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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婢를 위한 비碑/수필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1.07.23. 19:17:57   추천: 1   글쓴이IP: 211.38.243.50
진안문학: 이용미

비婢를 위한 비碑
-이난향 비

이용미

행복은 스스로 만들고 느끼는 것이라지.
생각지 않게 어수선한 시간이 흐르고 있지만, 맑디맑은 하늘과
잔잔히 일렁이는 용담호 물결을 보는 날이 참 고맙고 행복하다.
전국 크고 작은 1만여 댐 중 5대 댐에 속하는 용담댐, 착공에서
완공까지 꼬박 십 년 세월에 1개 읍 5개 면이 수몰되며 얽히고설킨
갖가지 사연들을 펼치면 용담호 물결을 덮고도 남으련만,
그나마 실향민들 마음을 달래고 간직하고 싶어 네 곳 망향의
동산에 옮겨 놓은 서너 가지 유물로 어찌 다 달랠 수 있으랴.
그 중의 상전 망향의 동산으로 발길을 옮겨본다.
비 옆에 서너 살 박이 세워 키 재기를 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
높이의 조촐한 돌비(石碑). 옛 호조 참판 홍습의 몸종이었던
이냔향 비 앞이다.

큰 의미의 가족이란 꼭 혈연으로만 맺어지는 것은 아니리라.
주인을 위해 목숨을 바친 비婢를 위한 비碑(계집 종을 위한 비석)는
잠깐의 눈길을 주거나 아예 그냥 지나치는 사람 모두 무심하다.
처음에는 그녀가 피신했던 동굴 벼랑 아래 길가에 세워졌다가 살았던
마을을 거쳐 용담호가 담수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곧은 행실과 높은 덕을 실천했다고 전해지는 이곳 산정마을에 살던
홍 참판 일가. 왜군의 만행을 피해 피난을 떠났으나
워낙 급히 서두르다 보니 생활 도구는 물론 먹을 것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였다.
이런 난감한 일가를 위해 난향은 어두운 밤을 틈타 살던 집으로
식량을 가지러 갔다가 이미 불타버린 집터에서 왜군에게 붙잡히고 만다.
왜군은 홍 참판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온갖 수모와 함께 고문했지만,
난향은 끝내 대답하지 않고 기어이 혀를 물고 자결해버린다.
이에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1604년)는 난향에게 정려를 내린다.
그 후 해주 판관으로 부임 받은 홍 참판 후손은 난향을 생각하며
집에 있던 노비들을 모두 풀어주고 남양 홍씨 문중에서는
1971년 현재의 비碑를 다시 세우기까지 한다.
조선 후대까지도 노비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성씨가 있으며
난향蘭香이란 이름을 보면 사비보다는 몰락한 가문의 관기官妓로
홍습의 애첩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몸종이든 기생이든 목숨을
버릴 수 있을 만큼의 대우를 받지 않았을까?
진정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은 주인을 위해 목숨을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실로 아끼는 마음 없이 노비들을 풀어줄 수 있을까?
가문을 위해서라면 사적인 정 같은 것은 무시하기 일쑤인 문중에서
몸종을 위한 비석을 다시 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다.
Me-too니, 갑질이니 상식 밖의 뉴스를 대할 때면 4백여 년 전의
이난향과 홍참판 일가를 생각하게 된다.
신분과 서열의 관계를 넘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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