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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5.

가족은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가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17:03

시란?:

(1)

가족은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가

출처 / 현대문학 2000 년 3 월호 / 글 이승하

명절이라고 하여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처럼 민족의 대이동이 이루어질까.
명절 때마다 고속도로는 차량의 물결로 뒤덮이고 임시열차조차 서서 가는
사람으로 빼곡하지만 가장은 처자식을 데리고, 선물을 사 들고,
교통대란 속에 고향으로 간다.
고향이란 곳에 사는 부모가 대도시에 나가 사는 자식을 아직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지탱해 왔던 가부장제라는 나무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된 핵가족의 바람 속에 지금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여성의 인권도 점차 제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가장과 장자에게 몰아주었던 절대권력을 분산시키는 추세에 있다.
성묘를 하지 않는 가정의 수가 급속히 늘고 있고 묘를 쓰지 않고
화장을 해 사후를 정리하는 사람도 해마다 늘고 있으므로
우리의 장례 문화와 명절 풍속은 분명히 많이 바뀔 것이다.
장례 문화의 변화와 아울러 가족 제도의 변화도 빠른 속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해마다 이혼율이 증가하여 요 몇 년 사이에는 여섯 쌍이 결혼하면
한 쌍이 파경을 맞는다고 하므로 우리 사회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은 분열되고 있고 그 구성원인 가족은 해체되고 있는 중이다.
부부 중 한 사람이 집을 뛰쳐나간 뒤 남은 사람이 아이를 보육원 등
복지 시설에 맡기는 사례가 90년대에 들어 꾸준히 증가되어 오다가
IMF 체제로 접어든 이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고아 아닌 고아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의 파괴와 가족의 해체를 다룬 시가 간간이 보이는 데서도 우리 사회의
가족 제도 변모는 쉽게 감지된다.
『현대시학』 1월호에 신작 11편을 한꺼번에 선보인 여종하의 작품은
이런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2)

대물림 같은 생, 뼈아픈 밤
살아오면서 나는 어머니를 모른다 모른다라고
몇 번을 부정했던가 그렇게
살아가면서 내 아이는 나를 또 몇 번을 부정하겠는가
삶의 패잔병처럼 홀로 돌아와 길게 누워버린 밤
가난한 솥 안에서 끓고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변변한 자식도 못 되었던 나
「뼈아픈 밤」 중에서

이 시에는 두 사람의 어머니가 나온다.
시적 화자의 어머니와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화자 자신. 시인은 화자와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리 순탄치 못했음을 암시하면서 동시에 화자와
자식과의 관계가 전에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감하고 있다.
딸이 어머니를 부정하는 관계가 대물림되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부정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기둥인 동시에 울타리였고,
고향이면서 대지였다. <어머니> 하면 연상되는 것은 <모성>이며
<자기 희생>이며 <강인함>이다.
시인이 그런 어머니와 사별을 한 경우에는 하염없는 그리움과 못 다한 효도,
고생으로 일관된 생에 대한 회한으로 한 편의 사모곡을 쓰는 것이 상례였다.
어머니의 진짜 모습이 어떠했건 간에 적어도 시작품 속에서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처럼 고아하고 성모 마리아처럼 숭고한 상이었다.
그러한 전통적인 어머니 상이 여종하의 시에서 이렇게 일그러진 모습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시는 오늘날 무수히 많은 가족이 해체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3)

늦은 밤, 집 앞 공원에서
김밥을 먹는다
오랜만에 아이와 난
서둘러 싸온 김밥을
말보다 먼저
풀어놓는다
…(중략)…
다아 끝났어
이젠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 소리
그 옛날 내가 하던 그 소리
「보름달과 김밥」 중에서

왜 이 시속의 어머니는 보름달이 뜬 밤, 집 앞 공원에서 아이와 함께
김밥을 먹고 있는 것일까.
뒷부분에 가서 <내가 살지 않는 빈 집 위로>라는 시행이 보이므로
이 시의 어머니는 집을 떠나 있다.
남편과 이혼을 했는지 별거 중인지는 알 수 없다.
아이가 보고 싶어 김밥을 싸들고 왔으나 집에 들어가기가 뭣해 밤 깊은
시각에 공원으로 불러내 김밥을 먹이고 자신도 먹고 있다.
<다아 끝났어/이젠 엄마라고 부르지도 않을 거야>라는 아이의 말은
자신이 그 옛날 어머니한테 하던 소리여서 <어디서 많이 들어본
그 소리>이다.
감동적인 장면은 이 시의 뒷부분에서 펼쳐진다.
원망의 말을 하며 김밥을 먹던 <어느새 나보다 더 커버린 내 아이>는
어머니가 김밥을 입에 넣어주자 자기도 김밥을 어머니의 입에 넣어준다.
김밥을 매개로 두 사람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름달이 지켜보고 있다.

