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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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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를 벗기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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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전금주 날짜: 2005.07.22. 13:53:05 추천: 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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엣세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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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벗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아주 뜻 깊게 생각하여 회자(膾炙)하고 있는 ‘서기 2000년’을 70여일 앞에 두고 바쁜 일이 있어 산에 오르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었으나 남한산성의 청량산에 목표(目標)를 두고 친구와 함께 성남 남한산성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네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산의 입구에 이르니 네 시 반이 넘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산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5분 여 올라가다 보니 산사(山寺)로 가는 안내판(案內板)이 있었다. 오늘따라 친구가 절 쪽을 향하여 산에 오르자고 제안하여 가는 길이었다. 나도 새로운 길로 가는 것이 뭔가 변화(變化)가 있을 성싶어 흔쾌(欣快)히 응하였다.
가는 길은 좁았다. 50여 미터를 걸어 올라가니 산의 좌측에 구멍이 나 있는 동굴 모습의 큰 바위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무언가 소원(所願)을 빌기 위하여 촛불을 밝힌 듯, 타다 남은 촛불과 타고 있는 촛불들이 빽빽이 차 있어 눈을 어지럽게 하였다. 거기에 이것저것 준비해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기원했다면, 떠날 때는 다른 사람들의 안위도 생각해서 그러한 것들을 다시 챙겨 떠나는 그러한 마음의 자세가 있어야 그들이 희구(希求)했던 것들이 이루어질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마음이 닿지 않은 것이 아쉽다.
조그마한 산사(山寺)에서 걸음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이 걸터앉아 쉬고 있는 자리 한 쪽 모서리 부분을 챙겼다. 거기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몸을 틀어 약간의 틈을 내주었다. 땀을 식히고 관음수(觀音水)를 마셨다. 이상하게도 미지근하였다. 별로 맛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 분위기(雰圍氣)였다. 그래서 그런지 물맛도 제 맛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시간도 없었지만 오래 남아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바로 일어섰다. 산사 위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성곽 주위를 빙 돌아가기로 하였다. 옛 조상들의 면면을 조금이나마 공유하고 싶어 나도 몰래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른다.
한 산등성이에 옛날에 적(敵)의 동정(動靜)을 살펴보았던 곳으로 보이는 빈터만 남아 있는 곳에 이르렀는데, 그곳엔 사진작가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널리 펼쳐진 단풍으로 이루어진 색채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어느 화가가 형형색색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 장관(壯觀)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내 마음을 더욱더 빼앗아 간 것은 우리들이 서 있는 곳을 중심(中心)으로 서쪽으로는 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넘어가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마치 조선시대(朝鮮時代) 이곳에서 병사들이 근무(勤務) 교대(交代)라도 하는 듯 거의 보름달 크기의 새로운 달이 솟아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부드러운 자연 속 숨소리들도 내 작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였다. 산에 올라 이런 모습을 보고들을 수 있다는 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내려준 복을 껴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모습과 소리들을 가슴이 아파 저미어 오도록 마음껏 껴안았다. 성곽(城郭)을 돌다 보니 무너진 성을 다시 쌓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이미 보수(補修)를 끝낸 것도 있었다. 얼굴이 찡그려졌다. 역사의 현장인데, 보수를 끝냈으면 뒷마무리를 제대로 해야 하는데 공사장 주변에는 여러 가지 건축 자재는 물론 각종 쓰레기들이 그대로 방치(放置)되어 있었다. 새로 보수하는 곳도 마찬가지였다. 속을 들여다보니 겉과 완전히 다른 깨끗하지 못하고 결코 튼튼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수하고 있는 모습이 못내 섭섭하고 못마땅하였다. 속도 겉처럼 철저한 보수를 하면 우리 후손(後孫)들이 얼마나 우리 시대의 그러한 장인 정신을 대대손손 기릴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적을 남긴 조상들이 얼마나 즐거워하겠는가. 사람이 속과 겉을 같이 하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리라.
이미 가을도 깊은지라, 해는 피곤한 몸을 바다 속에 맡기고 달은 자기 세상이라도 만난 듯 제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평탄한 길로 귀가하려다 눈에 월정사와 장광사라고 표시되어 있는 이정표(里程標)가 희미하게 들어와 마음을 바꾸었다.
