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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꽃
기억하기조차 싫은 나의 서글픈 유소년 시절, 4월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호된 열병을 앓았다.
유년의 우리 집과 큰집 그리고 외가, 내 어린 날의 몹쓸 기억들조차
지금은 용담호에 수장되어 버렸다.
그러나 서글픈 4월의 유령 같은 기억은 그림자처럼 너무나 또렷이
각인되어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마을 앞개울을 건너 드넓게 펼쳐진 들판엔 푸른 보리밭이 바람에
파도처럼 일렁이고, 자운영이 빨갛게 피어 벌 나비를 불러들였다.
방천 둑을 지나면 파란 잔디밭과 모래자갈이 어우러진 강변이 있었다.
그리고 두 줄기 시내가 합수 되어 도도히 흐르는 강물, 그 강은
금강 상류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나른한 봄날, 종달새는 높이 떠 봄을 노래하고,
물 건너 대덕산 숲에선 산 꿩이 울었다.
강변엔 소먹이 풀들과 할미꽃, 클로버, 쑥 등 잡풀들이 지천으로 피었고,
모래밭에서는 개미귀신이 함정을 파고 사냥감을 유인하는 4월 하순의
나른한 오후, 학교에서 돌아와 목동이 되어 소꼴을 한 망태 베어놓고,
나는 풀밭에 누워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어수선하던 여섯 살 때 나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조숙하고 남달리 영특해서 큰아버지가 조기 입학을 시켰다고 했다.
아버지가 군인이었기에 어머니와 여동생은 부산에서 살았고,
나는 할머니와 백부모님, 사촌 형제들과 큰댁에 얹혀 살았다.
나는 소풍이나 운동회, 학예회가 싫었다.
다른 애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맛있는 먹을거리를 가져오고
응원도 했지만 나는 항상 할머니 혼자였다.
우리 동급생들은 두 살 많은 육촌형을 비롯하여 나이가 무려
다섯 살까지 차이가 나기도 하였다.
내가 제일 어렸다.
그 해 가을운동회 때 어머니와 같이 뛰는 100m 달리기 경주가 있었다.
어머니 대신 환갑이 지난 할머니와 함께 달렸으나 꼴찌였다.
왜 그리 서럽던지 북받치는 분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린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만 있었다면, 큰어머니만이라도 있었다
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책 한 권이 날아갔고,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 이튿날 학교에 가지 않고 외가로 도망쳤다.
외가는 십여 리나 떨어진 큰 내를 두 번 건너야 하는 곳이었다.
그 다음날외가에는 학교에 간다고 하고 뒷동산에서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한나절을 보내다 다시 외가에 들르니 할머니가 와 계셨다.
이유 없이 이틀이나 결석을 했더니 노처녀 임문자 선생님이 할머니한테
찾아와 사실을 알렸단다.
“학교 가기 싫어요!”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나니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할머니는 등을 토닥거리며“네 뜻대로 해라!”
나의 초등학교 1학년은 일곱 달만에 허망하게 끝났다.
나뭇잎이 빨갛게 단풍이 드는 10월 초였다.
큰집과 외가를 오가며 어머니를 그리다 그 다음 해 4월 또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는 할아버지 제사 때나 명절 때 등 1년에 한두 번씩 오셨다.
오랜만에 보면 여동생도 제법 많이 커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어떤지 상상조차 안 되었다.
매일 소꼴을 베었고 저녁이면 사촌 동생의 밥은 놋쇠 식기에
하얀 쌀밥이 담겼지만, 내 밥은 항상 덮개도 없는 그릇에 보리가 반이었다.
나는 소꼴도 베는데 왜 사촌 동생 밥그릇과 다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가 보내던 측은한 눈길을 잊을 수가 없다.
쌀밥이 먹고 싶으면 외가로 갔다.
외가도 큰집 못지 않게 머슴 둘을 거느린 부잣집이었다.
외가엔 인자하신 외할머니와 아홉 살 위의 중학생인 외삼촌과
여섯 살 위인 막내 이모가 있었다.
나를 몹시 예뻐했고 언제나 고기반찬과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본가와 외가를 오가던 3학년 어느 여름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또 하나의 남동생을 데리고 오랜 군대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외할머니께 인사를 간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시냇물을 두 번 건너야 하는데 학천鶴川은 작고 얕았으나 금강錦江은
크고 깊었다.
늦가을엔 섶다리를 놓았다가 초여름이면 다리를 헐곤 했다.
그땐 튼튼한 다리가 없었다.
아버지가 넓은 등을 내밀었다.
업히기가 영 낯설어 망설이자 큰 팔로 끌어당겨 나를 업고 강을
성큼성큼 건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아버지의 등은 왜 그리 크고 넓었던지…….
큰집에서 멀지 않은 새집으로 이사를 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나,
내 기억으론 아버지가 영 낯설었다.
아버지를 부르는 것도 어색하고 입이 잘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 회갑 때도 아버지는 오시지 못했다.
내가 다섯 살 때였다.
두 분 할머니가 아버지 어머니보다 더 좋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버지와 나는 5년 만의 만남이라 했다.
유년기 부모의 정에 목말랐던 나는 소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넘기면서도 그 갈증은 해갈되지 않았다.
나는 친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다.
두 분의 할머니께서는 일찍 할아버지를 여의고 4남매씩 기르고
가세를 번창시킨 공통점을 갖고 계셨다.
두 분 할머니로부터 근검절약과 자립의지를 배웠고, 인내와 용기, 자애,
사랑을 익혔다.
그러기에 두 분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친할머니보다 연치가 적은 외할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지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하염없는 눈물만 흘렸다.
할머니는 조종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나의 공군사관학교 입학을
어린애 마냥 기뻐하셨고, 건강하게 내 나이 스물 두 살 때까지
장수하셨다.
나는 할미꽃을 좋아한다.
할미꽃은 장미꽃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해바라기처럼 정열도 없다.
또 도라지꽃처럼 청초하지도 않고, 무궁화처럼 끈질기지도 않다.
이른 봄 양지 녘 어느 곳에서나 다소곳이 소박하게 피어나는
두 분 할머니를 닮은 꽃이 바로 할미꽃이다.
할머니 산소에 할미꽃을 심고 해마다 4월이면 할머니인 양 보러간다.
비료도 주고 잡풀도 뽑아주며 소중히 가꾼다.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년 시절 내가 수없이 건넜던 강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누워 계신다.
두 분이 가신 지도 어느덧 오랜 세월이 흘렀다.
키는 작고 목은 굽어 미인은 아니지만 선홍빛 꽃잎과 샛노란 꽃술은
어떤 꽃보다도 더 은은하고 자애롭고 아름답다.
집안 뜨락에 할미꽃을 여러 포기 심었다.
매화가 질 무렵 송이송이 피어나 자태를 뽐내더니 4월의 끝자락이 되자
시들어간다.
올핸 오랫동안 피어 있어 두 분 할머니를 어느 해보다 긴 시간 그리워했다.
오월이 사월을 밀치며 다가온다. 부모님은 살아계셔서 그런가?
부모님보다 오래전 돌아가신 두 분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것은 삶
과 죽음의 차이도 아니고, 촌수의 차이도 아니리라.
그것은 위대한 사랑과 정情의 힘일 것이다.
시들어 가는 할미꽃에게 사랑과 정성을 주며 내년을 기약한다.
“할머니! 외할머니! 보고 싶습니다.”
2008. 4. 30. ≪수필과비평≫ 99호 신인상 수상작.
출처 : 김재환 《금물결 은물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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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 
할미꽃/수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