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亭子 한더위에 비실대는 나는 이맘때면 늘 그것을 그리워한다. 요즘처럼 더위가 기승을 부리면 더없이 그리운 게 바람결이 서늘한 언덕 위의 정자다. 그리고 속살 깊은 계곡의 시원한 시냇가다. 어린 시절 큰할아버지한테 귀여움을 받으며 천자문을 익히던 영성정永誠亭 마룻바닥의 시원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가끔 큰할아버지께서 향교에 가거나 출타하실 때면 정자 마루에 누웠다. 시시각각 제멋대로 헤쳐 모여를 하며 온갖 모양새를 연출하던 하얀 뭉게구름, 갑자기 변덕을 부리는 하늘과 먹구름, 거센 비바람을 동반한 소나기, 번쩍이는 뇌성벽력, 곱고 황홀한 일곱 색깔 무지개다리 그리고 정자나무에선 매미가 여름을 찬미했다. 앙증스럽고 예쁜 고추잠자리는 정자 난간에서 곡예를 하며 외로운 나와 동무해주었다. 고추잠자리 떼를쫓아 흐르는 바람결을 따라 상상의 하늘나라 여행을 헤일 수 없이했던 일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붙잡으려고 버둥대고 허우적거리던 가슴 아린 유년의 여름날 기억. 영성정은 우리 집안(宗中) 소유였고 우리 면내에서 아주 오래된 유일한 정자였다. 이백 살을 넘기고 수몰의 아픔을 안은 채 10여 년 전 해체 철거되었다.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자는 마을 사람들의 쉼터이며 여름철 사랑방 구실도 했다. 농사철 수다쟁이 아낙들의 빨래터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또한 이슥한 밤이면 봄바람에 물오른 마을 처녀총각들의 밀회 장소였으며, 바람난 홀아비와 과부의 달콤한 정분 공간이기도 했다.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가 지친 몸을 쉬어가기도 했다. 오가는 길손에겐 소나기를 피하는 안식처였고, 밤이슬을 피하려는 비렁뱅이들에게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하기도 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심한 밤이면 들짐승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한여름 삼복더위 뙤약볕 아래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들일을 하는 농사꾼들이 더위를 피하고, 땀을 식혔던 정자. 들녘엔 큰 정자나무가 한두 그루씩 있어서 그 그늘은 농부들의 쉼터가 되어 새참을 먹고 잠깐의 낮잠으로 피로를 풀기도 했다. 정자나무가 없을 경우엔 적당한 곳에 모정茅亭을 지어 활용하기도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새막, 원두막, 초막을 지어 간이 모정 역할을 하였다. 산골짝 나무 길목마다 정자나무 아래 널따란 바위에서 나무꾼들은 쉬고, 꿀잠을 자며, 한담을 나누고 삶의 고단함을 풀었다. 정자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사람들의 땀을 식혀주었다. 우리나라는 어느 곳이나 정자가 많은 편이다. 주로 놀거나 쉬려고 전망이 좋은 곳에 아담하게 정자를 지었다. 정자의 특징은 벽과 창이 없고 기둥과 마루 지붕만 있다. 햇빛과 눈비를 가리되 바람은 사방팔방으로 흐른다. 비켜 앉으면 하늘의 구름은 물론 달과 별과도 친구가 된다. 사람, 자연, 우주 어느 것과도 소통할 수 있다. 정자 옆에는 늘 어머니 마음처럼 넉넉한 그늘을 주는 느티나무 같은 큰 나무가 있었다. 정자나무라 불렀다. 주변에 크고 넓은 바위와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모정은 짚이나 새로 지붕을 인 정자의 일종이다. 규모나 시설 면에서 정자보다 작고 소박했다. 또 모정보다 작고 초라한 막幕이라는게 있다. 비바람을 가릴 정도의 임시로 지은 집으로서 움막, 초막, 산막, 상엿집, 천막 등을 일컫는다. 정자보다 규모가 크고 호화스런 루樓가 있다. 일상 누정樓亭은 높은 집을 일컫는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애절한 사랑이 깃든 남원 요천의 광한루, 의기 논개의 충정이 깃든 진주 남강의 촉석루, 아랑의 원혼이 서린 밀양 밀양강의 영남루, 김황원이 입을 다문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가 우리나라의 유명한 누각들이다. 