조금 올라가니 왼 쪽으로 가면 월정사요, 오른 쪽으로 가면 장광사가 나오는 삼거리가 나왔다. 월정사가 규모도 크게 보이고 또 어감(語感)이 절이라는 분위기가 나서 그 쪽으로 갈 것을 제안하였으나 옆의 친구는 장광사를 권하였다. 거기에는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 준 어떤 어른의 위패(位牌)를 모셔둔 곳이어서 되도록 그 쪽으로 가서 들러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따랐다.
어둠이 깔린 길을 더듬어 장광사로 향하고 있는 도중에도 그 경사진 좁은 길에 두 사람씩 승차한 차들의 행렬(行列)이 끊이지 않았다. 경사진 길에 힘들어하는 차(車)에서 나오는 매연(煤煙)과 먼지와 싸우면서 올라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왕 내친걸음이니 목적지까지는 가야 하지 않겠는가. 절은 삼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오늘날의 거의 모든 한국의 절들처럼 이 절도 증축(增築)을 하는지, 개축(改築)을 하는지, 아니면 보수(補修)를 하는지 절이 어수선하고 정리가 되지 않는 모습이 주위의 조용한 산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두워진 상황에서 절에 가는 길이 이러다 보니 마음의 평정(平靜)을 찾을 수 없었다.
절 마당에 이르렀다. 친구는 바로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는 절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그곳 안을 들여다보고 자리를 떠 아래쪽의 소나무 밑 마루에 걸터앉았다. 이상했다. 걸터앉는 순간 어디선가 누군가가 내 귓전에 대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주는 것이었다.
‘몸의 때보다도 먼저 마음의 때를 벗겨야 하느니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을까, 아니면 마음에서 나오는 자성(自省)의 소리였을까? 나는 그 친구가 묵상(黙想)을 마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것은 같이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어둠 속이지만 들어갈 때보다도 얼굴빛이 더 맑고 깨끗해 보였다.
산사(山寺)를 빠져 나오면서 친구에게 내가 들은 말을 전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도 묵상 중에 그와 똑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평소에 많이 들었고 또 많이 해왔던 말인데, 산사에서 그것도 밤에 그 말을 들으니 왜 그렇게도 가슴에 와 닿는단 말인가. 분위기 탓인가? 아니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경종(警鐘)을 울리기 위해 던져진 값진 말인가? 사실, 현대인들 모두에 대해 말하기 전에 우주 속의 극히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 나는 얼마나 마음의 때를 벗기 위하여 노력했고 또 노력하고 있는가? 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무수히 많은 것들을 생각하였다. 사람이 어느 때는 멍하니 생각 없이 몇 시간동안 그냥 있을 때도 있지만, 또 어느 때는 아주 짧은 시간에 수 만 가지 일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말이 들려왔을 때, 그 짧은 순간에 그 동안 썩어 가는 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겉모습을 꾸미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왔는가 생각하니 정말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으며, 나의 더러운 모습을 남에게 보이면서도 다른 사람을 더럽다고 흠만 잡아온 나 자신을 돌이켜 보니 죄인(罪人)도 그렇게 큰 죄인이 없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가슴이 찔려왔다. 소름이 끼쳤다. 나이가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다. 나이가 들었으면 그만큼 나이 값을 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유치원(幼稚園)으로 돌아가 다시 도덕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는, 아니면 다시 태어나서 생을 시작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산이, 산의 절이 또는 어두움이, 아니면 내 가슴속에서의 외침이 이렇게 신선한 무거운 가르침을 주는구나 생각하니 늦게나마 그러한 깨달음이 고맙기만 하다. 그래, 이제라도 내 마음에 층층(層層)이 가득 쌓여 있는 때를 하나하나 벗겨 떼어 내도록 하자. 우선 나의 때를 벗기자. 나의 더러운 때를 말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다 벗겨낼 수야 없겠지만, 그 많은 때의 반절이라도 벗긴 다음 남의 때도 벗겨 보도록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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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4. 24. 전체글: 123 방문수: 727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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