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까시 꽃향기를 밟고 가신 어머니
오월의 나뭇잎은 화려한 봄꽃들을 여지없이 휘감아 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이른 봄꽃들은 꽃이 핀 뒤 잎이 난다.
그러나 늦은 봄이나 초여름의 꽃들은 잎이 핀 뒤 꽃을 피운다.
또 오월의 꽃은 가시로 무장하고 있다.
찔레꽃이 그렇고, 장미와 아까시 꽃이 그렇다.
완산칠봉 아래 동완산동 청학루 주변은 아까시 천국이었다.
오월 어느 봄밤, 잠을 못 이루던 나는 그곳을 서성이며 진한
아까시 향내에 취하였다.
낮에는 벌 나비가 꿀에 취하고, 밤에는 나 같은 불나비
가 몽유병 환자처럼 방황하며 카페인에 중독된다.
≪살얼음을 딛는 소녀≫란 책을 누가 청학루 난간에 놓고 갔을
까? 하숙집으로 돌아와 그 책을 단숨에 읽었다.
이튿날 친구에게 그 책을 가지고 저녁에 청학루로 가보라고 권하였다.
친구는 그 날 밤 그곳에서 책 주인을 만났고 열애가 시작되었다.
친구는 대학입시도 뒷전으로 미루고 길고 호된 사랑의 열병을 앓았다.
비극으로 끝났지만, 그로 인하여 공부에 소홀했던 친구는 손등에
자해행위도 불사했다.
그 풋사랑 때문에 1차 목표했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진로를 바꿔야 했다.
지금은 어엿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었지만…….
어제 내린 비로 하늘은 청명하고 산하는 더 짙푸르러졌다.
계곡에선 제법 물소리가 우렁차다. 잠 못 이루는 밤, 그때처럼 뭔가를
써보려니 심란하여 손에 잡히지 않는다.
불어오는 바람결 따라 창 밖 풍경소리가 나를 밖으로 불러냈다.
자정이 한참 지난 이 시각, 뜰에 서니 사월 보름달이 힘없이
산막을 비추고, 소쩍새는 나처럼 청승맞게 밤을 새며 울고 있다.
대바람 소리 청아하고 산골짝의 새벽안개 흰 비단처럼 드리워져,
어슴푸레한 산의 능선이 여인의 맵시처럼 부드럽다.
새벽 별은 달빛에 치어 얼마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달빛만 교교히 적막을 적시고 있었다.
이따금 산짐승의 울음소리가 숲 속의 고요를 깨웠다.
초가지붕의 박꽃은 달밤에 봐야 제격이듯, 아까시 꽃도 달밤에 보는 게
제격이다. 환한 보름달 밤이면 더더욱 좋다.
나는 오월을 사랑한다.
초파일이 있어서 좋고, 어린이날과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이 있어서도
좋지만, 생명이 꿈틀대는 신록과 젊음이 있어서 더 좋다.
그런데 올해 오월은 왠지 서럽고 비통하다.
5·18은 제쳐놓고라도, 소설가 박경리 선생의 타계와 지구촌 곳곳에서
들려오는 대재앙, 그리고 새 정부의 한미쇠고기협상으로 인한
어린 학생들의 촛불 집회가 나의 오월을 더 우울하게 한다.
평생의 은사님을 모시고 떠나는 단 하루의 여행, 40년간 이어온
그 중요한 약속마저도 지키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가슴이 메어지는 일이 이런 건가.
오늘이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드린 지 여드레째다.
건강에 큰 문제가 없던 어머니는 나에게 회한과 불효의 멍에를 지우고
그렇게 소리 없이 조용한 봄바람 따라 먼 길을 가셨다.
지난달 <할미꽃>이란 글을 쓸 때 두 분 할머니를
쓰지 말고 어머니만을 썼더라면…….
어머니의 올해 춘추 여든! 조금은 아쉽지만 그게 당신의 운명이려니
자위할 수밖에 없다.
시골 부잣집 둘째 딸로 태어나 공부도 어느 정도 하고
근천스럽지 않게 사셨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남자처럼 활달하고 시원스럽게
사신 어머니! 진취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앞서 가시던 어머니!
아버지와 불화와 갈등을 빚으며 황혼에 별거의 아픔까지 간직하신 어머니!
끝내 화해를 못하고 이승을 떠나 셨으니 얼마나 한이 되셨을까?
아버지를 용서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학처럼 훌훌 떠나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려운 시절,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도 우리 6남매를 훌륭히 키워
공직자 다섯과, 사업가 한 명을 만든 어머니다.
우리 6남매가 잘 자란 것은 건강한 몸과 훌륭한 정신을 주신 하늘 같은
어머니의 은덕이다.
아버지는 오랜 군대생활에 젖어 원리원칙 주의자시다.
포근하고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기보단 근엄하게 나무라고
질책하는 분 이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에 굶주렸던 우리 6남매를
늘 포근한 솜 포대기로 감싸주셨다.
아버지는 국군이셨고 큰아버지는 마을 이장이어서 인민군의 표적이 되었다.
6·25한국전쟁 때 어머니는 인민군을 피해 어린 나를 업고 남의 집
측간에 숨어 내 목숨을 구하고 그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하셨다.
60년 가까이 함께한 세월은 아까시꽃과 함께 막을 내렸다.
입관 때의 어머니 모습은 약간 야위었지만 아침 호수처럼
평온하고 고우셨다.
어머니는 수장된 고향 동네 뒤편 함정산 남쪽 기슭 양지 녘에
고이 잠드셨다.
멀리 어머니의 고향 마을 뒷동산이 보이고, 용담호 물 속에
잠긴 우리 집과 논밭이 잘 보이는 자리다.
네 아들과 며느리, 두 딸과 사위, 열다섯 명의 친손과 외손들이
이별의 눈물을 흘리며 보내드렸다.
내가 손수 짓고 쓴 묘비도 세웠다.
토·일요일과 초파일이 낀 황금연휴라 가까운 친족들에게만
어머니의 부음을 알렸는데 상상외로 천여 명의 조문객들이
어머니를 정중히 배웅해 주셨다.
어머니는 결코 외롭지 않게 떠나셨다.
“하도 답답해서 저는 지금 뜰에 나와 담배를 태우고 있습니다.
담배연기는 새벽을 재촉이나 하듯이 빠르게 하늘로 퍼져 날아갑니다.
어머니, 언제 어디서나 저는 당신의 큰자식입니다.
해마다 오월 현충일이 군경유가족 아픔의 날이듯 오월은 제게도
무거운 아픔의 달이 될 것입니다.
어머니! 몇 달만이라도 더 살고 백설이 흩날릴 때, 금강변錦江邊
눈보라 휘날리듯 가시지, 뭐가 그리 급해서 하필이면 계절의 여왕이라는
이 좋은 오월에 떠나셨습니까?”
2008. 5. 19.
≪전북수필≫ 68호(2009년 6월)특집 꽃 이야기 수록 작품.
출처 : 김재환 《금물결 은물결》중에서
|
|
|
암호 
아까시 꽃향기를 밟고 가신 어머니/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