누정으로선 서울 세검정, 경복궁 비원의 향원정, 담양의 면앙정, 함양의 농월정이 문화재적, 예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자는 대부분 단층이고 누각과 누정은 2층 이상이다. 각閣 또한 높다랗게 지은 큰집으로서 산 위나 바위에 지은 정각의 일종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기암절벽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날렵한 모양의 누각들, 신선들이나 도인들이 살 것 같은 집이다. 우리나라엔 중국과 개념이 조금 다른 임해각, 임진각, 통일각 등이 있다. 요즈음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공원이나 마을에 정자를 많이 짓고 있다. 현대식 건축자재를 사용함으로써 옛날의 정취나 멋은 없지만 좋은 현상이다. 어느 지방 정자들은 먼지의 유입을 막기 위해선지 유리창과 방충망으로 바람의 소통을 차단하고 있는 곳도 있던데 그것은 정자라 할 수 없다. 자연과의 소통이 끊기니 말이다. 문화공간이 많을수록 문화생활이 향상되고 문화국민,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임에 틀림없다. 한두 채를 덜 짓더라도 경관이 훌륭한 제자리를 찾아서,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지었으면 좋겠다. 바람도 통하지 않고 실개천도 없는 도심 한복판에 화려한 정자를 지어본들 그건 제대로 된 정자가 아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멋과 풍류를 정자에서 느끼고, 옛 선비들의 시상과 정서를 배우며, 세대 간世代 間 우주의 신비, 자연의 오묘함, 사람의 향기를 이야기하고 그 정신을 후손들에게 이어준다면 참 아름답고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나는 경남 쪽으로 나들이를 할 때 되도록 고속도로를 피하고 어김없이 옛길, 26번 국도를 이용하여 육십령六十嶺을 넘는다. 경상남도 함양군 남강 줄기를 따라 거연정, 농월정, 동호정, 군자정 등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멋진 정자에서 잠깐 쉬어가며 여러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옛날 내 고향엔 용담댐 축조로 인해 예스런 정자가 한 채도 없다. 3천여 명의 수몰민을 위로한답시고 수자원공사가 축조한, 모양새만 번지르르한 콘크리트 3층 망향각이 망향의 동산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따스한 목조건물에 비해 싸늘한 시멘트건물은 왠지 정이 가지 않는다. 경관 좋은 함정산 산록에 멋진 대일정垈一亭이나 금강정錦江 亭을 짓고 싶다. 고향을 잃고 떠난 수몰민들이 망향의 한을 달래고 서러움을 토해내며 울부짖을 장소, 애환의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슴푸레한 달밤에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가 버린 젊은 날의 추억과 희미한 옛사랑을 아쉬워하고, 때로는 자작시 한 수를 밤바람에 실려 보내며 인생을 즐기는 그런 곳이었으면 한다. 서럽고 슬플 때 찾아와서 실컷 울고, 즐겁고 기쁠 때는 파안대소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으면 한다. 먼 훗날 후손들이 찾아와 옛 조상들의 삶의 숨결을 느끼고, 우주만물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하는, 감성과 정서를 키우는 그런 의미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 정자는 휴식공간만은 아니다. 높고 알찬 꿈을 꾸는 장소다. 깊은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다. 반성하고, 계획하고, 실천하고, 다짐하는 공간이다. 새로운 출발, 시작의 공간이다. 또한 추억의 공간이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문학, 사람과 자연, 사람과 우주와 소통하는 이 세상에서 으뜸 가는 아주 멋진 공간이다. 출처 : 김재환 《금물결 은물결》중에서 영상제작 : 동제
암호 
정자亭子/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