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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6.

이념의 소용돌이 속의 80년대 비평문학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20:16

시란?:

(1)

이념의 소용돌이 속의 80년대 비평문학

출처 : 문학과 창작 2002/04/03

80년대는 그 초두부터 지식인들의 낙관주의를 여지없이 배반한 시대였다.
그러기에 우리의 비평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엄숙한 이념으로 무장될 숙명을 안고 80년대를 시작했다.
80년대의 전반기는 이 땅에 헐벗은 사실들만 나뒹굴 뿐 상상력에 입각한 구조가 자리잡을
겨를이 없는 시대였다.
그리하여 상상력에 바탕을 둔 픽션보다는 12쪾12 사태 이후 군사정권이 성립하게 된 배경을 유추하게
하는 논픽션이 온 국민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따라서 본격적인 문학잡지보다는 정치적인 야사(野史)
위주의 시사잡지가 그 어느 때보다도 판매 부수를 신장시킨 시기였다.
그러나 85년 2월 총선을 계기로 그동안 벙어리 냉가슴이었던 저항과 비판은 마침내 창당된 지 며칠안 된
야당의 의석을 예상외로 늘려주는 결과로 응집되었다.
중산층의 비판의식이 이때처럼 뚜렷한 정치적
현상으로 수렴된 적도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 기회주의적이지만 정치적 격변기에는 의외로 개혁적일 수 있는 중산층의 이중성이 마침내는
사회학에서 한상진(韓相震) 교수에 의해 ‘중산층의 사회학’으로 표현된 것도 이때의 현상과
87년 6쪾10 항쟁의 현상을 제대로 관찰한 데서 나온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처럼 응집되어 대통령 직선제까지 쟁취해낸 중산층의 비판의식이 양 김씨의 아집과
경쟁으로 유실되자, 개혁의 주체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80년대 후반 주로 학생운동에 의해 엉뚱한
방향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2)

즉 70년대의 민중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애정과 신뢰를 걸었던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의
지역이 여전히 여당 국회의원들을 배출시키는 아성이라는 정치적 현상을 외면하고 이러한 계층만을
변혁의 주체로 상정할 때, 그러한 운동 논리는 필연적으로 현상과 이념 사이의 이율배반을 낳게 마련이다.
운동 논리가 불을 지른 통일 논의가 많은 국민적 공감을 얻은 반면에 노조의 활성화에서는 그토록 많은
험로를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율배반의 단적인 결과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또한 중국 혁명을 일으킨 모택동이 아무리 지식인을 혐오한 나머지 혁명의 대열에서
제외시킨 역사적 전례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만년에 다시 일으킨 문화혁명이 중국의 문화와 경제에 끼친
황폐화를 염두에 둔다면, 지식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체제에 이바지하지 않는 한, 지식 자체가 사회 변혁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고는 오늘날의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더더구나 현상에서 멀어진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최근 민중론자들이 애용하는 소위 기층민 출신의 서경원 의원이 김일성을 만나고 왔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은 뒤로 미루더라도, 그가 국회에서 한 발언이라는 게 고작 남북간의 종자와 한우를
교환하자는 한가한 진단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그토록 공들여
구축해 놓은 정치술을 무효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소박함이 숭상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하면 70년대 초에 김지하 시인이 「풍자냐 자살이냐」에서 개진한 민중에 대한 애정은 훨씬
직관적이고 시적이었다. 즉 그에 의하면 민중은 우매성 속물성 비겁성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지님과 동시에
지혜롭고 무궁한 힘과 대담성과 같은 긍정적 요소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적 직관은 80년 출옥 이후에 생명 사상과 해원(解寃) 사상으로 표현됨으로써 운동 논리에서
구닥다리 취급을 받는 결과를 빚게 되었지만, 세계의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양(陽)의 상상력이
아니라 여성적인 부드러움으로 감싸고 포괄하자는 그의 음(陰)의 상상력의 이론, 혹은 구만리 장천을
중음신(中陰身)으로 떠돌고 있는 호곡 소리로 민중을 파악하는 그의 시점 등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적이고 대승적인 시정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분석과 분화로만 치달아온 이제까지의 서양문화가 ‘죽임’의 문화이며 ‘양개벽’(陽開闢)의
문화였다는 그 나름의 진단은 계층간 지역간의 이해관계에서 갈갈이 찢기는 분화의 단계로만 치닫는
우리 민족의 오늘의 현상에 대해서도 동양 고유의 음양의 조화를 적극적인 처방으로서 제시해 주는
종합적인 상상력이 아닐 수 없다.
창조적 직관만이 고유하게 지닐 수 있는 이러한 종합적인 상상력은 작가 이문열의 최근작 『변경』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즉 그는 계급독단도 따지고 보면 부정적인 미국 문화의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제국주의로서의 소련 문화의 부정적 측면임을 그의 작중인물의 입을
통해서 일깨우고 있다.
이러한 각성은 노동 현실의 개혁이라는 꿈을 잃지 않고 있는 비평가 홍정선으로부터 ‘모름지기 무엇을

