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덕궁후원의 터줏대감
임두환
드높고 맑은 하늘이다.
차창너머로 가을바람에 풍요로움이 넘실거린다.
오늘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둘러보기로 한 행촌수필문학회의 문학기행 날이다.
서울에 있는 다섯 궁궐은 여러 차례 다녀왔지만 창덕궁후원 관람은 처음이다.
그곳은 어느 터줏대감이 위엄을 자아내고 있다하여 마음이 한껏 쏠렸다.
경복이 임금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인위적이고 중국적인 궁궐이라면,
창덕궁은 자연지형에 맞게 조성된 고풍스럽고 아기자기한 한국적인 궁궐이다.
창덕궁 정문(돈화문)을 거쳐 인정전에 들어서니 앞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에 따라 오른쪽엔 정일품(正一品)에서 정구품(正九品), 왼쪽으로
종일품(從一品)에서 종구품(從九品)까지 18개의 품계석(品階石)이 세워져 있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 염치불구하고 정일품(正一品) 품계석에 다가가서
‘찰칵, 찰칵～’ 추억을 담았다.
임금의 즉위식과 정무를 맡아보던 인정전은 웅장하고 화려했다.
인정전은 다른 고궁과는 달리 창틀에는 금색이 칠해져 있고, 천정에는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지 않는가.
화려한 서구 문물이 수려한 동양문물과 어울려도 이질감을 느낄 수 없었다.
인정전은 어찌나 화려하던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선말기 고종황제의 권위를 내세우고자 내부단장에 공을 들였다는 게
해설사의 설명이다.
우리는 창덕궁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원관람은 6일 전에 예약해야 하고, 해설사를 동반해야 가능했다.
창덕궁후원은 왕의 동산이라는 뜻에서 금원(錦苑)이라 불렀으나,
일제 때 비원(秘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우리 국민의 자존심차원에서도 후원(後苑)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리라 싶었다.
후원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보이는 첫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낮은 야산과 골짜기, 울긋불긋 펼쳐진 숲,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들의 합창,
오밀조밀 조성된 연못과 정자들이 어울려 찰떡궁합을 이루었다.
창덕궁 후원은 수 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정원이다.
조선 태종 때 터를 정하고, 세조때 연못을 파고 터를 넓혔으며, 광해군 때
여러 개의 정자가 지어졌다.
북한산 매봉 남쪽 능선의 골짜기에 조성된 부용지(芙蓉池)에 부용정,
애련지(愛蓮池)에 애련정, 반도지(半島池)에 관람정, 옥류천(玉流川)에는
소요정과 소요암이 있었다.
소요암에는 인조(仁祖)임금의 어필인 ‘玉流川’과 숙종(肅宗)임금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시(詩)가 새겨져, 임금과 신하가 이곳 물길 따라
술잔을 띠우며 풍류를 즐겼으리라.
관광버스에 오르며 창덕궁후원을 기대했던 동기는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후원의 터줏대감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후원에는 아름드리나무가 곳곳의 정자(亭子)를 보듬고 있는데
200여 년이 된 나무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래도 300년∼400년쯤은 되어야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이곳에는 750년쯤 된 향나무를 비롯하여 600여 년의 다래나무,
400여 년의 회화나무, 200여 년의 뽕나무가 문화적, 역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로 보호받고 있었다.
내가 애타게 찾았던 터줏대감은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750세의 향나무였다.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 6m로 오랜 세월, 만고풍상(萬古風霜)을 겪으면서
남쪽가지는 잘려지고 북쪽가지는 뼈대만 남아 있었다.
동쪽방향으로 살아남은 가지는 삐뚤어지고, 휘어지고, 서로 엉켜 있어,
마치 용트림을 하는 형상이었다.
어찌나 우람하고 기개(氣槪)가 높던지 그 위용(威容)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문학기행에 나선 우리 일행은 특별배려로,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는 600여 년 된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8호)를 볼 수 있었다.
처음 대하는 백송나무는 참으로 신기했다.
멀리서보니 나무에 하얀 페인트를 칠해 놓은 듯했다.
나무 높이 15m, 둘레는 2.1m로 밑동 75cm부근에서
V자 모양으로 갈라져 있었다.
잎은 3개씩 뭉쳐나는 삼엽송(三葉松)으로 어렸을 때의 껍질은
회청색을 띠다가 어른나무가 되면서 회백색으로 변한다고 했다.
이 나무는 만나보기도 어렵지만 하얀 껍질 때문에 백의민족의
정서에 맞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내 고장 진안(鎭安) 사옥(舍玉)마을에도 수호신(守護神)인 당산나무가 있다.
마을 위뜸 길가에 서있던 팽나무(300여 년)로 해마다 한 차례씩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던 수호목(守護木)이었다.
그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1973년 새마을사업으로 농로를 확장하면서
생이별을 해야 했다. 요즘 같으면 외과수술을 해주는 등 좀 더 관심을
가졌을 터인데, 생각할수록 마음이 짠해진다.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말이 있다.
이번 문학기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마음에 담아왔다.
창덕궁후원의 터줏대감처럼, 겸손함과 넓은 아량으로 남은 인생을
배려하며 살아야겠구나 싶었다.
|
|
암호 
창덕궁후원의 터줏대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