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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체의 경계와 시의 보편성
출처 : 현대문학 1998 년 10 월호 / 글 방민호
1
시는, 그것이 비록 말이어서 시간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본질로부터의 소외라는 역사적 행정(行程)을 따라 변화하지 않을 수 없지만,
오늘에도, 시라고 부르기에 합당한 시라는 것은, 극복의 형식을 따르든,
초월의 형식을 따르든, 시간, 역사의 굴레, 곧 언어의 한계 너머
존재 자체로 우리를 이끄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이시영이나 백무산 등의 시는 음미할 가치를 지니는 듯하다.
또는, 지금 특종의 시에 대한 비판이 행해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 시가
현재를 노래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으로 통하는 길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속됨에 침윤된 자기를 쉽사리 노출하는 일은 타기되어야 한다.
감상이 현대시에 독이 됨은 한국의 시에서도 너무나 오래 전에 밝혀졌다.
그러나 더 나아가, 그 속됨으로부터 한갓 포즈로서만 벗어나는 일,
벗어났다고 착각하는 일도 삼가 되어야 한다.
포즈의 유효성은 그것이 포즈임을 자각하는 데 있다. 비록 시 또한
연기의 일종이기는 하나, 그 연기는 모든 예술상의 연기가 그렇듯이
연기자의 진실한 내적 투쟁의 산물일 때 가치가 있다.
물론, 누가 그 진실의 무게를 잴 것인가. 그것은 일개 비평의
몫일 수도 없고 부유하는 한담의 몫일 수는 더더구나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시간이 그 문제를 해결해준다.
우리는, 그 시간의 주재를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다만 기다릴 뿐이다.
2
논을 가로질러 선산에 오르려면 그곳을 꼭 지나쳐야 한다
그곳은 파다 만 우물 같은 저수지
아버지 저만치 앞서 가시고 동생도 뒤따라가고
논둑길 걷다 보면 어두운 초록빛 물은 그곳이 다른 길의 입구라고 속삭인다
(2)
움푹한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곳,
어디까지 파 내려갔을까? 깊은 웅덩이는 어느새 하늘과 산과 나의 고개 숙인 얼굴을 거꾸로 붙들고 있다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 있다
장대로 그 속을 찔러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언젠가 눈동자를 반으로 가르고 그 속에 사람이 풍덩 뛰어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그를 다시 게워냈다
치마를 뒤집어쓴 젊은 여자도 물가 고무신 곁으로 조용히 데려다
놓았다고 한다
동생도 아버지도 벌써 보이지 않는데, 아버지는 이쯤에서
항상 나를 부르신다
물의 검은 입 속에 머리를 집어넣고 그 속을 기웃거리던 나는 대답 대신
머리를 빼낸다
아무도 그 속에 들어가보지 못했다
몇 년 뒤, 저 속에 들어가 시퍼런 물에 썩지도 않고 눈뜨고 있는 사람
그는 무엇을 보게 될까 비밀을 보아버린 사람은 항상
죽은 자이다 그리고 침묵만이 오래 그들의 몫이 된다
산소에 오르려면 늘 그곳을 지나쳐야 한다
조용미, 「저수지」(작가·여름호)
죽음은, 비록 탐구될 수도 있고, 미적 효과를 위한 장치로 도입될 수도
있지만, 그때 죽음이란 그것을 다루는 시인이나 작가에게 운명처럼
따라붙어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기에, 위험하다.
그런 경우 죽음은 종종 작가나 시인 자신을 위한, 그의 이미지를 위한
의장(儀裝)으로 그치는 수가 있고, 주의 깊은 독자나 면밀한 평가(評家)는
그로써 배반감을 가질 수 있다.
매력적인 주제인 만큼 조심스레 접근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반면에 죽음이 실제로 그의 생 바로 곁에 머물고 있고, 따라서 죽음이 주어진 하나의 상황이어서, 시가 연기가 채 되지 못하고 독백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조용미의 경우, 그녀의 시는 아직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
(3)
그러나 그녀에게 죽음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어서, 그 독백의 높은 밀도가
읽는 이들의 심정을 움직이게 한다.
나는 이미 『불안은영혼을 잠식한다』(실천문학사, 1996)의 많은 시들에서
그것을 보았다.