(3)

안다는 것은 무모한 선택의 문제점을 아는 것과 일치하는 법이다.
필자는 모르기 때문에 용감해질 수 있기보다는 알기 때문에 비겁해지는 쪽을 오히려 택하고 싶다.
그것이 만약의 경우에 힘들게 살아가는 민중들에게 입힐 피해의 가능성이 오히려 적기 때문이다’라는
성실한 진술을 듣게 해준다.
그러고 보면 오로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열정을 하나의 도그마로서 변질시키고
있는 최근의 혁명 논리나 계급 논리는 바로 그 열정 때문에 자명한 현상을 왜곡할 수 있다는 중립적인
우려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유아적인 단순 비교의 산물이라는 혐의를 뿌리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즉 미국과 소련, 군사독재와 김일성 독재, 자본가와 노동자 등의 단순 비교의 조합들에서 후자를
신비화하고 우상화하는 논리야말로 어린아이에게 엄마와 아빠 중에서 누가 좋으냐고 추근대는 어른들의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철없는 여대생을 이념의 사탕발림으로 유괴하다시피한 최근의 북한의 작태는 따지고 보면 유괴범의
유치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됐든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반독재 투쟁에 있어서 민중문학론은 가장 효과적인 결속의
기미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므로 최근에도 크게는 통일 논의로부터 작게는 노조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활성화에 이론적 토대가
되었던 문학에 있어서의 민중 논의가 80년대 비평의 주요 쟁점이 돼 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70년대 민중문학론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백낙청이 80년대에 와서는 그의 젖줄을 빨고
자라난 젊은 비평가들에게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론과 이념의 원심작용의
전형적인 한 실례이다.
사실상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중반에 백낙청이 「시민문학론」과 「민족문학의 현단계」를 통해서
시민혁명이라는 이념을 완수하기 위한 시민 혹은 민중의 집합적 조직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홀로 사색하고 홀로 작업해야 하는 문학 행위의 예술적 특성의 직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문학
현장에서는 민중이 누구냐는 원론적인 의문과 민중의 소박함이 어째서 지향의 대상이 돼야 하느냐는
방법론상의 의문을 제기시켰다.
그러나 무리한 3선 개헌을 통해서나마 정통성을 보유하고 있었던 당시의
체제가 유신체제라는 완력의 체제로 바뀌면서 민중이라는 어휘는 사회과학의 연대를 넘어서서 반체제의
행동강령으로 이끄는 그 어떤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체제가 더욱 캄캄한 군사독재로 강화된 80년대에는 민중이라는 명제는 반체제의 첨단에 서 있는
대학생들의 분신 자살의 구호가 될 정도로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80년대에 와서는 민중이라는 명제는 사회주의적 예술의 명제라기보다는 사회주의적
종교에 가까운 정치적 이상주의로 변모한 느낌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구호가 많은 예술형식 가운데서도 문학이라는 문자 행위에서 최초로 구현되었다는 것은
문학의 언어가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꿈의 속성 때문이었다. 즉 꿈을 언어화시킨 문학은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국면을 아울러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4)

