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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0.01.22. 03:31:10   추천: 3
명시: 도종환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도종환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그는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뜨겁고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이였다
달빛이 거대한 바다를 투명한 그물로 끌어당기듯이
그가 당기면 내 청춘은 속절없이 끌려갔다
그렇게 끌려가서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사랑은 짦았고 그는 갔다
그가 가고 내가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자작나무처럼 멀리서도 희게 빛났고
나는 양지꽃처럼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그는 존재 자체가 타오르는 불꽃이었고
나는 잉걸불의 희미한 불씨였다
그는 바위산처럼 단단하고 우뚝하였으나
나는 조약돌처럼 잔물결에 씻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가고 나는 남았다
왜 그는 가고 나는 남았을까

그가 있어서 한 시대가 열망으로 뜨거웠다.
그가 깃발을 흔들면 우리는 손수건이 되어 펄럭였다
언덕 위에서 쓰러진 그를 국화꽃에 뎦어 보내면서
한 시대가 그와 함께 가버리는 것인 줄 그땐 몰랐다
그는 가고 비에 젖은 꽃처럼 나는 남았다
그가 없는 날들은 길고 지루했다
그러나 그가 가고 내가 남아 여기 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열정이 식은 뒤에도 살아야 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일을 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러나 하찮고 사소한 일상을 물수건으로 닦아
빛을 내는 일 그게 내 삶이었다
나는 남아 내 안의 반역과 누추
세상의 비열함에 맞서기도 하고 마모되기도 하는
순간순간을 살았다 내가 남은
이유를 채우는 그게 내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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