따르며 사는 것도 참 유쾌한 일이 아니리.

(7)

이승하 196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
『폭력과 광기의 나날』『생명에서 물건으로』 등이, 평론집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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