그래서 현실 앞에서 좌절된 세계 개조의 꿈이라는, 프로이드가 너무 성적 일변도로만 해석했던 개별적
작가의 상상력의 내밀함이 백낙청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는 공적이면서도 집합적인 표현 양태를
획득한 셈이다.
엄연히 시민계급의 일원이면서도 시민의 제반 지배적 결정에는 참여 못하고 그런데도 자신이 지배계급의
구성원이요 자립 자족적인 시민이라는 환상을 끝내 고집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자가당착적 처지와
자기 이해의 결핍 때문에 극도로 무책임한 개인주의와 극도로 감정적인 집단주의 사이를 무정견하게
방황하면서 해소할 길 없는 원한과 허무감과 피해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 사회의 수많은 시민들--이들을 우리는 중소기업가니 상인이니 또는 현대적 신중산계급이니 하는 식으로 계층 구별을 함이 없 이 통털어
소시민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엄연히 시민계급의 일원이면서도 시민의 제반 지배적 결정에는 참여 못하’는 우리의 정치적 구조의
고질적인 병폐가 80년대 초두에는 그나마 아예 봉쇄당한 채 광주에서의 낭자한 유혈사태를 딛고 다시 한번
총칼의 군사정권이 성립되었을 때 민중문학론은 그러한 체제의 야만화에 맞서는 유일한 조직화된 명분이었다.
시민의 정치참여의 기회를 시대착오적으로 제한시킨 체제에 못지 않은 호전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80년대의
젊은 민중론자들은 백낙청의 포괄적인 이념으로서의 시민계급마저 헐거운 개념이라고 못박는 데서 그들의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백낙청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성민엽의 「민중문학의 논리」에 의해서 최초로 문자화된다.
즉 백낙청의 시민문학론은 그 유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받아야 한다. 하나는, bourgeois와 citoyen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시민혁명 이후 지배계급으로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자행한 이가 곧 bourgeois이자 citoyen인 것이다. (……) citoyen으로서의 시민 개념만을 따로 분리해내는 일은 하나의 이념형을 만들어내는 일에 다름아니며,
그것은 필경 시민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수렴으로 귀착하게 된다.
다음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발상의 근저에 ‘우리 사회의 당면 과제’를 ‘시민혁명의 완수’로
파악하는 관점이 놓여 있다는 점이다.
이 관점은 어쩌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진화론적 세계관의 간섭의 결과인지 모른다.
(……) 그것은, 이념형으로서의 시민의식의 설정이 그렇듯, 사회구성체의 내적 모순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수렴되기 쉽다.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던 프랑스 혁명이 실질적인 평등에 실패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역점을 둔 성민엽의 이러한 두 가지 지적은 이후 민중적 민족문학론자들에 의해 빈번히 차용되면서 더욱
호전적인 형태로 수용된다.
그러나 실질적인 평등을 달성하려던 러시아 혁명이나 중국 혁명이 자유를 희생시켰다는 역사적 사실
(최근의 북경에서의 유혈사태나 소련에서의 개방을 향한 몸부림은 바로 이러한 사실의 반증이다)을
외면한 채 이념형으로서의 노동자 농민에 의한 혁명 이데올로기로만 논리가 수렴될 때 역사나
미래에 대한 진단과 전망에 있어서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현상학적 비판은 이제
거꾸로 80년대의 젊은 민중론자들이 감수해야 할 비판이다.

(5)