죽음은 물론 심연이다.
「저수지」에서 그녀는 가장 한국적인 이미지의 그 심연에 다다랐다.
저수지보다는 차라리 방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 낱말의 어감은 심연이 지닌 불가항력의 힘에 합당하다.
그 심연, <움푹한 어둠> <눈동자> <비밀>의 세계에 어린 <나>는
이끌리곤 했고, 시인은 지금 그 심연의 이미지를 기억해낸다.
그 무서운 흡입의 세계가 시인에게는 이미 친숙해 보이고, 그녀는
그곳에 어떤 매혹조차 느낀다. 이미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밖을 내다보는데
왜 자꾸 안이 들여다보이는가
한없이 내려가는 정신의 두레박,
너무 깊어 끝이 닿지 않는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다
저
겨울 산에 서 있는 나무들의 흰 뼈를
다 추슬러야 한다.
이 시의 제목은 「무반주 첼로」인데, 이제 성년이 된 그녀는,
많은 시들로 미루어 볼 때, 허리를 앓으며 누워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첼로를 듣는다.
그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는> 허방의 세계 속에서 그녀는
<겨울산에 서 있는 나무들의 흰 뼈>를 본다.
(4)
이것은 죽음의 이미지, 깊이 모를 어둠 속에서 빛나고, 두려우면서도
매혹을 간직한 죽음의 이미지와 같다.
이로 보면 그녀는 확실히 죽음이라는 것에 친숙하고 또 그것을
탐구해야 마땅한 면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시에서 죽음은 아직 너무 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어,
그녀의 독백을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정서적 참여를 어렵게 하는 점이 있다.
「저수지」의 공감은 그것이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뿌리박은 죽음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빛나는 이미지는, 동시에
그것이 자태를 드러내는 순간 낯익은 것으로 화할 수 있는 이미지이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또한 죽음이 생의 연장이라면, 그것의 의미는 이 현세적인 생의 의미를
묻는 긴 과정 속에서 얻어지는 것으로서 드러나야 할 듯하다.
이것은 죽음을 문학적인 주제로 심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음인데,
죽음이 하나의 상황으로 주어질 때도 그것은 반대로 또한 탐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그녀가, 죽음을 탐구의 주제로서 접근하는 이나 미학적 장치로서
도입하는 이와는 다른 문제를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죽음을 생의 문제로서 사유한다는 것은 정녕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3
나는 지금 내 방에 있다. 밖에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 있다.
수많은 물상들을 눈길만 얼핏 지나치거나 그마저도 없이 이곳에 와 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지나가고 있다.
흔들리며 스쳐가고 있다.
내 방은 떠 있기까지 하다. 남의 이름 위에 높이 떠 있기까지 하다.
나는 통과 중이다. 공중에 떠 흔들리며 이 방마저 내내 통과 중이다.
나는, 모으면서 흩어지면서 가고 있다. 중심이 중심들을 지나며
또 그들과 함께 흘러가고 있다.
백우선, 「역려」(현대시·7월호)
(5)
방(房) 또는 집이라는 소재는, 최근 몇 년 간, 온갖 물고기의 이름과 함께
문학 <시장>을 풍미해왔다.
유행을 따르는 심리의 존재를 그 두 소재에서만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그만큼 개인의 유폐가 심각해졌음을 지적하는 일 또한 필요할 것이다.
이 개인의 유폐는 오늘의 우리 사회를 읽기 위한 하나의 지표가 될 것인 바,
지난날 많은 이들이 꿈꾸었던 공동체에의 <환상>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가치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개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몰입케 할 새로운 집단적 이상이 전무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겨우> 가족이라는 원초적인 공동체에,
그것도 기성의 가족 관념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매달리고 있거나,
아니면 원자화된 상태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역려」는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시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방이 <역려>, 즉 정처없이 머물다 가는 곳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할 수도 있다.
방을 곧 <역려>로 느낌은 고독한 칩거의 공간으로서의 방이라는,
상투화된 표현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나>는 <밖에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 있지만, <그러나 나는 역시
지나가고 있다>. 방은 혼자만의 공간, 안주의 공간이 되지 못한다.
