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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0.

젊은 시인, 젊은 시를 찾아서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05.10.06. 20:13:03

시란?:

1)

젊은 시인, 젊은 시를 찾아서

출처 : 현대문학 2000 년 5 월호 / 글 : 이승하

어느 시대나 참신한 내용과 독창적인 형식을 가진 시는 사물을 새롭게
생각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를, 보들레르를, 랭보를, 에즈라 파운드를, 김삿갓을, 이상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높은 곳에서 <권력과 영광>을 누리고 있던 선배들의 문학을 흉내내지 않고
새로운 문학을 모색한 그 시대의 이단아들이었다.
우리 시문학의 침체가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 오늘, 새로운 시정신으로
기성문단의 완강한 벽을 넘어보려고 줄을 타고 오르고 있는 젊은 문인들의
시를 찾아서 읽는다.
신춘문예 당선작들마저 도무지 새롭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 의아스러운데
미완의 대기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들이 쓴 작품이 비록 설익은 것이라 할지라도 애정을 갖고 읽고 평가해주는 것은
우리 시문학의 활로를 찾는 작업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90년 이후 등단자 가운데 가능성이 있다고 점쳐지는 신인의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해본다.
<새 천년을 여는 신예 시인 100인선> 특집을 마련한 『시와시학』에 작품을
발표한 노혜경은 1991년에 등단했으므로 신인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이의 시는 인식의 세계화로 말미암아 충분히 젊다. 많은 시인이
자폐증의 벽 속에서 독자와의 소통마저 포기한 채 방언에 가까운 말을 쏟아놓고
있을 때, 노혜경은 난민수용소의 소녀들을 외신 보도를 통해 보면서 운다.

모르는 소녀의 죽음 앞에
우주의 저울이 기울어졌다

내것이었을 수도 있었을 웃음과 그 모든 빤짝임의 생생한 과녁들이
만져보기도 전에 사라졌다

(2)

그래, 그것이다
나는 운다 억울한 눈물이 목구멍을 틀어막는다
왜 추억은 생기기도 전에 사라져야 하는가
「모르는 소녀의 죽음」 부분

모르는 이국 소녀의 주검 앞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아무것도 없다.
애도하는 마음을 가져보지만 그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면세계 탐구와 언어 조율에 대한 집착이 90년대 등단 시인 상당수를
강하게 억압하고 있었던 것을 상기하면 이런 식의 동정심과 감상벽이 설사
값싼 것이라 할지라도 나로서는 오히려 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지난 연대에 이웃과 이웃 나라 사람에 대해 너무 등한시했던 것이 아닐까.
세계의 중심에 나를 세워두고 나만을 탐색하던 <이기(利己)>의 문학에서
타자를 생각하는 문학으로 나아갈 때, 우리 문학도 세계의 문학과 어깨를
견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해보기도 전에 잃어야 했던 그 모든 슬픈 것들의 이름으로/네 천국에
꽃을 바치>는 노 시인의 곁에 착잡한 마음으로 나란히 선다.
형식상의 새로움은 『현대시학』에 실린 이순현의 시가 보여주고 있다.
시의 첫 연은 <(왼발 0, 오른발 1,)>이다.

백남준이 가는
그 옆으로 무수한
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01…0101…10101010
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01
함께 간다
서로 뒤엉키거나 끊어지지 않는
1과 0

비디오아트 화면 안에서의
0과 1의 나열은
뻘밭에 찍힌 새 발자국처럼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3)

분명한 세계 앞에 멈추고 서 있던
나의 1과 0의 세계

오늘도 이어간다
…010101…라면과 담배 일간지를 구겨 넣은 비닐봉지로
앞뒤의 시간을 툭툭 치며………0101000111……01010…간다
…1010…눈이 얼어붙어……010101…미끄러운…1101001……
…지구의 다른 귀퉁이를……01…살아간다…1001………………
「살아간다」 부분

