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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촌티/수필
글쓴이: 김용호  날짜: 2021.07.23. 19:15:31   추천: 1   글쓴이IP: 211.38.243.50
진안문학: 남궁선순

촌티

남궁선순

어릴 적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하늘만 보이는 조그만 시골이었다.
자갈이 깔린 신작로 사이로 군데군데 모여 있는 초가집·양철집·
드물게 보이는 기와집들. 새벽을 알리는 닭 울음소리에 하루가 열리고,
집집마다 밥 짓느라 내품는 연기가 안개처럼 동네를 감싸고돌았었다.
봄이면, 모내기 밥을 머리에 이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아낙네들의
발걸음이 바쁘고 가을엔 추수한 곡식들을 동네 신작로에까지
멍석 깔아 널어 말리는 누런 나락과 붉은 고추들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닷새만에 돌아오는 장날은 그때의 정겨움이 담겨있는 전시장이다.
인근 산골사람들이 수십 리를 논길·밭길·산 고갯길을 넘어
첫 새벽에 길을 나선다.
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머리와 지게에 이고지고, 큰 장을 볼 양이면
소달구지로 또는 콩나물시루 같은 덜덜 거리는 만원버스에
짐을 싣고 모여든다.
어머니나 할머니에게 눈깔사탕이나 신발이라도 하나 얻어
신으려고 따라나서는 아이들. 도시로 보낸 자식들 월사금과 하숙비를
마련코자 하는 주인의 손에 끌려오는 소나 염소들.
전국의 장날을 찾아다니는 장돌뱅이·거지·상이용사들로 평소
한적하던 장터에는 싸전·소전·옹기전·나무전·포목전·생선전·
대장간 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종류의 물건들로 꽉 차게 된다.
“싱싱한 명태가 있어요”
“어서 오세요”
“한 마리에 얼마여” “싸게 줘”
흥정하는 소리, 호객하는 소리들로 왁자지껄 장날이 시작된다.
그 중 큰 구경거리는 동동구루무 장사와 울릉도 호박엿장사의 가위소리이다.
알이 없는 뿔테 안경과 주먹코엔 시커먼 콧수염을 달고, 등에
진 북을 발로 치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었다.
그들이 파는 코티분과 동동구루무는 돈푼깨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살 엄두도 못냈었다.
그 화장품들이 얼마나 피부에 효과가 있는지, 울릉도 호박엿은
정말 울릉도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지금도 알 수 없다.
넋 놓고 구경하다보면 이 틈을 타 재미를 보는 것은 쓰리꾼이다.
장보려고 챙겨온 돈, 지고 온 물건 팔아 받은 돈들을 순식간에 털리고 만다.
호주머니에 있는 동전 몇 닢으로 국밥 집에서 신세한탄하며 막걸리
몇 잔 들이키고 단골집 찾아가서 외상으로 물건을 산다.
인심이 좋아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하며 “다음 장에 줄껴”하면
두말없이 외상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약속을 안 지키면 다음 장날에 올수가 없으니 내 발로 찾아가서
외상값을 갚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 시절에는 거지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장날의 구경거리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의 각설이 타령이었다.
혼자 다니는 거지는 불쌍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여럿이 떼를 지어
다니던 거지들은 어느 상점 앞에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각설이 타령을 부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얼씨구절씨구 들어간다”
후렴까지 넣어가며 부르는 그 가삿말을 들어보면 뜻도 깊고 한도 많은데
재미도 있었다.
배가 고플 텐데 그 우렁찬 목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가게주인이나 종업원은 물론 각설이타령을 들어보려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모여들어 순간에 자연스러운 길거리 마당공연이 이루어진다.
기억을 더듬고 생각을 할수록 시골의 장날은 그립기만 하다.
장마다 꼴뚜기라는 말처럼 아무런 볼일이 없어도 동네사람들을
따라 나서는 구경꾼도 있다.
이 사람 저사람 만나 막걸리 한 사발씩 마시며 농사이야기, 자식이야기,
읍내로 시집간 딸도 만나고 친구도 만나고 큰 집, 작은집, 이모,
고모네 식구들도 만난다.
장날은 약속하지 않은 만남의 날이고 장터는 만남의 광장이다.
가정형편 어려운 어느 집 딸은 약장수 따라 가출했다는 이야기.
아무개는 무슨 농사를 잘 지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
누구는 죽었고 어느 집은 아들 낳았다는 이야기 등등.
집에 있으면 알 수 없는 세상이야기를 들으며 내 일인 듯 슬퍼하고
즐거워하다 보면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열린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덧 저녁파장이 다가온다.
사람들이 하나 둘 장본 것들을 짊어지고 집으로 향한다.
가뭄에 콩 나듯이 다니는 버스는 콩나물시루가 되어 차장의
“오라이” 출발 신호와 함께 신작로에 하얀 먼지를 일으킨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하며 막걸리 마시던 아저씨들
“취했으니 이젠 집으로 가야지” 하는 국밥 집 아줌마의 성화에
못 이겨 지게 목다리에 생선 몇 마리 새끼줄로 다랑다랑 매달고
논둑길 산길 따라 갈지자로 걷는다.
하루종일 마신 술이 올라오니 하늘에 떠있는 달도 흔들거리고 입에서는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절로 나온다.

그때의 밤하늘은 은하수가 손에 잡힐 듯 선명했었다.
밤이 깊어야 별이 더욱 빛나 듯, 세월이 더할수록 그 날의 추억들은
새록새록 새롭기만 하다.
이러한 향수가 있음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으며 아름답고 소중하다.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란 그 시대의 풍조에 떠밀리고 홀려,
서울사람 행세하며 살아온 30년 동안의 객지생활.
그리워만하고 살려고 하였으나, 끝내는 참지 못하고 다시
시작한 시골 살이. 아직도 도시의 잔 때가 묻어있지만,
내 몸속에 있는 촌티를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그냥 촌스럽게 촌스럽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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