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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김치죽
신팔복
지금 이런 죽을 누가 먹기나 할까?
아내가 모처럼 김치죽을 끓여 상을 차렸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죽사발을 수저로 저으며 맛을 보았다.
맵지도 짜지도 않다.
옛날 먹어보던 추억의 맛이다.
어쩌다 귀한 손님이 오시면 양재기에 깨어 넣고 밥솥에 쪄내던
달걀까지 풀었으니 맛은 아주 구수했다.
어린 시절, 겨울철 우리 집은 점심에는 김치죽을 자주 먹었다.
눈 쌓인 어느 날, 사랑방을 다녀오신 아버지가 밥상 앞에 앉아서
텃논을 샀으니 이제부터는 김치죽이나 고구마를 먹으며
끼니를 아껴야 한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김장김치에 밥 한 그릇을 넣어 센 불로 푹푹 끓여
김치죽을 만들어 주셨다.
아버지와 나는 훌훌 불어 식혀가며 먹었다.
그래서 길들여진 김치죽이다.
동치미 국물과 함께 먹으면 더욱 입맛이 개운했다.
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았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강제징용 되어 탄광에서 일하신 아버지였다.
해방이 빨리 왔으니 망정이지 지하 깊은 막장에서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탄가루와 땀으로 멱을 감으며 얼마나
세상을 원망했으랴 싶다.
아마도 막장만큼이나 깜깜했던 자신의 운명이 두려웠으리라.
땅도 물도 선 이국에서 하루하루가 사선을 넘나드는 생활이었을 것이다.
귀국해서 손발을 걷어 부치고 일하시던 의지는 잘 살아야겠다는
일념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게를 짊어져도 “내 일이니까, 내 식구를 먹여 살리니까.” 하고
고통을 참으셨을 게다.
친구인 누구는 서당 글을 배워 면장도 한다면서 글을 못 배운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기셨다.
봄철 보리 한 말, 가을철 쌀 한 말을 내어주지 못해서 배우지 못하셨단다.
아버지 여섯 남매가 끼니를 이어가려면 서당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신 것 같다.
천자문을 사다놓고 어깨너머로 조금 깨우친 것이 힘이 되어 가정사도
기록했고, 동네의 반장과 이장도 맡아보셨다.
오직 자식만은 남부럽지 않게 키워야 된다는 바람으로 하나뿐인
자식 사랑이 매우 크셨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항상
주의(注意)하고 살았다.
농토가 느니 아버지의 할 일은 더 많아졌다.
즐거운 고생이 시작되었다할까?
이른봄부터 농사일에 나섰고, 심고 김매고 가꾸어 거둬들였다.
겨울에는 가마니 짜기와 멍석 만들기 등을 쉬지 않았고,
할머니는 삼베 짜고 할아버지는 소먹이며 집안 모두가
합심하여 가난을 벗어나려 애썼다.
곳간이 채워지고 형편이 차츰 풀리게 되었다.
재 너머 논을 또 사서 농토를 넓혀갔다.
촌 부자는 되었다.
농사일이 많아지면서 꼴머슴도 두었다.
항상 부지런하셨고 다른 사람보다 앞서갔다.
남의 일이라도 부당하면 따져서 바르게 잡으려는 강직한 성품이셨다.
내가 진안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전주로 나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던 7년 동안의 학비로 농토의 절반을 팔아야 했다.
피땀으로 일구신 농토인데 어찌 아깝지 않았으랴.
“논 두어 무엇에 쓰겠느냐?
너 뒷바라지하면 되는 것이지.” 하시던 말씀이 귀에 생생하다.
내가 교직을 출발할 때 “내 자식이 고등학교 선생이 되었다.”며
당신이 면장이 된 것보다 더 좋아하셨다.
내가 군대에 갔을 때도 두 번이나 면회를 오셨는데 건강하게
군대 생활을 마치라고 당부하셨다.
애지중지하시며 자식을 키웠듯이 손자들도 무척 사랑하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진갑을 맞으며 이승을 떠난 지 벌써 32년이 흘렀다.
요즘 같으면 더 사셨을 텐 데 몹시 아쉽다.
때늦게 불효를 후회하지만 소용없는 옛 일이 되었다.
김치죽만큼이나 쩍쩍 벌어져 거칠었던 아버지의 발뒤꿈치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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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아버지와 김치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