방은 다른 많은, 스쳐 지나온 그 바깥의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흔들리는,
지나쳐야 할, 떠 있기까지 한 곳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어렵게 하는 것은 <내 방은 떠 있기까지 하다. 남의
이름 위에 높이 떠 있기까지 하다.>라는 부분일 것이다.
<남의 이름 위에 높이 떠> 있음은 무엇을 의미함일까.
<이름>은 대체로 사물의 개념이자 외연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더 나아가서는 거죽이나 허명을 의미하기도 할 텐데, 그렇다면
<남의 이름 위에> 떠 있다는 말은 무엇일까.
타인들이 자신에게 짐지운 이름, 타인들에게 남아 있는 거죽으로서의
자기로 하여, <나>의 독거(獨居)는 실현될 수 없음인가, 방에 돌아와
앉아 있는 자기의 뇌리에 떠오르는 타인들의 인상들로 하여 역시
독거는 실현될 수 없음인가.
(6)
그러나 그 어느쪽이든 <나>의 피로는 독거조차도 가능하지 않음으로부터
옴이 분명하다.
<나>는 방의 바깥에서도 그 안에서도 <중심들>의 세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그 부자유를 인식한다.
이쯤에서, 시인에게 방에 관한 몇 편의 시가 더 있었음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듯한데, 특히 「무제」라는 시는 다음과 같았다.
<손을/내밀어/본다//소리를/내어도/본다//이것/저것/바라/보고//걸어도/본다//빈방//그냥/그래/본다//바퀴/벌레//눈을/맞춰도/본다>(『춤추는 시』, 인화, 1994)
말하자면, 독거의 불가능성을 드러낸 「역려」와 같은 시 앞에는, 위험해
보이기까지 하는 독거의 시가 있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자기 유폐는 그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순수>에의 지향과 짝을 이루면서 강화되어온 듯하다.
<순수>는 그의 <타자>에의 사랑이 전면화되는 일을 막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의 어떤 시들은 유폐의 공간으로부터의 벗어나는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
「역려」와 함께 게재된 「희통」은 그것을 보여주거니와,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심 혹은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편폭의 한계로 말미암아 여기서 이 시를 인용할 수는 없지만 대신에
그의 내면 속에 내장된 힘의 크기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를 한 편 들어보고자 한다.
<나무는 저 수많은 나뭇잎으로 태양을 일일이 통째로 빨아들이며
타오르고 있다/나는 이 부푼 다면체 거울의 가슴으로 태양을 가득 품어
활활 타오르고 있다>(「
한여름」, 동인집 『집으로 가는 언어의 지팡이』, 한국문연, 1988)
그가 <다면체 거울의 가슴>으로 흡수해들이는 <태양>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어떻게 타오르고 있는 것일까.
그 힘은 그의 독거의 경계를 허물 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시는 아직은 그가 그 경계 안에 머물고 있음을, 그가 지극히
사적인 언어로 신변의 노래를 부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시는 지극히 사적이되 사적이지 않은 것이어서 시인은
그의 삶의 경계 너머로 나아갈 때만 공감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된다.
(7)
오로지 혼자만의 세계 속에 칩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의 시가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자기 내부로 파고드는
역설의 방식으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백우선은 그런 유형의 시인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그의 시는
타인들, 물상들에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보는 것이다.
4
날마다 그에게 간다. 날마다 그의 초승달을 훔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서 있을 뿐이다.
깨진 유리조각들처럼 서 있다 돌아온다.
돌아올 때, 이미 돌아온 사람들과 이제 돌아올 사람들을 본다.
그들 머리 위에 서 있는 초승달을 본다. 하나, 둘, 셋, 초승달들이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어둠은 둥글게 휘어진 활주로, 내가 훔친 초승달은 나보다 먼저 내 집에
도착한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보이지 않는다.
유리조각들은 제 음표를 베어물고, 모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유리조각의 숨은 음표들이 나를 세운다.
나는 다시 그에게 간다. 깨진 유리조각들처럼 서 있다 돌아온다.