즉 우리의 해방 자체가 우리의 자주적 능력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 세계의 양대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할이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마저 미군은 점령군이고 소련군은 해방군이었다는 억지로 둔갑하는가 하면
6쪾25 전쟁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겠다는 민중의 염원의 발현이었다는 왜곡된 역사관으로까지 증폭되고
있는 최근의 현상은 이러한 민중론의 연장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의 이득에 집착해서 변화와 변혁을 두려워하는 나머지 ‘이 땅에 우익은 죽었는가?’라는 식의
발언을 일삼는 체제 순응식의 기회주의적 논객의 논리가 체제에 의해서 역이용되는 사태도 바람직스럽지
못하지만, 타락한 체제에 대한 증오와 이상적인 사회를 향한 꿈이 김일성의 주체사상으로 엉뚱하게 불시착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심정적으로 허용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의 지적 풍토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의 극우와 극좌의 논리는 그나마 체제로부터 민주화에 있어서의 6쪾29 선언과 통일 논의에 있어서의 7쪾7 선언을 힘겹게 쟁취해낸 이 땅의 진보적인 시각이 자리잡을 입지를 그만큼 좁혀놓기 때문이다.
이러한 극우와 극좌의 양 극단 가운데서도 사려깊은 중용의 미덕을 김병익의 「민중문학론의 실천적 과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좌고우면의 80년대에 있어서의 다행스러운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병익은 민중문학론이 ‘우리의 공식 문화권에 그 보수의 두터운 벽을 넘어 진입해 들어왔으며 기존의
문화 체계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 는 것을 주저없이 인정하는 데서 그의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는 80년대의 민중문학이 ‘논리의 강화와 더불어 민중 사회를 건설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할
문학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이제는, 민중 자신에 의한 민중의 문학으로 좁혀들면서 그밖의 문학들을 민중문학의 범주에서 제거시키고’ 있음을 우려한다.
사실상 민중문학론자들의 실제 비평에 있어서의 배타성에서 기인하는 제한성은 70년대의 백낙청으로부터
비롯된 현상이지만, 80년대의 민중문학론자들에 이르러서는 그들이 선배 세대의 뛰어난 업적으로 내세우는
대표작들마저 갈수록 수효가 줄어들고, 『오월시』『시와 경제』『시힘』『분단시대』『분단시선집』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의 80년대적인 현상에만 초점을 맞추는 극성으로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몇몇 젊은 비평가들은 ‘민중에 의한’이라는 명제에 집착한 나머지 노동자들에 의한 르포, 수기,
에세이 등을 문학의 역사성과 현장성의 전형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러한 수기물들이 아무리 생동하는 현장성을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그것들이 의미있는 전형으로서의 구조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비슷한 경험들의 반복이나 나열로 그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김병익은 민중문학론자들에게 ‘보다 구체적이고 실현성 있는 모델을 설정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갈
전략을 마련한다면 현실적으로 보다 유효적절한 작업이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가질 설득력도 훨씬
커질 것’이라고 권고한다. 김병익이 여기서 경계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 농민만이 변혁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계급독단론인 것 같다. 사실상 80년대에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전문적인 문인들에게까지
일깨우는 데 한 역할을 했던 노동자 출신의 젊은 시인의 열정이 최근에는 기어코 ‘존경하는 김주석’
혹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이라는 배타적이고 적대적인 계급투쟁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민족의 모순을 계급의 모순으로만 고착시키는 적대적인 혁명 논리는 우리의 역사에서도 굳이 반복해 보아야 그 성과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선험적 가치일까?

(6)

사실상 우리의 체제가 수호돼야 할 신성불가침의 가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댄 혁명 논리에
의해서만 현실을 타파하기에는 역사상의 혁명들이 특정한 계층에게 요구했던 피의 대가는 너무도
허무하기만 하다.
80년대 민중문학론의 이러한 고슴도치성은 정과리의 「민중문학론의 인식구조」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그리고 가장 철저히 파헤쳐진다.
이 글에서 발휘되는 정과리의 장기는 섣부른 혁명론자들의 소박한 경제학적 진단을 압도하는 경제학적
지식이다.
기실 경제학에 대한 그의 이러한 편향은 이전의 그의 문체를 비문학적인 반응으로 보이게 하는 불리함으로서 작용하는 감이 있기도 했지만, 이제 그 나름의 일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정과리는 우선 ‘민중문학론은 현 문화 공간 속에서 지배적 담론의 하나로 정착되어 있다’는 입장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민중문학론 내부의 상호 토론은 현재 크게 두 가지로 분화되면서 그것은 합의에 도달해 있지도 않고, 폭넓은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다는 정과리의 진단이다.
그런데 정과리의 독창적인 진단은 뭐니뭐니 해도 ‘민중문학은 일종의 상징이며 동시에 실체인 모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민중’의 개념 역시 그와 같은 구조를 이룬다. 현실의 어떠한 존재도, 어떠한 언어도 상징을 충족시킬 수 없다. 그 언저리를 가리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은 끊임없는 은유로 계속돼야 한다. 이랬을 때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이념과, 즉자적 민중의 상태로 있는 ‘민중’이라는 현실은 상징과 은유의 관계처럼 그 모순이
저절로 해소된다.
이념과 현실에 대한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한 현상학적 중립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적절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정과리의 이러한 묘사는 체제와 반체제가 서로 자기 편이라고 내세우는 ‘민중’에 대한 상호 모순된
태도도 저절로 해명해 준다.
즉 ‘지배체제가 자신의 상징적 질서를 계급적 위계질서로 세워놓았다면, 민중문학론의 상징적 질서는
집단 구성의 차원에서는 그것과 반대 방향으로, 그러나 역시 특별한 위계질서를 이루면서, 거꾸로 선
피라밋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민중이란 지식인의 인식인가 아니면 노동자들의 생활양식인가. 정과리에 의하면 민중문학론은 그 인식과 생활 사이를 왕복한다.
인식이 강화된 태도가 민족적 민중문학이고 생활이 강화된 태도가 민중적 민족문학일 것이다.
여기서 인식은 인식대로 정과리의 치밀한 검토와 비판을 초래한다. 즉 백낙청이 역점을 두는 ‘민족’ 혹은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개념이 프랑스의 초기 부르주아의 이상에 맥이 닿아 있음을 정과리는 밝혀낸다.
그러나 ‘그러한 도덕적 순결성은 부르조아의 무한한 자기 증식과 타자 침탈, 즉 생산 수단의 독점과 노동의 상품화를 견디어낼 수는 없었다.’

