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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MIN 2020. 08. 09.
 토스터기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0.03.29. 12:59:33   추천: 1
명시: 유종인

토스터기

유종인

양배추를 사서 겉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나는 토끼를 생각했다
이건 내게 없는 토끼가 내게 준 본능

제발 이 푸성귀 껍질들은 토끼에게 가라
음식물 쓰레기통에 처박혀 버리기 전에 드론처럼 탈주해라
토끼 눈에 띄어 야금야금 먹힌 뒤 주접 든 귀를 세우라

그러나 모든 풋껍질들은 자꾸 썩어가는 찰나,
메이드 인 차이나, 흰색 토끼가
오월 아침부터 싱크대 서랍장에서 내려와
제 짧은 꼬리를 기일게 늘여 콘센트에 꽂고는
나 몰라, 정말 나 몰라보는 거야?
아일랜드식탁 위에 흰 울음이라도 쏟아낼 듯
새침하게 웅크리고 열을 받는다

밥 대신 토스트가 먹고 싶은 딸의 주문이
드디어는 내게 없는 토끼를 불러내렸다
귀가 없잖아, 귀가 없어
그럼 식빵 두 쪽을 살포시 꽂으라고
타지 않을 만큼 타이머를 맞추면 말이야
잘 구워진 구수한 토끼 귀가 탁, 하고 귀를 세운다

아직도 제 몸에서 뭔가를 구워낼 줄 아는 반발심,
도끼를 든 분노도 아랫도리가 너덜너덜해진 우울도
허언증의 혁명도 지혈이 필요한 낭패도
우선, 우선, 우선
이 열선이 깔린 발코니에 들어와
맨발로 웅크렸다가 툭, 솟구칠 때의
그 환멸, 환영, 환호를
총기(聰氣)를 다시 세우려는 이 귀가 없는 토끼는
무수한 귀를 구워내느라 늘
발랄한 상상의 귀를 텅 비워 두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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