(4)

내가 살지 않는 집 위로
오랜만에 환하게
불 켠 둥근
방
보름달 속에 앉아
아이와 난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아듣는 귀엣말
피보다 둥근
진한 말
오래된 기도처럼
밤 깊도록
두런두런 끄덕끄덕

김밥을 서로의 입에 넣어주는 동안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되고,
때마침 보름달의 밝은 빛이 텅 빈 공원을 따뜻하고 아늑한 집으로 만든다.
두 사람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한데, <서로 알아듣는 귀엣말>은
곧 <피보다 둥근/진한 말>이다.
그래서 밤 깊도록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일까, 시의 끝 행은
<두런두런 끄덕끄덕>이다.
파괴된 가정을 봉합해 보려는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 시를
탄생케 한 것이리라.
언어의 집중력이나 시의 완성도를 떠나 참으로 구체적인 시이고,
그 진한 현실감이 가슴을 후려치는 바가 있다.
<다시 돌아가 몸 누일 집은 간 곳 없고>(「강가江에 울다」),
<패밀리 패밀리는 좋은 슬픈 거지 모두가 품이 그리운 情고픈 거지
서로의 가슴에 무덤을 파며 함께 모여 산다는 건 슬픈 좋은 거지>

(5)

(「우주 동물병원 가는 길」) 등 여종하의 다른 시구도 파괴된
가정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패밀리는 <좋은 슬픈 거>며, 함께 모여 산다는 것은 <슬픈 좋은 거>라는
시인의 인식에 공감할 독자는 직·간접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경험한 이 땅의 모든 사람일 것이다.
가족은 슬픈 운명공동체이지만 모여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는
기묘한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삶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위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우리 시문학사에 등장하는
아버지 중에는 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선 이도 있었고 이데올로기를 위해
가족을 내팽개친 이도 있었다.
노동자이건 농민이건 퇴출당한 실업자이건 치매 노인이건 존경의
대상이 아니면 연민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전영주가 <시와함께> 동인지 제6집 『빛의 城』에서
그린 아버지의 초상은 전통적인 아버지 상과는 사뭇 다르다.
아버지가 사라졌다고 남은 식구가 안도하는 가정은 참으로 불행한 가정이리라.
아니, 아버지가 사라짐으로써 평화가 찾아온 복된 가정이리라.

아버지 가시고 나서
우리 집은 참 편안합니다.
어머니는
살던 중에 요즘이 제일 좋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요?
대부의 마론 부란도를 서서히 잊어 가는 중입니다.
가끔 두통이 있습니다.
배꼽 속에 머리를 디밀고 디밀다보면 에구구
아버지 딱딱한 해골하구 박치기하는 통에.
「엘니뇨」 중에서

(6)

시인의 친아버지가 영화 「대부」에 나오는 마론 부란도처럼
한 가문에 있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분이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 그려낸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도 연민의 대상도 아니다.
어머니는 남편을 사별하고 나자 <살던 중에 요즘이 제일 좋다>고 하고,
시적 화자는 마론 부란도 같았던 아버지를 서서히 잊어 가는 중이다.
가끔 있는 두통의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버지 딱딱한 해골하구 박치기하는
통에>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의 아버지, 혹은 시인의 눈에 비친
오늘날의 아버지 상은 혐오의 대상일 뿐이다.
이 시 또한 가족이 해체되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어머니가 원망의 대상이며 아버지가 혐오의 대상인 시대는 과거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 현재이며 더욱 많이 해체될 미래이다.
가족 관계가 나타나 있는 시라고 하여 전부 다 이런 파국적인
가정사가 펼쳐질 리는 없다. 『정신과 표현』에 발표된 김성춘의 시를 보자.

형님과 칼국수를 먹는다
우정시장 뒷골목에서
흰 눈이 쏟아지는 날
너 형수 설득하느라고 참 애먹었다
형님은 조용히 조그만 카드를 내민다
<장기 기증 증명서>, 그 위로
흰 눈이 막 쏟아진다
꽃잎처럼 썩어갈 형의 오장육부
진흙으로 되돌아갈 나의 오장육부
「마지막 선물」 중에서

이 시는 두 가지의 상상을 가능케 한다.

(7)

화자의 형이 사후에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심하고서 기증자 명부에
이름을 올려놓은 것. 그리고 화자가 장기 기증을 받아야만 하는데 형이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 전자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후자의 경우도
간혹 언론에 보도되어 동기간의 정이란 저런 것이거니,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세태가 변하고 시속이 바뀌어진다고
한들 가족이란 이런 관계여야 하지 않을까. 피붙이의 유한한 생명을
불쌍히 여겨 잘 돌보아 주는 관계, 서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는 관계, 끊임없이 배려해주는 관계, 희생을 감내하게끔 하는 관계,
떨어져 있으면 내처 보고 싶은 관계. 궁극적으로는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는 관계. 이런 관계의 회복을 통해서 파괴된 핵은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김종태는 이 모든 관계를 어머니가 동짓날 해주었던 팥죽에 얽힌
추억으로부터 되살려내고 있어 내 가슴 잠시나마 따뜻해진다.
엄마, 팥죽이 먹고 싶어요.
어젯밤엔 양상추를 훔쳐먹었지요. 아무리 많이 먹어도 배가 고팠어요.
주인 할머니에게 쫓겨 숲을 가로질러 도망치다가 엄마, 당신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타고 팥죽을 먹으러 식탁 위로 올라가요.
썩은 동아줄보다 엄마 머리카락이 더 튼튼하네요.
「즐거운 동지」 중에서
『현대시학』에서 특집으로 마련한 <20인의 시인이 꼽은 새해 2000년
이 시인들이 주목된다>란에 실린 이 시의 <엄마>는 자기 희생으로
가정을 지켜온, 썩은 동아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튼튼한> 우리네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객지에 나와 맞이한 동짓날, <엄마>를 거듭 마음속으로 외쳐 부르며
떠올려보는 팥죽은 식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은……. 하지만 2000년대에는 가정 파괴 및 가족 해체의 사례가
지난 연대보다 더욱 늘어날 것이고, 이와 관련된 시 역시 지금보다
훨씬 많이 씌어지리라. 가정 파괴와 가족 해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우리 문학의 한 화두가 될지도 모른다.

(8)

이승하 196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 등이, 평론집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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