(7)

한편 백낙청이 세계 자본주의 내부가 아니라 민족 내부에 자리잡은 모순으로써 분단을 파악할 때, 그것은
민족이라는 자기 동일성의 회복에 대한 염원을 불변의 것으로 만들어 놓는 비역사적 태도가 된다.
다시 말해서 ‘불변의 것은 그(백낙청)가 그것을 물어야 한다고 했을 때조차 확신으로 제기되고,
물음은 탐구가 아니라 확인으로 전개된다.’
모순의 진단과 극복을 시효가 끝난 역사상의 선례와 민족주의에서 이끌어내는 백낙청의 이러한
태도는 실제 비평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민족의식 민중의식’이라는 미리 설정된 본질에 의해 재단하는 재단비평, 늘 자기 합리화를 위해서
자기 부정을 이용하는 귀류법, 대립되는 관점들을 넓게 조망하고 규정하면서 그것들의 각각의 한계를
지적한 후 그 한계를 벗어나라고 충고하는 포괄주의 등은 백낙청의 실제 비평에서 흔히 느껴지던 한계들을
정과리가 구체적인 실례들과 더불어 정리한 항목들이다. 그러니까 이 대목까지는 백낙청의 이론과 실제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을 불변의 진리로 고정시키는 태도는 ‘민중적 민족문학론’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데, 정과리의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의 대목이다.
민중문학론도 역시 현실의 지배 문화의 상징적 질서에 대항할 새로운 상징적 질서를 수립하려는 움직임 속에 포함되는데, 계급 모순을 극복하겠다는 생각이 또 다른 지배 피지배의 질서를 낳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여기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현성 있는 모델’을 설정하라는 권유는 정과리에게서는 ‘민중문학론자들에게서 노동자의 세계관에 기초해야 한다는 얘기는 숱하게 들리지만 그 노동자의 세계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꽤 조용하다’는 진술로 나타난다.
그런 의미에서 민중문학론이 어떤 사실을 강조하고 은폐하는지를 정과리는 낱낱이 파헤친다.
우선 민중적 민족문학은 소시민 계급의 존재 의의를 부정한다. 그러나 민중적 민족문학론자들이 몰락했다고
주장하는 소시민 계급에 신중간 계급까지 포함시킨다면, 그 주장은 우선 사실이 아니다.
즉 지배 체제가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의 생산을 담당한 신중간 계급은 육체 노동자보다 오히려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실의 차원에서 그들이 역사성을 상실해 간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민중적 민족문학론자들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과하고 있는 이러한 구체적 사실은, 인구의 7할 내지 8할이 문맹이고 농노였던 러시아나 중국에서의 혁명 조건에 대비해 볼 때 계급독단론이 지닌 가장 시대착오적인
역사 이해의 한 공백을 말해준다.
그러나 노동자의 계층이 주변계층이라는 현상 때문에 계급 모순을 외면한다는 것은 현실 차원에 있어서나 성실성 차원에 있어서 지배 이데올로기로의 매몰이 될 것이다. 그래서 정과리는 지식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또한 ‘언어가 단순히 인간들간의 상호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지배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관리하며 확산하는 약호체계라면, 노동 계급 역시 그것의 전반적 영향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뼈아픈 은폐성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아무도 주체가 아니다’라는 명제와 병행해서 이해돼야 한다.

