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은 무더웠다.
지루한 장마 끝에 지나치게 쨍한 햇살과 무더위 정말 찌는 듯 했다.
강원도에 갔다 오기도 했다.
글을 쓰기 직전의 나만의 탈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언제나 그러했다.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문 지루함은 글쓰기에도 지루하다.
서울에서는 보이지 않던 별빛마저 보이는 것은 물론 영롱하기까지 했던 것.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나다운 피서이고
짧은 서울 탈출의 여행이 아닌가 하고 내 나름의 위로가 되기도 했다.
대낮의 햇살도 눈이 부시는 듯 했다.
햇빛은 잘 드러내지 내면까지 그 이면을 드러내 벗기는 듯 이글거렸다.
너무나 강렬한 햇빛 아래선 무더위도 속수무책이다.
그러한 햇살은 너무 뜨겁고 뜨거워서 거리를 걷는 것조차 힘들 뿐 아니라
눈까지 찌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햇살을 사랑한다.
시종일관 나의 시 속에서, 내 초기의 시 속에 햇볕이란 시어로 최근까지의
시 속에 드러내지는 강력하고도 늘 파워 풀한 다정한 시어이다.
한마디로 간결하고 압축된 암시이고 반전이고 어떤 기교도 필요 없는
내 섬세한 감각의 빛이 된다.
그 빛 아래서 나는 나의 내면에다 사물을 감추려고 애쓴 적이 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는 나를 숨길 곳도 없었다.
그럴 땐 차라리 사물 앞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눈싸움을 벌이듯 소위 기
싸움을 벌이곤 했다.
그 싸움의 끝엔 말이 필요 없어질 정도로 하얗게 백지로만 남는 시간이
늘 놓여 있을 뿐이다.
빛이란 변하지 않고 내려 쪼일 분이다.
나는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참는다.
한때 어떤 색감으로도 그릴 수 없이 아름다운 것은 햇살이라고
아무리 그 태양열이 뜨겁게 내려 쪼이는 여름 한낮이어도
나는 양산이나 모자도 쓰지 않고 길을 걷는다.
너무 빛이 강렬하고 쨍해서 눈에 눈물이 저절로 고이고 말았지만
나는 이에 상관하지 않고 그저 해가 좋다.
젊은 시절 읽었던 릴케의 ‘가을날’에서의 해시계란 말이
너무 좋았던 적도 있다.
흐린 날이나 비 오는 날만 빼고 매일 뜨는 해이지만 매일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참으로 내겐 신선하고 참신하기까지 하다.
그 햇살을 받아들이고 그걸 만든 이에게 경외감까지 갖게 되어
나의 시에 자주 등장시켜 시를 만들어가던 나의 특허품 같던 해.
때로 나의 초기 시에선 창백하게 등성이에 걸려서 제 뼈가 마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 현란하기까지 한 빛, 그 빛 앞에 나는 이제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예전처럼 바라볼 수 있을지.
오른쪽 눈이 그 햇살의 감각을 받아들이기 싫은지 몇 년 전부터
사물이 뿌옇게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 병명을 알기조차 싫은 것이다.
더구나 남이 아는 것은 더욱 싫은 것이다.
너무도 예민한 나의 정정 상. 나는 나를 치료해야 할 병원에 가는 것은
더욱 싫은 것이다.
나의 오관을 열고 사물을 받아들이는 한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
여기에 맞선 보듯 시들을 내놓게 되었다.
뿌옇게 보인 오른쪽 시력 만큼 이나 절실한 그 무엇이
나를 등 떠밀었던 것이다.
이 시편들을 쓰면서 차라리 장마가 그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장마 속에서 주술처럼 나오던 작품이 ‘슬로우 비디오’였다.
환상적이고 불가해한 한편의 단편 소솔처럼 슬루우 비디오 보듯이 시
간은 가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고 폭풍 치는 날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창조해낸 사람이 아닌 실재의 인물이 이처럼 시속에
등장할 줄은 몰랐다.
죽은 사람을 바다에 놓아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 글의
근본 재료가 되어 다소 몽환적 세계를 그리고 싶었다.
잘 되고 되지 아니한 것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어쨌든 나는 쓰지 않고는 못 배기니까.
지상의 시간들은 잠시나마 왜 나를 이렇게 한 곳에 미치게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오래 전 한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지금 간직하고 있지는 않지만 내 기억 속에 남는 말은 또렷하다.
시인들은 어느 별로부터 온 사람들일까요? 어느 운명으로부터
사로잡힌 사람들일까요?
이 두 가지 질문 식으로 던진 말이 가장 생각난다.
사로잡힌 운명. 사로잡힌 영혼들은 모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는 시를 쓸 적마다 그 말이 생각나고는 했다.
이젠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 되어 버렸다.
시 한 편을 쓰고 나면 얼근 잊고 다른 작품을 또 쓰려고
세상에 숙제를 하기 위해 시인으로 태어났다는 돌아가신
원로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해도 그분이 쓴 시보다도 더 명답을 제시한 그 말씀만
나에게 남아 있구나 하고 공감하게 된다.
어떤 불가해한 것과의 싸움. 이긴 싸움도 한번 없이.
지는 싸움도 없이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간에 그저 운명대로 가고 있는
시인의 별에서 온 사람들.
시인들이 오는 하늘에선 햇살이 너무 투명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나의 눈을 찌른 것일까.
물은 곧 하늘이고 땅이다.
너무 투명한 가을 햇살이 오고 있다.
가을이 물 속에서 흔들리기를 한다.
하늘엔 유리조각이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이다.
이제 해에게서는 쨍 하고 금이 가는 소리가 난다.
지상에서는 그물을 받쳐들어야 할 것 같다.
너무 투명해서 깨진 종소리가 들리기 전에 말이다.
지상은 종소리로 가득 찼다. 가을이 어느덧 왔다.
빨리 여름날의 해를 잊고 또 다른 대상을 찾아가야겠다.
영상제작 : 동제
나오는 음악 : Blowin' In The Wind - Janie Frickie
암호 
햇살과 통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