이 시의 새로움은 백남준이 즐겨 이용하는 비디오, 그 기계를 작동케 하는
0과 1의 발걸음에 있지 않다.
화면 안에서 0과 1의 나열은 시작과 끝이 분명한데 나의 일상적 삶은
그럴 수 없다.
이진법의 규칙은 알고 보면 단순한 것이다.
백남준, 아니 비디오가 이룩한 세계와 명백히 다른 차원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가며, 내 삶은 이 땅에서 숨쉬는 동안에는 맺고 끊는 것 없이 연면히
이어진다는 인식이 이 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정보 전쟁이니 인터넷이니 세상이 온통 난리를 쳐도 인간은 지구의
다른 귀퉁이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담배를 피우고 일간지를 보며
그냥 살아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01로 끝나는 세계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세계에서 지금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뇌사>라는 시사적인 문제를
시의 소재로 갖고 온 권영준의 시도 재미있게 읽힌다.

무의식의 창문으로 여닫히던 눈동자,
정신을 놓친 온기들은
더 이상 투명한 눈의 창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견고한 인멸의 잠 속에서
모든 것을 숨죽여 듣고만 있다
이놈아 애비다 에미다 그건 부질없는 꿈이여……
깨어날까……

(4)

죽을까……
깨어날까……
죽을까……
망설이다
꺾어진 숨길을 헤집고
들것에 실려 나오는
마지막 호흡 한 톨
「견고한 꿈」(『시와사람』) 부분

뇌사자 처리 문제는 의료계의 오랜 난제였다.
다른 장기들은 멀쩡하고 특히 심장이 여전히 뛰고 있지만 뇌 기능이 정지된
뇌사자를 놓고 사망으로 처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우리나라에서는 최근에야 사망으로 결론이 났다.
이식을 기다리는 수많은 환자를 위해 뇌사자의 장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언론 보도에 시인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의식만 없을 뿐 오장육부 다 멀쩡하여 조만간 깨어날 것만 같은 자식을
눈앞에 두고 시속의 부모는 안타깝게 외친다.
<그건 부질없는 꿈이여……>라는 고딕체 활자 속에는 <너는 이제 사망
선고를 받은 거여, 산소호흡기를 떼어내면 너는 곧바로 죽게 되고
그럼 네 장기는 남들이 다 갖는 거여. 너의 소생을 기다린 내 꿈도 다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말았구나>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게 아닐까.
기적적으로 살아나기를 빌었건만 자식은 호흡 한 톨을 되돌리지 못해 숨을 거둔다.
뇌사자의 견고한 꿈과 부모의 더욱 견고한 꿈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
되었는가를 들려준 권영준의 시는 평이한 듯하지만 생명의 외경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생명의 외경? 이 순간에도 이 세계의 어디에선가는 장난삼아 방아쇠를 당기고,
사소한 일로 자살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미국 중고등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은 너무 자주 들어 뉴스 같지도 않다.
의자에 앉아 입 속에 권총을 들이댄다.
한 번 당겨볼까? 총구를 관자놀이에 대본다. 콧구멍에 쑤셔본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풍금소리. 달무리에 걸려 있는 붉은 십자가가 무너져 내린다.

(5)

무심코 새끼손가락에 대고 한 방 쏜다. 날아가버린 손가락 끝에서 가시넝쿨이
자라 나오고 핏빛 장미송이가 툭툭 불거진다. 고양이를 삼키는 쥐의 신음소리.
「플라스틱 지붕 위의 달무리」 부분

