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날은 간다
서상영
손톱에 낀 때같이 봄날은 간다
내가 사랑했던가, 눈이 째져 여자가 안 꾄다던
키 작은 사내는 떠나고
머리맡에 남은 몇 장의 지폐와 손톱의 때
간밤 속절없이 몸이 달아오를 때 나도 몰래 사내의 등짝을 긁었었지
이젠 땀도 신음도 담배연기도 가라앉은 그늘진 관(棺)
이떡하지, 내가 내게 제사를 지내고 싶으면
꽃잎 한쪽 물고 나비처럼 덜렁댈까
바람 한 뼘 안고 새처럼 까불댈까
서랍에서 가계부를 꺼낸다, 김치 국물을 쏟은 적도 없건만
어느새 누렇게 변한 백지
담배 7만 5천 원, 휴대폰비 32만 원, 팬티 1만 2천 원 콘돔 7천 원
수입…… 어젯밤 불러젖혔던 노래처럼 진부한 살림
낙장불입의 잔고는 늘 바닥을 기는데
낡은 가계부 안에서도 봄날은 간다
뛰쳐나가듯,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면
여기저기 살구꽃 복사꽃 흩날리네, 봄날은 좋아
정육점 사내, 슈퍼여자, 주유소 사내
몇 년 동안 안면을 익혔지만
왜 나와 그들은 아직도 수상한 눈빛일까
여자의 마음? 여자의 정원? 여자의 동산?
나는 찻집 <여원女苑>을 지키는 관록의 여자
아유, 그래도 봄날은 좋아, 가끔은
나와 세상 사이에 놓인 유리가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앞
재작년 봄 순자가 심은 작약꽃이 검게 익었다
여린 꽃잎도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채
나이 스물의 순자가 떠난 것은 작년 여름
한 줌의 재로 바람으로 세상을 떠돌다
이 봄엔 나 몰라라 질퍽하게 피었지만
차 먼지에 얼룩진 꽃잎은 늘 어색해
왜 우리의 화장은 이리도 서툰 걸까
붉어진 맘이 눈시울로 넘어와 세상을 가린다
봄날은 또 저 멀리 산정에서 서성대는 안개떼로
콩 볶는 군인들의 총소리로
들에서 어정대는 농부의 몸짓으로 가는데
오늘은 또 어떤 인생을 어루만지며
작약꽃잎 한 장 날려보낼까
손톱에 낀 때같이 봄날은 간다
|
|
암호 
봄날은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