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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무지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18.10.19. 00:34:02   추천: 1
명시: T.S. Eliot

황무지

T.S. Eliot

1. 주검의 매장(埋葬)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차라리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했었다.
망각의 눈[雪]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球根)으로 가냘픈 생명을 키웠으니.

여름은 소낙비를 몰로 슈타른베르가제를 건너와
우리를 놀라게 했다. 우리는 주랑(柱廊)에 머물렀다가,
해가 나자 공원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한 시간 가량 지껄였다.
내가 러시아 사람이라고요. 천만에 나는 리투아니아
출신이지만 순수한 독일인이에요.
어렸을 때, 종형(從兄) 태공(太公) 댁에 유숙했었는데
종형은 나를 썰매에 태워 데리고 나간 일이 있었죠.
난 무서웠어요. 마리, 마리,
꼭 붙들어, 라고 그는 말했어요.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갔지요.
산에서는 마음이 편하지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갑니다.

이 엉켜 붙은 뿌리들은 무엇인가? 돌더미 쓰레기 속에서
무슨 가지가 자란단 말인가? 인간의 아들이여,
너희들은 말할 수 없고, 추측할 수도 없어, 다만
깨진 영상의 무더기만을 아느니라, 거기에 태양이 내리쬐고
죽은 나무 밑엔 그늘이 없고, 귀뚜라미의 위안도 없고
메마른 돌 틈엔 물소리 하나 없다. 다만

이 붉은 바위 밑에만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그늘 밑으로 들어오라),
그러면 네 너에게 보여 주마,
아침에 네 뒤를 성큼성큼 따르던 너의 그림자도 아니고,
저녁 때에 네 앞에 솟아서 너를 맞이하는 그 그림자와도 다른 것을,
한 줌 흙 속의 공포(恐怖)를 보여 주마.
바람은 가볍게
고국으로 부는데
아일랜드의 우리 님
그대 어디서 머뭇거리느뇨
"일년 전 당신은 나에게 히야신스를 주셨지.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히야신스 소녀라고 불렀답니다."
― 그러나 그 때 당신이 꽃을 한 아름 안고 이슬에 젖은 머리로
밤 늦게 히야신스 정원에서 나와 함께 돌아왔을 때,
나는 말이 안 나왔고 눈도 보이지 않았고, 나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몰랐었다.
다만 빛의 한복판, 그 정적을 들여다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바다는 황량하고 님은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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