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그림으로 그려 놓았던 어릴 적 꿈을 만나러 간다.
미완성이어서 온전한 꿈은 스크린 속에 살아남아 있다.
반세기 전, 꿈과 나는 서로 마주하던 동의어여서
꿈과 나 사이에서 굴러다니는 크레파스로
얼굴을 칠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한줄기 빛으로 모든 색깔을 섞을 수 있음을 처음 알고
4B연필로 판화처럼 눌러 그려놓은 앳된 얼굴,
벤허의 마차는 아직도 얼굴의 외곽선을 질주하고
입술선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꿈이 오늘보다 빠른 내일에 먼저 도착해 있듯,
총천연색으로 얼굴을 채색하여 꿈을 이루려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나를 만난다.
꿈이란 얼굴을 그리는 게 아니야,
꿈이란 영혼을 그리는 거야, 라며 개종할 때
내가 방치한 내 얼굴, 관객의 거리를 두고서 대면하면
몽당연필로도 닿지 않는 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왜 얼굴만 그리는 꿈이었을까? 자문하면,
얼굴을 빼곤 모두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매일매일 색깔을 갈아입는 것이
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자답하고 있었다.
꿈을 이루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된 나이에
밑그림 그대로인 어린 얼굴을 마주본다는 것은
생전에 사후를 미리 기록하는 일이어서
맥박이 다른 사람의 빠르기로 바뀌는 것을 묵인한다.
이것은 앳된 얼굴을 나의 진본으로 확정하는 일이므로
내 꿈은 영영 색깔을 가질 수 없을 것이지만,
영혼 되어 얼굴마저도 지워진 나는
내 얼굴이 궁금해 스크린에 다시 등장할 것이다.
영혼은 밑그림 얼굴과 인구에 회자되는 얼굴을
정표처럼 맞춰보곤 할 것이다.
그때 영혼은 생전의 마지막 생각을 첫 대사로 말할 것이다.
‘앳된 얼굴대로 사는 것이 꿈을 이룬 것이다.’
가끔, 멀쩡하던 필름이 끊기거나
무성영화처럼 색깔을 잃는 틈이 있을 것이다.
빛으로 만든 이 어두운 틈은 침 묻힌 몽당연필로
눌러 그려야만 닿을 수 있는 진심의 깊이일 것이다.
암호 
대한극장
