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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8.05.22. 20:58:26   추천: 11
명시: 오은

키스

오은

아름다운 피조물 갑이
아름다운 피조물 을에게
기다란 모가지를 걸고
굳게 다문 을의 자물통에
말랑말랑한 열쇠를 밀어 넣을 때,
마찰력과 만유인력과 불가항력의
삼자대면이 시작되었다

갑의 아밀라아제가
을의 녹말을 분해하고
찰칵찰칵
눈을 감을 때마다
플래시가 터져
갑과 을은 조금 더 눈부셔지고

갑의 열쇠가 을의 열쇠를 휘감고
을의 열쇠는 피할 수 없는
염문에 휘말리고
두근두근
열쇠가 미끄러질 때마다
목울대가 떨려
갑과 을은 조금 더 벅차오르고

스물여덟 개의 건반들이
서로를 치고 켜고 주무르고
음악에 취한 나머지,
아름다운 피조물 갑과 을은
건반이 하나 더 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이 아름답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물통에서 빠져나온 열쇠가
각자의 자물통 속으로 들어가고
갑의 모가지는 짧아지고
을의 자물통은 굳게 닫히고
화학과 물리학과 생리학 수업을 마치는 종이
부끄럽게 울렸다

뒤돌아선 갑과 을이
등을 맞대고 서 있는 동안,
갑의 그림자가 을의 그림자 위에
슬며시 포개져 있는 동안,
관성의 법칙 속에서
정지된 시간 속에서
지구가 자전하는 동안,

저 멀리
아름다운 피조물 병과 정이
난생 처음으로 열쇠를 주고받으며
미학에 입문하고 있었다

출처 : 《시와반시》 (2008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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