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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기(復棋)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0.02.25. 09:35:56   추천: 3
명시: 차주일

복기(復棋)

저곳을 이곳이라 고쳐 말하다

차주일

길은 네거리를 만들며 진화한다.
네거리는 사방으로 뻗는 화점이지만
모든 길이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

문명을 몰다 문명에 몰려 죽은 길
인적마저 끊겼지만,
“온갖 잡새가 모여든다”의 잡(雜)처럼
부수적(附隨的)인 것을 부수(部首)로 삼은
잡것들이 모여 대마를 이루고 있다.

이름도 없는 것들끼리 모여
잡초라는 이름을 얻고
한 번쯤 실패해 본 것들끼리 모여
주격을 되찾고 있다.

몸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이 아닌
몸 속 허기를 채우느라 코를 킁킁거리는 똥개
오줌 한 줄기 내갈긴다.

저곳이, 해마다 가장 먼저 싹 틔우고
가장 늦게 잔설 거두는 자리라는 것
말해 무엇하랴.
한 암컷이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누고
수줍음을 처음 만든 여자로 걸어 나간 곳임을
굳이 말해 무엇하랴.
이곳에서 길이 시작되었음을
다시 말해 무엇하랴.

나 이미 저곳으로 홀로 걸어와 우리로 서서
저곳을 이곳이라 고쳐 말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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