나는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어둠은 둥글게 휘어진 활주로, 내가 훔친
초승달이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
이수명, 「그의 초승달」(작가세계·가을호)
이수명의 시에 집중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단순히 이미지의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 도저히
끌어당길 것 같지 않은 언어들을 연속적으로 이어가기 때문이며,
뿐만 아니라 이 언어들의 비밀을 캘 수 있을 만한 단서들을 별반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8)
두 번째 시집인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세계사, 1998)를 일관하는
독특한 그녀만의 스타일은, 그녀의 세계 내에서는 한 편의 시를 이루는
그 모든 언어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게 하지만,
그 유기성을 헤아리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도 그 전체적인 의미는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그같은 소통의 난조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듯하다.
알게 되는 이들은 알고 모르는 이들은 모르리라는, 비의적 언어의
원리를 확신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때로는 이미지들을
건축적으로 축조해 올리고 때로는 그것들을 마치 물결처럼, 파도처럼
부딪히게 한다.
이 같은 그녀의 시도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세계를 이미지로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어떤 불길한 감정의 상징으로서만 이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시인으로서는 흔치 않은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 불길한 감정이 무엇인지는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전체를 통해서도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세계를 자신이 절대로 용해될 수 없는 어둠 혹은
죽음의 공간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아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그 받아들일 수 없는 세계와의 불화이다.
그녀는 세계의 바깥으로 나와 어둡고 축축한 세계를 응시한다.
「내가 한 마리 물고기였을 때」는 그녀의 선 자리를 보여준다.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속 물고기였을 때
이미 바다는 죽어 있었다.
물결 위의 물결, 떠도는 바다의 혓바닥은
침엽의 비명처럼 소리를 잃었다.
(…중략…)
(9)
내가 한 마리
깊은 바닷 속 죽은 물고기 되어
죽음으로 바다와 만나려 하였을 때
나는 눈을 뜬 채 바다 위로
바다를 벗고 떠올랐다.
이제 <바다 위>, 곧 세계의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불편한 감정으로
그 불길한 세계를 응시한다.
그러나 마음은 세계의 바깥에 있으되 몸은 그 세계의 안, <바닷속>을 유영한다.
이 모순, 이것이 아마도 그녀의 시에서 서로 맞서는 이미지의 언어들이
공존하는 이유일 것이다.
따뜻하고 가볍고 밝은 말과 차갑고 무겁고 어두운 말이, 감각적인 말과
추상적인 말이, 그녀의 시에서는 서로 부딪히고 밀쳐내며 상처를 낸다.
그로써 그녀의 시는 낯설고 불편한 자태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바로 「그의 초승달」이 그러하다. 이것은 그녀의 몇몇 시들이
그러하듯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관한 시인가. 아마 그러할 듯하다.
<초승달>과 <유리조각>의 충돌이 그것을 드러내는 듯하다.
<돌아올 때, 이미 돌아온 사람들과 이제 돌아올 사람들을 본다 (……)
하나, 둘, 셋 초승달들이 어두운 하늘을 이동한다.>라는 시행이 이 시의
충분한 독해를 방해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그녀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관한 묘사일 수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의 해석은 여전히 유효성을
가질 수 있다.
물론 <초승달>과 <유리조각>이라는 이미지는 그 이상의 해석도 가능케 한다.
그녀가 <그>로부터 훔쳐내는 <초승달>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신화적 의미가 항용 그러하듯 그것은 신생, 즉 갓 태어난 생명의 힘을
말함인가. 한 사전은 <초승달>을 <밤바다에 떠 있는 빛의 배>로 표현하고
있는 바, 그녀가 <그>로부터 훔쳐내는 것은 그 어떤 종류의 빛이란 말인가.
비록 그녀의 많은 시들이 해독법을 알 길 없는 암호와 같다 해도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시를 읽는 행위의 창조성을 실감하게 하는 면이 있다.
한편으로, 이미지라는 것이 본래 그 근원에서는 리듬과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면 그녀의 언어는 언제, 어떻게 리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일까.
