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의 일기
신팔복
초등학교 1학년인 손녀를 학교에 보내고 손자의 고사리
손을 잡고 아파트 내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갔다.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선생님이 나오셔서
“성준이, 머리 깎았네! 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예쁘다는 칭찬을 들은 손자는 신이 나서 잽싸게 뛰어 들어갔다.
큰아들 내외가 미국으로 여행을 떠나 아내와 나는 서울에 올라와
손자 손녀를 돌보고 있다. 어린이집이 끝날 때까지는 한가한 시간이다.
아내가 청계천에 가보자고 했다. 목동에서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역에서 내렸다.
세종대로 사거리에 서니 이순신 장군의 동상 뒤로 멀리 북악산이 보였다.
동아일보사를 지나 청계광장으로 찾아갔다.
청계천의 물이 시작되는 곳이다. 물길을 찾아 계단으로 내려갔다.
인공으로 만든 폭포에 맑은 청계수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공기가 무척 시원하고 쾌적했다.
이렇게 좋은 곳이 서울 도심에 있다니 정말 잘 찾아 왔구나 싶었다.
가수의 노래가 빌딩 사이로 울려 펴졌다.
광교로 올라가니 마침 KBS라디오 “함께해서 좋은 날”을 이금희
아나운서 진행으로 생방송을 하고 있었다.
젊은 세 명의 가수가 기타를 치며 멋진 팝송을 불렀다.
다리 위에는 한낮인데도 의자에 앉은 사람들이 빼곡했다.
그들 사이에 끼어 박수를 치며 노래를 듣다가 다시 물길로 내려갔다.
청계천은 한강 물을 끌어다 정화해서 이곳으로 흐르게 하고,
중랑천과 합쳐서 다시 한강으로 흘러 나간다.
복원된 길이가 약 6km에 이르는 청계천은 조선왕조의
역사와 함께하는 곳이다.
태종의 도성과 개천 정비, 세종의 수표 설치, 영조의 개천 준설,
정조의 화성행차 등 많은 일이 얽혀있다.
정조의 능행반차도가 벽면에 길게 그려져 있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모친인 해경궁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의
현륭원을 다녀오는 과정을 상세히 의궤에 그려놓았다.
창덕궁을 떠나 이곳 광통교를 건너 화성으로 가는 그
때의 모습이 자세했다.
이 능행반차도는 김홍도 등 당시 일류 화가들이 문무백관 등
1,779명과 779필의 말이 따르는 것을 세밀하게 그렸다
한다. 왕조의 위엄과 신하들의 질서를 장엄하게 표현하면서도
낙천적이고 자유분방한 인물이 잘 묘사되어 있어 실제상황이 연상되었다.
복식, 의상, 악대구성 등 귀중한 궁중의 역사자료여서 감명 깊었다.
마치 내가 말을 타고 임금님의 행차를 뒤따르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엎드려 숨죽이고 용안을 올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조는 평생 얼마나 아버지를 그리워했으며 할아버지 영조를 원망했을까?
마음이 숙연해졌다.
슬픔을 안으로 새기며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며 홀로된
어머니를 위로했을 것 같다. 내 중학 시절 담배창고로 쓰던
임시극장에서『사도세자』란 영화를 봤는데 어린 정조가
한밤중에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마당으로 나와 뒤주의 옹이구멍으로
음식을 넣어주며 흐느껴 우는 장면이 떠올라 갑자기 억장이 무너졌다.
분명 생이별을 겪은 정조임금이었다.
수표교로 내려왔다.
수표교는 세종대왕께서 다리 옆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서
수표석(水標石)을 세우면서 불리게 되었다 한다.
돌기둥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새겨 흐르는 물의
높이를 측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석이다.
수표석은 청계천 복개공사 때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보존하고 있어
오늘은 볼 수 없었다.
측우기를 만들어 강우량을 쟀고, 수표석으로 개천에 흐르는
물을 조사해서 홍수에 대비했으며, 백성이 편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를 살폈다.
가뭄이 계속될 때엔 백성들을 위한 기우제도 지냈다는 기록을 보면
세종이 얼마나 백성을 위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글 창제뿐만 아니라 과학기술에도 탁월한 관심을 가졌던
역사상 위대한 임금이었다.
당시 말 시장이 있었다는 마전교(馬廛橋)를 지나 14번째 다리인
오수간교로 올라왔다.
약 3km를 걸었다. 청계천은 버들치와 피라미들이 숨바꼭질하듯 놀았고
하류 쪽에는 유속이 느리고 물의 양도 많아 붕어와 잉어들이 살고 있었다.
서울 복판에서 물고기가 살고 있다니 정말 친환경적이었다.
청계천이 복원되었을 당시에 보았던 생태환경과는 아주 달랐다.
버드나무와 여러 가지 나무가 커서 그늘도 좋았다.
냇가에는 억새와 갈대도 자라고 있었다.
물소리를 들으며 앉아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비둘기가 내려와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나뭇가지에 까치가 날고 참새도 먹이를 쪼아 먹고 푸드득거리며 날아갔다.
오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점심을 먹고 걷기 운동을 하고 오후 근무를 위해 빌딩으로 들어가는
젊은 사람들이었다.
찻길이라면 이렇게 걸을 수는 없다.
청계천은 서울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전국적으로 복개된 다른 하천도 이렇게 복원되기를 기대해본다.
평화시장으로 들어갔다.
걷는 길도 비좁은 빼곡한 상점엔 모자와 옷가게가 즐비했다.
물건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종류도 엄청 많았다.
누가 이런 물건들을 다 사갈까 싶었다.
아내의 옷을 사고 나와 보물 제1호로 지정된 동대문(홍인문)으로 갔다.
단청이 퇴색했고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몰려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 길을 건넜다.
600년이 넘은 한양도성으로 올라갔다.
전쟁이 있을 때마다 한양을 지켜주던 성이다.
허물어진 곳을 다시 고쳐 쌓아서 돌의 크기와 색도 달랐다.
북악산과 인왕산을 이어 남산과 국보 제1호인 남대문(숭례문)으로
이어지는 총길이가 18km나 되는 성곽이다.
멀리 고층건물 위로 남산 탑이 보였다.
창경궁과 창덕궁이 문이 닫혀 내부를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집으로 돌아와 손자의 손을 잡고 마트에 다녀왔다.
|
|
암호 
어느 날의 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