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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숨쉬는 어느 곳이라도
마음이 한 자리에 있지 못할 때 나는 화랑에 간다.
그림을 '말 없는 시'라고 처음 정의했던 사람의
예지에 감탄하며 나는 화가의 영혼이 녹아 든
한 폭의 그림 앞에서 조용히 자신을 다독이는
시간을 갖는다.
가끔 한눈에 든다기 보다 왠지 마음이 가는,
궁금한 이야기가 담긴 그림 을 만나는 날이 있다.
그런 작품은 대부분 기어이 내 곁에 들이고야 마는데,
남의 이야기까지 모두 내 안에 두고 싶어하는 끝없는
호기심 때문에 글을 쓰고있는 것이 아닌 가 싶다.
철저히 야행성의 버릇을 가진 나는 시계의 초침소리만
이 깨어있는 한밤에 원고지 메우기를 좋아한다
차안에서나 사무실에서, 심지어는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메모를 하며 작은 생각들을 정리한다는
문인들이 많지만 조용한 집안에 혼자 있더라도 밝은
날에는 글이 써지지 않으니 답답한 일이다.
긴 여행중의 대합실 같은 곳에서 지루함을 잊어보려고
메모지를 꺼내는 때가 있지만 어릴 때 보았던 만화 주인
공의 얼굴만 어지럽게 종이 위에 그리고 있었을 뿐 글은
한 문장도 변변히 써보지 못했다.
그러나 꼭 생각을 문자로 형상화하는 장소만이 창작의
공간이라 할 수 있을 까.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들은 모두 어떤 모양으로든 내 마음속에 깊은
인상으로 정리되게 마련이니 내가 쉬거나 지나치는 모든
장소가 창작을 위한 공간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섞이기를 좋아한다.
친구들의 이야기에 같이 웃고, 슬퍼하며 그들과 한마음이
되는 기쁨은 글을 쓰는 데 커다란 힘이 되어 준다.
널려진 공간에서 각기 다른 사람의 체취를 느끼며 살아
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겁지만 무심한 척 모르는
사람의 곁에 앉아 그들의 대화를 훔쳐 듣는 재미 또한
각별한 것이다.
아이들의 하교시간에 맞추어 붐비는 버스를 타고 대화의
반은 저희들끼리 통하는 은어와 욕인 젊은 목소리에
어리둥절하거나, 한가한 공원 벤치 끄트머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인사를 트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로맨스를
곁눈질하는 일들이 모두 아기자기 한 글감이 된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스스럼없이 끼여 앉아 재미있고
다양한 글감을 얻는 매력도 크지만 그보다 평범한 사람들
의 꾸며지 않은 말과 행동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진솔한
인간미를 배우는 기쁨이 더 큰 수확이라는 생각을 한다.
글이란 참 묘한 것이다.
어려운 학위를 받고 문학에 대한 동서고금 의 이론을 섭렵한
사람의 높은 문장보다 문맹을 겨우 면한 촌부의 넋두리나
코흘리개 어린이의 서툰 일기가 더 크게 마음에 울림을
주는 일이 흔하니.
자신을 드러내는 글이 수필이기 때문에 좋은 글을 쓰려면
더욱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치를 배운 것만으로도
글쓰는 길에 들어선 일이 고맙기만 하다 .
이미 새벽으로 접어 든 시간. 새삼스레 내가 숨쉬고 있는
공간을 돌아본다.
장식장 위의 작은 사진 액자, 탁자 위에 누워 있는
수첩 한 권까지에 모두 따뜻한 눈길이 간다.
별 시선을 끌지 못하는 하찮은 물건들이지만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다가 어느 순간 나의 마음을 덥혀 주고
생각을 자라게 도와 주는 소품 하나하나가 소박하고 결
고운 수필로 다시 태어나 주는 날을 기대해 본다.
출처 : 류경희 <수필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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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내가 숨쉬는 어느 곳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