(10)
이수명의 시는 이미지들, 그 언어들이 리듬과 한 몸을 이루고 있지는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시행들 사이의 이미지의 비약은, 그 역시 리듬의 일종, 리듬을 거역하는
리듬이라 할 수도 있지만, 리듬이라는 것은, 역시 때로는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면서도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또는, 이미지와 리듬이 근원에서 일체를 이루는 하나의 세계가 발견될 때
시를 읽는 행위는 의식 집중의 일이자 동시에 의식 해방의 유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시인이라는 한 개인의 시의 세계에 독자라는 타인들의 참여를
권면 할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초승달」은 그러한 시에의 가능성과 함께, <오독>의 자유에
맡겨질 수 있는 시의 문제도 생각하게 한다.
특별한 하나의 이미지를 얻을 수 없는 쉬운 시 또한 경계해야 마땅하지만,
그 반대편의 문제 또한 생각해볼 일이다.
5
더 이상 나는 세상의 그늘에 숨어 생활하지 않는다
타인들의 눈 속에서 내 모습 읽지 않는다
타인들의 말속에서 내 목소리 듣지 않는다
타인들의 그 어떤 증오나 선망의 대상이 되어 나를 확인하지 않는다
나는 내 정신의 모든 질병들과 함께 잠들고
함께 여명이 밝아오길 기다린다
내 질병은 이 시대와 아무런 상관없이
내가 내 속으로 너무 깊이 내려선 탓에 생긴
잃어버린 한 마리 검은 양의 비명소리이다
그 아픔으로 나는 이 시대를 견디며
타인들이 누리는 모든 안락을 피해 간다
그들의 지름길로 몰래 들어가 절대 빵을 훔치지도,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아무런 억압 없이
얼굴이 불꽃인 고독한 사람들의 페이지 밑으로 들어간다
독서는 노랗고 어두운 땅이다
그 땅은 내 피로부터 솟아난다
(11)
인간의 처음이자 마지막 행동인 피
나는 내 내면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는 모든 독수리떼들에게
그 피를 바친다
형태를 드러낸 감옥은 이미 감옥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독수리떼들을 날려보낸다
그리고 수천, 수만 번의 걸음 뒤에 남겨진 그림자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림자는 얼굴들의 숲
―우리는 얼마나 열렬히 그 숲에 매달렸던가!―
나는 무겁게 한숨 쉬는 그 페이지들을 모두 찢어버리고
건강한 걸음걸이,
어머니의 환한 밝음이 내 등을 쓰다듬는 곳으로 떠난다
아주 깨끗한 출산처럼
모든 것을,
모든 것들을 싹둑 다 잘라버리는 그곳으로
맨발인 채로, 맨발로
김상미, 「맨발의 나라」(현대문학·7월호)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은 인간의 숙명을 그 생물학적 존재성으로부터
설명한다는 점에서 독특할 뿐만 아니라 경이롭기도 하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영원한 굴레, 생명의 연속성을 오로지 그 단속성을
통해서 밖에는 실현해갈 수 없다는, 그 보편적 숙명 속에서 보면 인간은
자연과 대립하는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단지 그 자연의 원리에
복속하는 한 종(種)일 뿐이다.
자연을 부단히 인간화해가려는, 인간만의 질서를 수립해가려는 의지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생물학적 숙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이 사회의, 금기와 위반의 깊은 근거를 이룬다.
그는 불교적 사유의 깊은 영향 속에서, 인간의 생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다시 한 번 묻게 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사고는 인간 종을 이루는 무수한 개체들,
즉 개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운명의 동일성을 생각하게도 한다.
(12)
그들은 각기 고유한 존재로서, 그 존재 하나하나는 인간 종이라는
보편적 관념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실체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보이지 않는 <인연>의 사슬, 그 공동의 운명에 귀속된 존재이다.
개인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생을 영위한다고 믿지만, 그 개체성,
고유성은 어떤 한계 내, 그들이 임의로 넘어설 수 없는 공동의 숙명에 처해 있다.
이것이,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그들을, 서로 외면적으로 대하는
그들을, 그들의 의식상의 대립과는 달리, 단단한 단일체로 유지시킨다.
개인들은 그들의 그같은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소통의 불가능성은 그 가능성 속에서 펼쳐진다.
이제 김상미의 「맨발의 나라」로 돌아와보면, 그녀는 더 이상
타인들과의 생생한 소통이란 추구하지 않고 있다.
