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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중종대부터 선조대 초기에 이르는 시기를 살았던 사림의 일원으로 거듭되는 사화가 양산해낸 무수한 무덤들 위에 버티고 서서,
이황은 유학적 지식인으로서 스스로가 키워 왔던 꿈과 소망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렵게 유학적 지식을 학습하고, 고된 과거시험 과정을 통과하여 벼슬아치가 된 것은, 이황으로서는 단순히 입신출세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유학적 지식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이황이 관리의 길로 나아간 것은 자신이 갖추어낸 유학적 지식과 소양을 사회적으로 구현하여 내는 방법을 택한 것이지, 관직을 탐하여 벼슬아치의 길로 나아간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황은 이번에는 그의 벼슬살이 시기에 그가 직접 경험할 수 밖에 없게 된 또 한번의 사화를 앞에 두고 근원적 고민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을 터이다.
어쩌면 이황은 그러한 근원적 고민 속에서 정치권력의 한계를 절감하였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향촌사회에 기반을 둔 유학적 지식인으로서, 이황은 결국 유학의 목표란 무엇인가를 새삼스럽게 자문하여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유학의 목표는 두말할 나위 없이 자기를 아름답게 완성시켜 내는 것이고, 사회를 이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목표는 변경 불가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목표에 다가감에 있어서 어떤 수단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바꿀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수단을 선택하든 그 목표가 자기완성과 사회완성에 있는 것이라는 점만은 불변인 것이다.
벼슬아치로서의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난 늦은 밤중에 서탁 앞에 조용히 앉아서, 고단한 삶에 지친 백성들을 아픈 마음으로 지켜볼 때, 이황은 스스로 자신의 관리로서의 삶의 한계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만족도 얻을 수 없고, 사회 경영의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는 현실은 그의 고단함만을 더욱 증폭시켜 냈을 것이다. 그러한 사유의 과정을 통과하여 가면서 그는 벼슬살이에 대한 회의를 더욱 강화하여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성리학적 이치를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차라리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이 나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이끌어졌을 것이다.
원래 과거공부보다는 성리학적인 이치를 탐구하고 그것을 실천적으로 완성시켜 내는데 보다 관심이 많았던 이황이었다.
사화의 시기에 벼슬살이로 나선 사림의 지식인들은 사실 유학적 이상을 구현하는데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살아남는 것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전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목숨을 지탱하기 위하여 전전긍긍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이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이황은 사화의 시기 한가운데를 통과하여 나가면서, 초기 사림파 제현들이 그러하였듯이, 향리로 돌아가서 인격을 탁마하고, 후생을 교육하고, 향리를 중심으로 하여 풍교를 세우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취향에도 맞는 일이었다.
그런데 초기 사림파 제현들, 그러니까 초기 사림파의 선구가 되는 길재학단 사람들이 직면하였던 문제와 이황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길재 학단으로 대표되는 사림파의 선구들에게는, 성리학의 도덕적 이상성을 실천적으로 갖추어 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현안문제였다는 점은 앞에서 말하였던 바이다.
그들의 그러한 노력은 이황 시대에는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사림이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훈구가 도태되고, 척신이든 세도가이든, 사림을 끼고 세력을 구축하고자 노력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 이상성을 갖춘 실천 유학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는 그러한 도덕적 이상성을 갖춘 유학을 보다 철저하게 완성시켜 내고, 그 유학의 도덕적 이상성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현안문제로 등장하고 있었다.
유학이 갖추고 있는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스스로의 책무로 받아들여 완성시켜 내는 사람이 바로 퇴계 이황이다.
이황은 사림파가 발전시켜 온 유학적 이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최종적으로 완성시켜 내며, 유학적 지치주의를 관리의 몫으로 남겨두지 않고 원래의 사림파가 그러하였듯이 교육과 대민교화를 통해서 보다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으리라는 의식의 전환을 이룩하여 내었다.
김종직과 김굉필, 그리고 조광조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서, 향리에 터잡고 사는 재지 사족의 일원으로써, 사림이 각자의 향리로부터 교화를 이루어내는 방법만이 유학적 이상향을 보다 쉽게 이루어낼 수 있으리라는 선택을 하는 셈이라고 하겠다. 정치보다 교육과 교화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한 셈이라는 말이다.