(8)

그런데 이 두 가지 상반된 명제의 매개화는 정과리가 보기에는 집단들간의 이타적 상호 관련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그 이타적 상호 관련은, 왼편에 소생산자들의 분배의 평등주의를, 오른편에 특정한 집단을 중심으로
다른 집단들을 그 주변에 등급을 매겨 배열하는 포섭주의를 두고 있다.
분배의 평등주의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자유, 즉 주체됨을 보장하지만, 그것들 사이의 관련은 방치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본주의의 독점과 예속의 원리에 부단히 이용당한다.
포섭주의는 주체/비주체를 편가름한다. 그 편가름은 늘 상징적 정점으로서의 ‘민중’의 주체됨을
알리바이로 두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 보이지 않는 정점 은 한편으로 신비화되면서,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특정 집단으로 하향 이동한다.
분배의 평등주의는 이타성을 인정하되 관계 개념을 배제하고 (신비화시키고) 있으며, 포섭주의는 관계
개념을 설정하되 이타성을 배제(특정의 주체의 신비화)한다는 정과리의 대안적 처방은 계급적 배타성을 이타적 상호 관련이라는 사랑으로 바꿔놓는 문학 본연의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과리는 ‘다른 문학, 다른 문화, 다른 가치체계와의 관계를 모색하고 따라서 민중문학이 이념과
실제에 있어서 개방적인 발전으로’ 나아가라는 김병익의 권고를 그의 결론으로서 원용한다.
최근의 체제 쪽에서의 토지 공개념을 도입하려는 몸부림이나 재야 쪽에서 경제정의실천 모임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사실은 정과리의 이타적 상호관련과 포섭주의의 현실적 표현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에 의한 독재라는 마르크시즘의 역사적 전망이 점차로 그 유효성을 상실해가는 국제적 추세에서, 정과리의 이러한 매개화는 사회가 응고된 객체가 아니라 자기 규제의 기능을 발휘하는 주체적
기능의 생명체라는 탈코트 파슨즈의 균형이론의 한국적 현실에 있어서의 세련화이다.
사회개조의 이상을 이성적으로 설득하느라고 비평문학의 평균적인 분량을 넘어서는 글들을 곧잘 써왔던
김우창이나 백낙청의 긴 글들의 분량을 엄청나게 넘어선 정과리의 이번 논의는 그것이 민중문학론에 대한 비판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의 무성했던 민중문학론들을 일일이 섭렵해 온 애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긴 호흡의 애정은 그 동안 그가 섭취한 경제학의 지식과 어울려서 무수히 많은 각주들로 표현되어,
섣부른 반론들이 파고들 여백을 애초부터 봉쇄하는 효과를 거둔다. 자본주의 사회에의 편입과 일탈 사이에서 왕복하는 소생산자로서의 문학인들의 묘한 처지가 다섯 가지 사회적 삶의 유형으로 분류되거나,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면 왜곡된 노동에 의해 노동자의 세계관 역시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이 부수적으로 밝혀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풍요한 각주들을 통해서이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80년대 비평문학은 80년대에 걸맞지 않는 독재정권의 출현과 맞물려서 민중문학론이라는 엄숙한 이념의 소용돌이를 증폭시켜 놓았다.
이러한 이념의 소용돌이는 반체제 운동에 이론의 활력소를 제공해 주는 이론 생산의 구실을 톡톡히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인간의 하루의 삶이 온통 이념으로만 무장된 것 같은 엄숙주의를
낳은 것 또한 사실이다.