『시와사상』에 발표한 정익진의 시 앞부분이다. 시적 화자는 지금 자살을
시도하고 있다. 손가락이 날아갔는데도 계속해서 총기로 자살 게임(?)을 하고
있는 화자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시의 가운데 연은 <그녀는
주사바늘을 나의 눈에 꽂았다.
그녀의 애인은 내가 잠든 사이 내 귓속으로 염산을 부어넣었다.>인데 이런
충격적인 장면이 환기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이런 상황은 환상인가 영화
장면인가 가상세계인가 마약에 의한 것인가. 이런 의문에 대해 시인은
별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지만 나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갱 영화의 한 장면이건 마약중독자들의 세계이건 이러한 폭력과 광기는
오늘날 이 지구상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엄연한 현실임을. 따라서 정익진이
설정한 세계는 환상이나 가상현실이 아닌 것이다. 현실을 가공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 시가 너무 거칠어 깊은 사색으로 유도하지 못하는 것은 약점이지만
암담한 이 시대의 한 단면을 그려낸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이 만족할 만한 사회는 유사 이래 존재한 적이 없었다!
시인은…… 그렇다, 이 완악한 세계 혹은 견고한 체제에 대해 절망한
자들이기에, 시 쓰기라는 자해 행위를 통해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무정부주의자들이다.
시인은 남들이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제2의 모방자가 아니고 자신의 엉뚱한
생각을 주절대는 약간 정신 나간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 함에도 불구하고 뻔한 생각, 뻔한 표현, 뻔한 체험, 뻔한 상상……. 뻔하지
않으면 주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옹고집쟁이 같은 이 땅의 풍토. 그렇지 않은
시인으로 김민정이 있다.
『미네르바』 창간호에 발표한 시 2편은 이연주와 박서원의 영향 혹은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듯하지만 자아와 세계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이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발기한 개좆처럼 쇠꼬챙이들, 내 두개골 뚜껑을 째고
위아래로 후벼댄다 뇌척수액은 흐르자마자 마르고,
빈 호두껍데기 속에는 뒤엉켜 흐물거리는 효모들이

(6)

오그라들기 시작한다 맵지 않게 구워진 살갗이
몸을 벗는다 밤이 제 머리칼 끝에 핀셋을 달아 나를
안 아프게 건져낸다 사각형 틀에 넣고 얼린 얼음처럼
순백의 단단한 결정으로 나는,
링거줄처럼 늘어진 탯줄을 자근자근 씹으며
달아난다
「밤이 머리칼을 풀어 나를 찾는다」 부분

대충 읽으면 정신이상자의 독백 같다.
고트프리트 벤의 시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만 이 시가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독특한
상상력으로, 정교한 세공 기술로 <섬뜩하게> 표현해냈다는 데 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독특한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지도 모른다.
신경외과 수련의한테 몇 마디만 듣고서도 쓸 수 있는 시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이러한 극한상황이야말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이 세계의 현실이 아닌가. 세계의 모순과 대적해서 벌이는 싸움은 김민정처럼
<이제/아무도 나를 잡아당기지 못한다>며 거부하는 몸짓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위악적인 제스처가 지나쳐 과장된 느낌을 주는 대목도 간혹 눈에 뜨이지만
김민정의 시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악마와 싸움을 전개하여 참신성을 획득하였다.
지금 우리 시단에는 자연과의 친화를 노래하는 전통 서정과 일상적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깨닫는 소소한 진리에 너나없이 달라붙어 몰개성적인 시를 쓰고 있는
시인이 너무 많다.
문예지마다 일회용 컵 같은 시들이 가득 쌓여 있다.
시정신은 더욱 심원해지고, 시의 형식이 보다 새로워진다면 얼마나 시를
읽을 기분이 나랴. 평론가의 눈치를 보며 개성을 죽이려 들지 말고
문학적 혁명을 꿈꾸는 젊은 시인들이 대거 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은 김수영의 말마따나 영원한 배반자가 아닌가.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는……. 선배를 배반하고 스승을 배반하는. 랭보가 말한
견자(見者)는 배반자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7)

다섯 시인 외에도 고은경·김새나리·김종태·김행숙·김혜영·박현수·윤의섭·
이재훈·정복여·최치언 등 20∼30대 시인 10인의 신작을 좋게 읽었지만
이미 주어진 지면을 넘어섰으므로 언급할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이승하 196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며,
시집으로『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생명에서 물건으로』 등이, 평론집으로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학』『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등이 있다.
현재 중앙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작성 : 여명 문학회 / 김용호

글자 : 5,642자
낱말 : 1,297개
원고 분량 : 41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