이황이 서원을 건설하고 향약을 시행하는데 열심이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영남의 한 구석에서 그 흐름을 열어 나가기 시작한 초기 사림파는 처음에는 더럽혀진 유학을 부여잡고 그 광휘를 되살려 내는 데에 전력을 경주하였다.
개인적 수신의 논리를 강화하여 더럽혀진 유학의 이상성을 부활시키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자신감을 회복하였을 때, 초기 사림파는 중앙 관계로의 진출을 도모하게 된다. 그들이 회복시킨 유학적 이상성을 현실정치를 통하여 구현하여 내고자 하는 열망을 주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수양을 사회 완성으로 연결시켜 내는 통로를 이들은 정치의 영역에서 발견하여 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적 힘이 부딪히는 곳이다. 그 곳에서는 언제나 이상이 승리하지 않으며, 부도덕한 정치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현실정치의 부정성은 이황의 시대에는 사화와 같은 폭압적 정치 환경으로 실재화하곤 하였다.
사화가 없을 때에도 정치가 이상을 담아내는데 적절치 못한 경우는 왕왕 있었다.
그러한 정치적 부정성을 목도하면서 이황은 초기 사림파가 갖추고 있던 무기, 이른바 향리와 향리에서의 강학을 새삼스럽게 재발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향리로 돌아가서 강학하고 교화하는 것을 사회 개량의 무기로 삼게 되는 것이다.
향리란 재지사족으로서 그가 터잡고 살고 있는 곳이며, 생활을 통하여 그의 권위와 영향력이 실제적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향리의 사람들은 이해관계를 통하여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생활을 통하여 만나게 되는 것이므로, 보다 쉽고 안전하게, 그리고 보다 실질적으로 교화할 수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서원과 향약의 시대가 열리고 있지를 않던가? 서원과 향약 문화를 적극적으로 건설하여 나가기 위해 애를 썼던 이황은, 이른바 조선 중기라는 시대가 새로운 모습으로 개막되고 있음을 예민한 촉수로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원과 향약은 유학적 세계인 조선의 문화권을 다원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의 유교문화는 서원과 향약의 시대가 개막됨으로써 중앙집권적 구도를 벗어 던지고 지방 각지의 거점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다원적인 구도를 갖추어 나갔던 것이다.
이황의 시대에는 아직 그러한 문화는 본격적으로 개막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문화의 조짐은 심심치 않게 감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황은 그것이야말로 조선 중기의 '벽 앞에 선 유교문화'를 구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라는 판단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황은 그 두 가지를 자신의 무기로 선택하게 되고, 그런 이황의 선택은 조선중기를 바꾸어 내는 하나의 영향력 있는 문화형식을 완성시켜 내었던 것이다.
서원을 거점으로 하여, 지역에 웅거하는 대 유학자가 강학과 대민교화를 중심으로 하여 이끌어 나가는 새로운 세계, 더러운 정치 현실로부터 자유롭게 학문적 교감과 인격적 감화력을 통하여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세상－이황이 꿈꾸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한 이황의 꿈은 조선 중기를 완성시켜 내는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설령 이황이 그런 문화의 완성을 꿈꾸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그와 같은 선택은 결국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내고 말았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려 말기의 길재가 그러하였던 것처럼, 깊은 산골로 들어가 서원을 열고 강학을 함으로써 정치 현실과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신세계, 안전하고 이상적인 신세계를 만들어 나갔던 이 새로운 문화는, 사실 혁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임금 없는 유학적 이상향, 권력과 정치가 개입하여 들어오지 않는 유학적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규모의 유학적 이상향에는 유학적으로 성숙한 인격, 학생들의 스승과, 지난 시대의 유학적 성현들만이 군림한다.
현실 정치 속에서는 미숙한 권력과 더러운 이익 때문에 중심에 버티고 설 수 없었던 유학적 이상인격이 여기 이 깊은 산골의 작은 신세계 속에서는 중심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에 이르러 서원은 정치논리 속으로 깊숙히 빠져 들어가지만, 이황이 이 문화를 완성시켜 내었을 때에는, 서원은 정치논리로부터 독립된 신세계가 분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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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퇴계 이황의 학문적 이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