(9)

이러한 엄숙주의는 비관주의의 강도와 뉴앙스가 다양한 창작 현장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필연적으로
‘고급한 오락’으로서의 재미를 외면하는 외곬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이 땅의 지적 풍토에 대한 성찰을
더욱 분석적이고 구체적으로 강요하는 이문열의 작품들이 그 영향력과는 상관없이 자주 복고적인 낭만주의자 혹은 보수적인 귀족주의자 등으로 낙인 찍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엄숙주의 탓이다.
그러나 이문열은 최근 창간된 『작가세계』에서 꾸민 이문열 특집에서 조남현이 밝힌 바와 같이, 지배자의 소영웅주의와 거기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소집단주의의 광기를 싸잡아 비판함으로써 시대의 대세나 조류를
거스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신을 음모하는 이상주의자(혹은 그런 의미에서의 허무주의자)이다. 사실상
법보다 주먹이 더 통하는 흔하디 흔한 국민학교 시절의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서 70년대의 황석영과
80년대의 이문열의 이상주의를 현실 개조의 꿈이라는 동일한 이념의 잣대로서 잴 수 없을 정도로 그 의미들은 명백하다기보다는 함축적이다.
즉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의 화자는 아름다운 교생 여선생에게 음란한 음모를 꾸미는 주먹들을
집단의 규합으로써 응징하는 결말을 통해 집단이 지닌 폭발성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여선생을 미래에 올 이념상의 ‘그이’로 상정하는 결미부는 사건의 경과와 더불어, 그에게 흔히 붙여지는
리얼리스트의 명칭에 안 어울리는 낭만적 터치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비슷한 환경에서 주먹 센 반장에 대한 화자의 도전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의 꼼꼼한 묘사는 박진감 넘치는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특히 유리창을 더 닦으라는 반장의 횡포에 울음을 터뜨리는 화자의 모습은 거대한 체제 앞에서의
개인의 무력함의 극치이다.
그러나 교사의 권위마저 부정하고 교실을 박차고 뛰쳐나간 반장이 오랜 세월 후에 경찰에 체포되는
소매치기로서 목격되는 결미부의 처리는 역사와 인간에 대한 애정이 결여돼 있다는, 함부로 내뱉는 일부의
비판을 사절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현장은 한두 가닥의 결정론으로 해명될 수 없는 현실의 모순을 사실에 가깝게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이념으로써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모순의 정체를 드러내는 가장 퐁요한 토론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집단의 광포성에 대한 이문열의 혐오감을 탓하기 전에 그러한 알레르기성 반응을 육체로써 사유하는 공감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평문학은 앞으로도 공허한 이념의 메아리로만 증폭될 것이다.
이념과는 상관없이 신분과 경제력의 차이를 죽창과 즉결심판으로써 서로 앙갚음하는 동족상잔을 어린시절에 목격한 상흔을 간직한 세대로서는 집단의 광기를 체질로써 증언하고 경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더 많은 자유와 더 공평한 평등을 지향하는 거대한 생명체로서의 민족의 꿈틀거림을 우리는 외면할 수가 없다.
하지만 민중이 지닌 생명체적 현상으로서의 연약함과 강건함도 ‘계급성’과 ‘당파성’만을 강조하는
이념의 배타성보다는 김지하의 「비닐」의 다음과 같은 결미부를 통해 더 생생한 육화로서 육박해오는
경험을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10)

파묻어도 안 없어지고
불살라도 공중에 그대로 남고
물에 뜨면 오대양 큰 바다
수백 수천 년 갈고 돌아다니고
썩도 않고 삭도 않고 끄떡도 않고
아 그런 징그러운 놈이
꼭 산 놈 같다야
밭에서 돋은 산 놈
어째 오늘은 꼭 무슨 영물 같다야
가사 한삼에 꽃고깔 쓴 영물!

그것은 특정한 계층을 꼭 희생시키고야 말겠다는 국적 불명의 이념을 가장한 째째한 호전성보다는 더욱
폭넓게 포괄하고 더욱 신바람나게 고양시키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살풀이의 효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90년대에 있어서의 우리의 민족 모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서로 상대방을 제국주의라고 우기는
양 극단의 이데올로기의 섭취에서보다는, 우리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육화된 문학 현장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문학정신』, 1989)

작성 : 여명문학회 /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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