<나>는 <타인들의 눈 속에서>도, <타인들의 말 속에서>도,
<나를 확인하지 않는다>. 그녀가 겨우 마련한, 타인들을 향한 좁은
길이란, <독서> <얼굴이 불꽃인 고독한 사람들의 페이지 밑으로 들어>가는
일뿐이다.
오로지 타오르는 내면을 간직한 이들의 고백록을 읽고 그녀 역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시를 쓰면서 그녀는 살아가려 한다.
다시 말해, 피부가 서로 맞닿는 소통의 방식에 절망한 나머지 종잇장을
사이에 둔 소통의 방식 속에서 그녀는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하려 한다.
그런데 그 절망을 나는 그녀의 옛 시집에서(『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세계사, 1993) 이미 본 적이 있었다.
<짐승들의 울부짖음/그 속에 내가 있다/늘 시작되는 부패/씻어내고 불태워도
내 곁에/그들 곁에 모여드는 짐/그 속에 내가 있다/누군가 나를 벌레
같다고 했다/그래, 난 벌레다/벌레 속에 내가 있다/벌레보다 나은 삶이란
무엇인가?/참으로 우스운 그들의 편견/그 끝에 죽음이 있다//(2연 생략)//
그들은 나를 모른다>(「그들은 나를 모른다」)
이 자리에서 <그들은 나를 모른다>는 그 절망적 태도의 연원을 새
삼스레 더듬어 올라가 볼 필요는 없겠다.
그녀의 절망이 그만큼 오래되고 뿌리깊은 것이라는 사실만을 짚고
넘어가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이미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에서부터
그녀는 절망의 피안을 가족의 이미지 속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13)
「맨발의 나라」에서도 그녀는 자신이 찾아 떠나는 세계를 <어머니의 환한
밝음이 내 등을 쓰다듬는 곳>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에 나타나는 아버지의 세계와 등가적이다. 「꿈 뜻」이라는
인상적인 시에서 그녀는 이 환멸적인 세상과 아버지의 세계를 대립시키고 있다.
아버지, 가지치기하세요.
나는 아버지의 가지예요. 뒤얽히고 뒤바뀐 이 시대, 이 서러운 날들 쳐주세요.
싹둑싹둑 잘라주세요. 아버지 곁에 누워 나도 뿌리가 되고 싶어요.
잔뿌리라도 좋아요. 쭉쭉 땅 밑의 지하수 빨아 당기며, 뒤죽박죽
땅 위의 일들 잊고 싶어요.
내 거친 의식으론 감당할 수 없어요. 새로운 사람들, 테크놀러지에
턱이 걸린 사람들. 그들의 가지의 가지가 되긴 싫어요.
땅 밑의 지하수, 지하수의 고통에만 집중할래요. 허물이 되긴 싫어요.
날 바꿔채세요. 제발…… 이곳에 있기 싫어요.
삶도 죽음도 아닌 카멜레온의 채찍들. 목줄기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모래, 모래시계들의 싸늘한 합창. 아, 아버지 제발……
부성이나 모성의 품을 향한 이 같은 그리움에는 분명 시인의 성장기와
현재의 삶이 지닌 특이성이 가로놓여 있겠지만,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적대에 가까운 타인에의 감정과 부성이나 모성에의 그리움의 병존은,
그녀가 현실의 불화를 퇴행적으로 해결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맨발의 나라」에서 그녀는 <아주 깨끗한 출산처럼> <맨발인 채로, 맨발로>
떠나간다고 했지만, 내게는 그것이 그녀가 아직 떠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소통의 불가능성이란 떠남으로서가 아니라
그 불가능성의 배후에 놓인 가능성을 발견함으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이것은 이론적 성격의 결론일 뿐이고, 개인들은 저마다 처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오랜 해원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진실한 소통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상미 시인의 현재, 곧 「맨발의 나라」가 보여주는, 생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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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들의 존재를 <배제한> 해결의 추구는, 그 유효함의 여부를 떠나 가치가 있다.
그것은 가장된 해방의 언어와는 거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시는 현재로부터 더 멀리 나가야 할 것 같다.
시를 읽는 이들은 고통이 승화된 차원의 언어를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11,783자
낱말 : 2,845개
원고 분량 : 8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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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개체의 경계와 시의 보편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