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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다리꽃
윤재석
5월, 우리 집에도 꽃이 피었다.
울안의 작은 터를 이용해 봄이면 상추를 심고, 고추나무 30여 포기를
가꾸어서 반찬거리를 얻는다.
고추나무는 처서 무렵이면 뽑아 일찍 정리를 하고, 무를 심어
김장을 할 때면 배추와 같이 김치를 담근다.
장다리는 배추나 무를 김장철에 뽑지 않고 씨받이용으로
그 자리에 놓아두면 겨울을 지내고 봄이면 꽃이 피어 열매를 맺는다.
이는 옛날 시골 농촌에서 배추와 무의 씨를 얻는 한 방법이었다.
지난해 가을에 무를 뽑을 때 하도 작아서 그대로 놓아 둔 무 두어 개가
지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끈질긴 생명력을 간직하며
살아나 꽃을 피운 것이다.
장다리꽃을 보니 어릴 때 시골에서 보았던 모습이 생각났다.
무나 배추씨를 얻기 위해서 일부러 장다리용으로 가을에 뽑지 않고
그대로 채소밭에 놓아두면서 겨울이면 행여 얼어죽을까 걱정되어
볏짚으로 덮어두었다.
추운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면 무 장다리는 하얀색과 보라색으로,
배추 장다리는 노란색과 흰색을 머금고 꽃을 피웠다.
간식거리가 별로 없던 때라 장다리의 줄기를 꺾어 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장다리의 줄기를 먹고 나면 혀와 입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풀을 먹은 소와 흡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철부지 생각이었다.
무와 배추씨를 얻어 다음 농사를 지으려는 것인데, 꺾어서 먹다니
농사를 못 짓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희희낙락하던 꼬마 친구들이 지금은 내 옆에 없다.
까까중머리에 바지저고리를 입고 고무신을 신던 그 시절, 때도 모르고
뛰놀던 꼬마 친구들을 다 불러모으고 싶다.
우리 집 장다리꽃에 벌 한 마리가 날아와 꿀을 따려고 주위를
맴돌고 있다.
장다리는 벌에게 꿀을 주려는 준비가 다 된 듯 벌을 기다린다.
벌이 장다리꽃에 내려앉자, 장다리는 벌에게 꿀을 주고 있다.
나는 어릴 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지켜보았다.
장다리 줄기를 하나 꺾어 맛을 보았다.
그때는 이것이 참 맛이 있었다.
입 속에 넣어 보니 매운 맛이 났다.
그런데 옛 맛이 아니었다.
그 옛날 맛은 어디로 갔을까?
산 좋고 물 좋은 청정의 자연에서 자란 그 맛은 글로 표현은 못해도
머리에는 또렷이 남아있다.
환경 탓인지 이 장다리 맛은 어릴 때의 맛이 아니다.
지금은 온갖 조미료에 혀까지 변했을 것이니 제 맛이 아닌 게
어쩌면 당연 한지도 모른다.
이 꽃 저 꽃으로 옮겨가며 꿀을 따는 벌의 모습에서
한가로움이 묻어났다.
어디선가 다시 벌 한 마리가 찾아 왔다.
뒤를 이어 벌들이 날아와 열심히 꿀을 따고 있다.
장다리꽃 또한 아무 투정 없이 꿀을 주면서 벌의 귀에 속삭이는 듯했다.
꿀은 줄 테니 많은 장다리 씨가 맺도록 도와 달라는 표정이었다.
나비와 벌들은 꽃 속의 꿀을 냄새로 알아낼까, 아니면 눈으로 보고 알까?
신통한 재주를 지닌 녀석들이다.
한 마리는 조금 있다가 멀리 날아가 버렸다.
남은 벌들은 관여치 않고 장다리꽃 속으로 들어가 열심히 꿀을 따고 있다.
나는 이 벌들이 언제까지 꿀을 따는지 가까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나 지루함도 잊은 채 장다리꽃과 벌의 어우러진 모습에
푹 빠졌다. 한참 뒤 몇 마리 벌들이 날아갔다.
내가 옆에 있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 같다.
장다리꽃과 벌의 모습에 내 생각만 하고 너무 오래 앉아 있었나 보다.
벌이 떠난 자리는 바람도 없고 소리도 없이 아무 여운도 없다.
떠나는 너를 잡을 수는 없으나 다만 빨리 돌아와 장다리꽃과
한 몸이 되어 꿀 따는 모습만을 다시 보여 주면 좋겠다.
그리고 멀리는 가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부탁을 했다.
꽃이라도 꿀이 있는 꽃이 따로 있는지, 화단 옆에는 장미가
붉은 빛을 자랑하면서 피었고, 화분에는 서양난이 꽃대마다
하얀색을 뽐내며 꽃을 피우고 있지만, 나비나 벌이 찾아와
꿀을 따는 모습을 보기 어렵다.
이 꽃들은 탐스러워 보기는 좋아도 꿀이 별로 없는지 벌이나
나비가 잘 날아들지 않는다.
장다리꽃은 작고 별로 볼품이 없는데도 나비나 벌들에게는 크고
탐스러운 장미나 서양난 보다는 인기가 좋다.
나의 기다림은 벌들에게도 전달이 되었는지 다시 찾아 왔다.
장다리꽃과 많은 벌들이 어울려 함께 놀고 있다.
초봄이라지만 여름 날씨처럼 덥다.
벌은 열심히 꿀을 따는데 나비는 오지 않는다.
이곳에 장다리꽃이 있는 것을 몰라서일까?
장다리꽃의 아래부위에는 아직 덜 익은 무씨가 파랑색 긴 주머니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장다리꽃은 시들 때까지 찾아오는 벌들에게 꿀을 줄 것이다.
무씨가 영글면 올 가을에 다시 우리 집 작은 터에 두어
고랑을 만들어 심으려 한다.
장다리꽃이 내년에 다시 피면 또 나비와 함께 벌이 찾아 올 것이다.
나비와 벌이 한데 어울려 꿀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내년에 필 장다리무에는 거름도 많이 주고 짚으로 덮어주면
튼실한 장다리꽃이 피리라.
겨울의 추위를 온 몸으로 이겨내고 봄이면 꽃을 피워, 벌과
나비에게 꿀을 주고 농부에게 알차게 영근 씨앗을 주는 장다리꽃처럼,
나도 그런 삶을 살고 싶다.
세월은 화살처럼 달려가고, 나는 나이는 들어가며 귀 밑 머리가
하얗게 변해간다.
윤재석
대한문학으로 등단
대한문학작가회 회원
진안문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영호남수필문학회 회원
수필집 :〈삶은 기다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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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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